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돔을 삽니다. 아직은 눈치가 보이네요.

by 햔햔


콘돔을 산다. 아무래도 다섯째는 아닌 것 같아 주기적으로 구매하고 있다.

이제는 구매 경험이 꽤나 쌓였는데도 매번 눈치가 보인다. 다 큰 성인이고 나쁜 데 쓸 것도 아닌데, 다섯째는 안된다는 위기감에도 하루 이틀 편의점을 그냥 지나치게 된다.

점원이 여자라서, 매장에 사람이 많아서, 날이 너무 밝아서. 아무리 개방적인 분위기가 됐다고 해도 이런 분야에서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다. 옛날 사람이라 그런가. 어릴 적부터 쉬쉬하던 분위기에 자라서인지 자꾸 부끄럽다.


내 생각엔 이놈의 상상력이 이런 부작용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몹쓸 연상. 뭔가로부터 상상하게 되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생각 회로 덕분에 이리도 신경 쓰는 것 같다. 물론 내가 그러니 남들도 그럴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지만. 다들 비슷하지 않나요? 아. 저만 저급인 건가요...


아무튼 그렇게 며칠을 그냥 지나쳤다. 아직 몇 개 남았으니 내일 사자는 생각으로 하루 이틀.

그러다 부지불식간에 용기가 생겼다. 용기는 위기에 처했을 때 빛나는 힘이라고 했던가. 다섯째가 생길까 봐 불안했던 마음이 텅 빈 상자를 본 순간 절박함과 다급한 용기로 빚어졌다.

그 길로 달려 나갔다. 그날따라 예뻐 보이던 아내가 1.5배 정도 더 예뻐 보이는 신기한 경험을 하며.


이것저것 잴 것 없이 편의점으로 달려가 인생의 보호막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작은 물건은 그간 존재감을 줄이고자 함께 놓였던 수북한 과자도 없이 홀로 계산대에 놓였다. 아. 그 독보적인 존재감이란.

점원이 계산을 위해 앞에 섰다. 아뿔싸. 여자다. 때마침 한 무리의 학생들도 가게로 들어선다. 묘한 분위기 속, 모두의 시선이 계산대로 향했다. 순간, 잠시 혼절했던 부끄럼 많은 이성이 깨어났다. 불뚝하게 튀어나온 주머니의 핸드폰을 모르는 척, 반대쪽 주머니를 뒤지며 어색함을 달래 보지만, 쓸데없이 민감해진 신경은 그네들의 표정과 작은 숨소리까지 느꼈고 시간은 슬로모션 모드가 됐다. 또 다른 신기한 경험이었다.


시공간이 뒤틀어진 편의점을 간신히 빠져나온 내 손엔 작은 상자가 들려있었다. 황급히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그리고 음식만 구매하던 집 앞 편의점을 뒤로하고 달렸다. 집 앞에 도착해 숨을 가다듬으며 시계를 봤다. 5분. 며칠간 미루고 미뤘던 일은 5분의 시간이면 충분한 일이었다.

위기와 절박함은 그렇게 모든 걸 신속하게 해결하게 만들었다.


| 남의 눈치를 보는 건


남 눈치 보며 살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그게 잘 안된다. 수많은 방문에도 기억 못 하던 나를 콘돔 구매 한 번으로 '콘돔 사간 손님'이라고 기억할 것만 같다. 그래서 눈치 보다 그냥 지나쳤다.

어느 정도 강박증이 있다고 보는 게 맞겠다. 누군가의 작은 곁눈질에도 식은땀을 흘리고 행동이 위축됐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불편한 증상이 다급함과 절박함 속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완화됐다. 내 코가 석자가 되어 남의 코든 눈이든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인지, 내 처지만 생각하다 보니 남의 이목 따윈 앞서 신경 쓸 여력이 없어졌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급한 볼일 앞에서 무시됐던 신호등과 놓치면 지각이라는 생각에 사람들의 아우성에도 파고들었던 만원 지하철은 모두 다급하고 절박해서였던 거다.

그랬다. 남 눈치 보고 부끄러워하는 것도 여유가 있을 때나 하는 거였던 거다.


그러고 보면, 평상시 나는 참 느긋한 사람이었나 보다. 절박함이 없어, 그래서 남의 곁눈질까지 신경 쓸 수 있는 여유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거. 눈치 보는 이유를 찾다 아무래도 나도 몰랐던 여유를 찾아낸 것 같다.


| 여유가 없으면 눈치도 없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 부질없음은 알고 있다. 어차피 그들의 생각이고 내가 노력한 만큼 나를 신경 쓰는 것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눈치가 보인 건, 딱히 다른 걱정이나 급한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삶이 꽤나 평온해서 이런저런 잡생각을 애써 들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각박하게 사는 것 같았는데 생각해보니 남을 신경 쓰는 여유가 내게 있었다. 그리 넉넉하지 않고 할 것과 하고 싶은 것들이 산재한 상태에서도 이런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니. 아무래도 내 코가 석자까지는 안되나 보다.


정신 승리라고 치부해도 좋다. 그래도 나는 이걸, 눈치라고 쓰고 여유라고 읽으려 한다. 어찌 되었든 닥치면 해내고 절박하면 앞뒤 가리지 않으니, 각박한 일상 속, 이 정도 여유쯤은 괜찮지 않을까.


자. 이제 콘돔을 사며 부끄러움을 느끼면 생각하자. '아. 아직은 살만한가 보다..' 하고.

(주기적으로 구매한다는 데 방점을 찍으면 뿌듯함도 얻을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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