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햔햔 Nov 14. 2024

즐겨 서는 소변기가 생겼습니다.

내가 항상 같은 소변기에 서는 이유

요즘 회사에서 즐겨서는 소변기가 있다.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지만, 성급한 오해는 금물. 딱히 그 소변기에 애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소변기 위에 붙어 있는 문구 때문이다. 


진정으로 듣는 것과 말할 차례를 기다리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이 말했다는 이 경구는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공감 캠페인의 일환으로 소변기 위 작은 액자 속에 들어있다.


대인 관계에서 조심해야 하는 태도에 대해 돌이켜 보자는 취지의 작은 포스트들이 소변기마다 붙어 있는데, 이해와 공감을 호소하는 유명한 명언이나 재미있는 일러스트 중 유독 이 문구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소변기 위 문구가 자꾸만 그 앞에 서게 만든다

딱히 눈 돌릴 곳이 없어 반복적으로 보게 된 것이지만, 볼 때마다 새롭고 진중한 느낌이 든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볼 일이 있을 때면 그 문구도 볼 요량으로 자꾸만 그 소변기를 찾게 됐다. 볼 일이 두 가지가 된 형국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이렇게 해야만...."


(또 저 주장이군. 아! 그 말을 해주면 되겠네.)

"잘 들었는데요. 제 생각에는..."


잘 듣지 않았다. 그저 반박할 말을 찾았고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평소 남의 이야기를 진득하게 잘 듣는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눈앞에 들이닥친 문구 앞에서 나는 당당히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급한 일을 보러 가면 문구를 보게 되고, 문구를 보면 나를 돌아 보게 되는 상황. 뜻하지 않게 한 번에 세 가지를 동시에 보게 만드는 신기한 소변기 앞에서 나는, 이제까지 경청이 아니라 내 할 말을 생각하며 차례를 '잘' 기다려왔음을 깨달았다. 


돌이켜 본 나는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조급해 보였다. 경청은커녕 경솔했던 순간만이 이미지로 떠올랐다. 순간, 여러 가지 이유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쉽지 않은 경청


요즘 ChatGPT와 사랑... 까지는 아니고,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기사나 문서 요약, 주식 시장 상황에 대한 판단, 간단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까지 많은 일을 함께하고 있다. 


일상의 많은 부분을 외주 주듯 ChatGPT에게 요청하고 ChatGPT의 의견과 제공하는 정보를 의사결정에 참조한다. 너무나 유용한 AI와의 협업. 그런 나의 AI 중용론이 자율주행 이야기로 올라온 어느 주말 점심, 어머니가 걱정의 포문을 열었다.


"너무 믿지마래이. 얼마 전에도 자율주행차 또 사고 났다 아이가.."


언제나 걱정이 앞서는 어머니다. 이제는 너무 익숙한 어머니의 우려. 아무리 자라도 아들은 당신에게 아이였고 마흔 넘은 그 아이는 여전히 내놓으면 불안한 존재다. 모든 면에서 독립했지만 어머니의 걱정에서만큼은 독립할 방법이 없다.


나는 그동안 하도 많이 해서 지겨워진 자율주행 차량의 안전 논쟁을 재개하는 대신, 어머니에게 AI 의 학습 원리에 대해 설명을 해드리기로 마음먹었다. 원리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걱정이 덜할까 싶은 마음이었다. (훗, 순진했다.)


"어머니, 이 AI라는 게 학습을 하거든요. 학습에는 지도학습과 비지도학습이 있는데... (중략) 그 방대한 정보로 엄청난 속도로 똑똑해지는 거죠."

"그래. 알것는데, 얼마 전에 사고 났단께."

"... 저기... 어머니? 그게... 사람이 내는 사고보다 확률이 낮아요."

"아니, 내 말 좀 들어봐! 사고가..."

"아니, 어머니! 제 말을 먼저 좀 듣고..."


이후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모든 기억을 뒤로하고 부끄러움만이 선명하게 새겨진 탓이다. 말할 타이밍을 기다렸고 타이밍을 잡지 못하자 말을 잘랐다. 인생은 몰라도 말 자르기는 타이밍이 아닌데, 참... 못났다.


어머니의 우려에 공감을 표하는 것이 먼저였음 좋았을 것을 어쩌자고 얄팍한 지식으로 설득부터하려고 했는지. 소변기의 문구를 다시 마주하고 있는 나는 스스로에게 낙제점을 줄 수밖에 없다. 


단 1분이라도


단 1분이지만 마주한 문구 앞에서 잠시마나 진지해지는 나다. 글렀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직 희망을 완전히 거두진 못한 이유다. 소변기 앞에서 골몰하는 1분여간의 시간이 소중하다. 돌이켜보고 반성하고 조금 나아지고... 있다고 쓰고 싶지만 나아지려 노력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경청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경청이 곧 소통의 시작이다’라는 말은 이제 너무나 흔해서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익숙한 말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경청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일상에서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를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마 대부분 그저 상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대화 속에서 나는 상대의 말에 정말로 집중했는지, 아니면 그저 겉으로만 반응하며 내 이야기로 대화를 끌고 가려고 했는지 돌아본다. 가장 뼈아픈 순간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조차 ‘가짜 경청’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다. 


소변기의 문구를 볼 때마다 다짐한다. 오늘은 조금 더 진정으로, 조금 더 마음 깊이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겠다고. 대화는 단순히 말의 주고받음이 아니라, 마음의 주고받음임을 잊지 않겠다고. 


진정으로 듣는다는 것은 말할 차례를 기다리는 것과 전혀 다르다.


다시 한 번 마주한 문구 앞에서 나는 또다시 몸을 부르르 떨고 만다. 에머슨의 말은 이제 내게 단순한 글귀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 이제부터 이것은 내가 더 나은 소통자가 되기 위한 작은 이정표다. 엇나갈 때마다 나를 바로 잡아 줄 이정표. 한동안은 이곳에서 숱한 떨림을 경험할 것 같다. (웃음)


그나저나 에머슨 아저씨! 아저씨 덕분에 화장실이 철학의 장이 돼버렸네요. 모쪼록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전 20화 “안녕하세요?”가 어려워 주방에 갇힌 경상도 남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