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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08. 2019

동네 미용실을 찾는 이유

왓챠 <어느 가족>

요즘은 대형 헤어숍들이 수두룩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고액을 내고 이발한다. 난 아랑곳없이 슬리퍼를 끌고 동네 미용실을 찾는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싸고 덜 친절해서다. 동네 미용실이 불친절한 게 아니라 뭐든 과하지 않아서 좋다. 내가 몇 번 들렸던 대형 샵에선 한 직원이 불쑥 나타나더니 마사지를 해준다며 손을 채간다. 설탕 덩어리 주스를 주며 별 생색을 다 내고, 이리저리 나에 관해 물어보는 통에 견디기 힘들다. 아무래도 과잉은 늘 곤란한 법이다. 서비스라는 명목 아래 시행되는 것들이 난 거북했다.


동네 미용실에서 찾는 것들

   

내가 주로 다니는 미용실은 아파트 상가에 있었다. 실내엔 백색소음에 가까운 TV 소리가 흐르고 아주머니는 딱 필요한 질문만 한다. 때론 무관심하게 느껴지지만 ‘늘 하던 대로 할까’라고 물어보실 땐 미소가 오간다. 내 머리란 게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자를 수 있다 보니 눈 깜짝할 세 끝난다. 사장님은 미용실을 문을 열 때마다 ‘저기 쉬운 놈 하나 왔구나’ 하며 반가워한다. 내 차례가 올 때까지 푹신한 소파에 벌러덩 누워 빈둥거린다. 일사 후퇴 때나 썼을 법한 탁자와 때 지난 신문이 수북하다. 그 옆 작은 책장엔 만화책들이 즐비하고, 먹다 남은 과일이 내 것처럼 소담하다. 내가 어떤 자세로 발라당 누워 책을 읽어도 아주머니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익숙한 듯 혼자서 샴푸를 하는 동네 단골 아저씨와 아이들의 까무잡잡한 피부도 정겹다. 난 이래저래 동네 미용실에 정을 주고 산다.        

영화 <어느 가족>, 온갖 잡동사니가 뒤섞인 세간을 구경할 수 있다

고딩 땐 3년 동안 한 미용실만 다녔다. 가게 이름이 <수지네 헤어아트>였지 아마. 흰 바탕에 분홍색 글자가 선명히 새겨진 선간판이 떠오른다. 그즈음 가세가 기울어 갑작스레 다른 도시로 이사를 했다. 하지만 난 굳이 버스를 타고 수지네를 찾았다. 가끔 꽤 긴 거리를 걸어서 미용실에 다다랐다. 땡볕에 땀을 뻘뻘 흘리며 미용실 문을 열자마자 에어컨 앞에 서서 웃통을 펄럭인다. 한 달에 두 번, 왜 난 고생하며 그 먼 길을 걸어갔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수지네가 익숙했기 때문이다. 미용실을 바꾸면 내 스타일을 설명하는 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하물며 구레나룻 길이까지 일일이 정해야 하니 민망하다. 내 뒷머리가 절벽이니 조금 숱을 남겨달라는 부탁을 또 해야 하다니. 그냥 날 잘 아는 분께 머리를 맡기는 게 여러모로 낫다. 무엇보다 여타 미용실의 수다스러운 주인장과 다르게 수지네 어머니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이발할 때 자꾸 말을 걸면 신뢰가 떨어지고 불안하다.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을 필요까진 없지만 조용한 분위기에서 내 공상을 존중해주는 아주머니가 좋았다.

미용실 가는 길은 정든 내 동네를 되찾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이사로 난 유년시절부터 함께해 온 동네를 잃어버린 상실에 뒤척였다. 뻔질나게 드나들던 슈퍼와 문방구에 쉽게 정을 떼지 못했다. 부모에 대한 원망과 뜻 모를 열패감을 머금고 동네 공원을 걷다 돌아왔다. 때는 바야흐로 중이병이 창궐하던 시절, 요즘도 가끔 아파트 단지를 떠올리곤 한다.

영화 <어느 가족>, 키키 키린 여사의 유작으로 기록될 것이다

'키키 키린' 여사와 작별하며


어제 코엑스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을 재 관람했다. 영화 개봉 후 세상을 떠나신 ‘키키 키린’ 여사의 마지막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기 시작한 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걸어도 걸어도>였다. 이후 <도쿄 타워>, <태풍이 지나가고>의 속된 면과 천진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의 연기를 사랑했다. 내가 기억하는 키키 키린의 위력은 잊힌 기억을 환기시키는 일상에 있다. 그 누구나 소년 시절의 아늑한 가정 풍경을 마음에 담기 마련이다. 바쁜 일상에 잠시 잊고 살았을 뿐 우리 안의 소년이 매복해 있다. 키키 키린의 캐릭터는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도, 옥수를 튀겨도, 집 앞에서 재활용 분리수거를 해도 현현한 일상의 질감을 그려낸다.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 해질 무렵까지 놀다가 집에 돌아가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어머니의 잔소리처럼 그리운 마음이다. 그 시절을 다시는 환유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과 함께 아련해진다. 아닌 게 아니라 <어느 가족> 역시 키키 키린 특유의 모습들이 곡진하게 새겨져 있다. 난 유독 영화 속에서 그녀의 외출 장면이 좋았다. 장면의 뜻과 상관없이 청명한 겨울 공기를 등진 그녀의 무너져 내리는 육체는 참혹하다. 늘 주방에서 달뜬 가족들을 위해 무언가를 내어주시던 그녀가 비척거리며 동네를 걸어간다.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었음에 안도한다.

영화는 혈연의 가족이 아닌 호혜적으로 묶인 타자들로 이루어진 가정을 그린다. 연출로 개입하기보단 전시하는 쪽을 택한다. 오늘 하루 저녁 같이 밥을 먹고 한 집에서 몸을 뉘인 채 살아가는 그들에게 특별한 건 없다. 다만 개개인의 속사정은 조금씩 다 다르다. 그들은 장담할 수 없는 미래에 짓눌려 서로를 의심한다. 가족들은 같이 모여 나베를 떠먹고 돈이 없다고 푸념을 늘어놓지만 마음속에 새겨진 어둠을 꺼내놓진 않는다. 영화는 모호한 질문을 뒤로한 채 옹기종기 모여서 무언가를 먹는 그들을 비춘다. 삶을 향한 매캐한 의심을 걷어내려 맛있게들 먹는다. 하루의 노동을 축복하며 노곤함을 위로하는 시간이다. 액자 하나, 누추한 세간 어느 곳에도 그들을 묶어줄 매개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을 잇는 느슨한 끈 하나 끊어지면 뿔뿔이 흩어질 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오늘의 피로를 위해 잠을 청한다.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누가 보지 않으면 슬쩍 내다 버리고 싶은 것이 가족'이라 했다. 늘 시달리면서도 끝내 긍정해버리는 가족이란 뭘까. 가끔 사회와 혈연이 만든 가족관계가 지닌 의무감이 답답할 때가 있다. 숙명처럼 받아 든 관계를 모두 걷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영화는 유사 가족과 진짜 가족의 차이가 무엇인지, 과연 상이한 게 있기나 한 건지 묻는다. 너의 일상을 함께한 손때 뭍은 세간이 어쩌면 가족을 지탱하는 유일한 끈이 아닐까. <어느 가족>은 비탈과 오르막에 선 이들을 통해 시대의 가족을 의심한다.

영화 <어느 가족> 유사, 대체, 대안 가족,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간에 그들의 동행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내가 수지네 미용실을 찾는 시간은 항상 저녁을 먹기 전이었다. 엄마가 두부 사 오라며 심부름을 시키면 미용실에 들렀다. 아주머니는 항상 내 머리를 만지다 말고 퇴근하는 남편의 전화를 받는다. 저녁은 뭘 차렸으니 일찍 오라고, 들어올 때 뭘 사 오라느니 하는 평범한 말들. 미용실 안으로 노을이 슬며시 드리우는 시간, 아주머니의 표정에도 근사한 빛이 담긴다. 흘깃 바라보는 내 눈 속으로 들어온 건 일상의 정경이다. TV에는 어느새 만화가 틀어져 있고 길을 지나가던 동네 꼬마들이 모여든다. 수지로 추측되는 소파에 기대 아이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누굴 기다리는 걸까. 맘이 고달픈 시기에 난 종종 그때 풍경을 떠올리곤 한다.


표지 사진은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영화 <퍼머넌트 노바라>의 스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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