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딱 한 번 그날 기분에 좌우돼 비밀번호를 바꾼 적이 있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다음날 육중한 워크스테이션을 들고 전산 지원실로 가야 했기에. 맞다. 까먹었다. 거기다 얼마 전 지척의 건물로 이동한 줄도 모르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건물의 '기억 속 전산 지원실'도 들렀다. 텅 빈 사무실이 땀범벅이 된 나를 거리낌 없이 반기는데, 조금 울컥했다. 다시 돌아가는 길. 워크 스테이션과 함께 했던 산보는 1도 즐겁지 않았다.
고구마를 백개쯤 먹어 머리까지 차있는 듯한 답답함과 갖은 노력에도 맞추지 못했던 허무함, 그리고 팔이 5cm는 늘어난 듯한 단 한 번의 고생은 새 비밀번호라 하면 걱정부터 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런 이유로 비밀번호를 만들 때면 항상 써왔던,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라면 알지도 모를 그런 비밀번호를 사용해 왔다. 비밀번호를 교체할 시기엔 끝의 숫자를 바꾸거나 중간의 부호를 바꾸는 정도로만 변화를 주어 혹시 까먹더라도 몇 번의 시도 안에 찾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에서 보안을 강화하겠다며 비밀번호 정책을 변경했다. 직전에 사용한 두 개의 비밀번호와 유사한 패턴의 비밀번호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공지. 오 마이 갓. 일하지 말라는 건가? 또 전산 지원실을 들르는 일이 생기는 건가?
이거 큰일이다 싶어 최대한 기억하기 쉬운 비밀번호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름+사번. 메일 주소. 집주소. 전화번호 등. 익숙한 글자와 숫자를 떠올렸다. 3개의 비밀번호를 만들어 돌려가며 쓸 요량이었다. 역시 똑똑하다며 그중 하나를 입력해보는데, 길이가 너무 길단다. 다른 하나를 넣으니 반복되는 숫자가 있단다. 이런. 이것저것 넣어보아도 무념무상으로 쓸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고심 끝에 이왕 이렇게 된 거 의미 있는 문구를 비밀번호로 써보자는 생각에 다다랐다. 회사 보안정책상 화면보호기 설정 시간은 5분. 자주 잊고 지냈던 것들을 적어도 하루에 수십 번은 되뇔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근거에서였는지 나름 멋진 생각이라고 자평까지 해가며 비밀번호를 변경했다. 그렇게, 매일 생각하면서도 잘 되지 않는 마음가짐이나 종종 잊게 되는 소망 같은 것들을 비밀번호로 쓰기 시작했다.
현재 비밀번호는 '지금처럼'이다. 이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지금처럼 아프지 말자', '지금처럼만 하자', '지금처럼 하면 망한다' 등등 비밀번호를 입력하며 쉽게 잊었던 마음가짐을 떠올리고 있다.
험난했던 회의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 한숨과 함께 이런저런 불평을 쏟아내다가도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순간, 답답했던 마음에 조그마한 숨구멍이 트이는 느낌이 든다. '잘 참았어. 지금처럼만 하자'.
며칠간 끙끙대던 문제를 해결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커피를 타서 자리에 앉으며 '지금처럼!'을 생각하며 칭찬하고, 울화통이 터져 결국 새어 나온 불만으로 다른 이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자리에 앉으며 '지금처럼?'을 생각하며 반성하고 있다.
그 연예인이 체중계에 오르며 Body를 점검한다면 나는 비밀번호를 두드리며 Mental과 Attitude를 점검한다고 봐야겠다. 지나치게 삐뚤어지기 전에 자주자주 기분을 펴주는 나름의 방책인 거다. '건강하자', '욕심내지X', '1인기업가', '열받지X'. 그때 내게 가장 필요했던 다짐과 간절했던 소망을 비밀번호로 쓰며 마음을 다잡기도 하고 비우기도 한다. 당시의 가장 절절했던 것들이다 보니 주말을 보내고 회사에 가서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효과도 있다.
물론, 자주 떠올린다고 매 순간 엄청난 도움이 되진 않는다. 그냥. 종종 잊게 되는 마음을 생각하며, 작은 의지나 그저 그런 위안을 스스로 만드는 정도다. '뭐니 뭐니 해도 안 아픈 게 최고지'. '욕심내고 열 받으면 뭐해. 잊자!', '내 곧 나가서 내 사업한다!', '그래, 한때는 이렇게 살고 싶어 했잖아'. 하는 등의 셀프 격려라고 할까.
요즘, 새해가 됐는데도 미덥잖은 내게 적잖이 아쉬워하고, 지난해를 돌아보며 속상해했더랬다. 이거. 아무래도 비밀번호를 바꿀 때가 된 것 같다.
괜찮아!XX
출근하면 비밀번호부터 바꿔야겠다.
ps.
비밀번호는 숫자, 문자, 특수문자 조합으로,
위에 적은 것만으로는 먹히지 않으니 그슥한 그 마음은 접어 주세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