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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햔햔 Mar 21. 2024

세상을 구한 한 마디

나도 구해줘.


피곤하다. 밤 늦게까지 글을 썼더니 그 여파가 제법 크다. 이전에 청탁받은 글 때문이다. 아니다. 글을 써야하는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 부르짖은 2차 술자리에 참석한 탓이다. 잠깐. 생각해보니 저녁에 술 한 잔 하자던 선배의 제안을 덥석 수락한 것이 실수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째서 이 바쁜 와중에 글 청탁을 수락하고, 할 일을 만들어 놓고도 술자리 약속을 잡았을까? 마감일을 넘겨서야 글을 마무리하면서 돌아보니, 생각 이상으로 나는 생각이 없었다.


물론, 바쁘다는 핑계로 글 쓰는 것이 게을러진 나를 채찍질 하려는 마음도 있었고, 오랜만에 한 잔 하자는 선배의 제안이 반갑기도 했고, 1차만으로 끝내기엔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언제나 계획은 완벽해서 다음 날 잔업 후에 몇 시간 만에 글을 쓰면 될 거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 왜 그랬을까...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 Pixabay


결국 후회는 내 몫이다. 계획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특히나 글 쓰는 것은 더욱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미루고 낙관하다 또 이 모양이다. 자꾸만 실수를 반복한다. 무엇보다 거절을 잘 하기로 했던 다짐을 어겼던 것이 가장 큰 실수다.


세상을 구한 한 마디 "아니요"


책 <결국 원하는 것을 얻는 사람들의 비밀>에는 단 한 마디로 세상을 구한 이야기가 나온다. 냉전이 정점에 이른 1983년, 러시아의 조기 방어 시스템이 미국의 탄도 미사일5기를 포착한다.


당시 당직 장교이자 IT 전문가였던 페트로프는 위성으로 미사일을 확인할 수 없었던 점, 미국이 공격했다면 5기가 아닌 수 천기의 미사일일 것이라는 점, 얼마 전 첩보기로 오인하고 민항기를 격추한 점을 떠올리며 상관에게 "아닙니다"라고 보고한다.


다행스럽게도 전면적인 보복이 유일한 옵션이었던 소련에 미사일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비록 옳은 판단을 한 페트로프의 몸은 안도감에 무너져 내렸지만, 세계의 균형은 무너지지 않았다. 세계 3차 대전이 목전에 있던 순간의 대답 한 마디 덕분이었다.


온도 차가 극명하지만 개인의 삶에서도 대답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Yes와 No의 균형이 제대로 잡히지 않으면 삶의 균형도 무너지기 마련이다. 대부분 거절을 하지 못해 문제가 생기는데, 주위의 부탁이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해 돈과 시간, 체력을 낭비하는 일이 허다하다.


딱 한 잔만 더 하자는 권유를 이기지 못해 술병이 나고, 급전이 필요하다는 친구의 청을 거절하지 못해 친구와 돈을 다시는 못 보게 되기도 한다. 주위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정작 자기 일이 남아서 잔업을 하고 생각 없이 승낙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해 사이가 멀어지기도 한다. 속상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Yes와 No의 갈등은 내면에서도 벌어진다. 머릿속에 잘못된 조기 경보가 울린다. "배가 고프다. 야참을 넣어야 한다!", "오늘은 몸이 좋지 않은 것 같다. 운동을 건너뛰어라!", "딱 한 잔만 더 해라. 여기서 빼면 상대와 멀어질 수 있다!" 수많은 경고에 "Yes"를 외치는 순간, 얼마 지나지 않아 내면에서 벌어지는 '후회'라는 세계 대전을 목도하게 된다. 아, 속 시끄럽다.


"아니요", "안 됩니다"는 해롭지 않아요

              

▲ "아니요" 삶을 정갈하게 만드는 기술ⓒ Pixabay


"아니요"가 쉽지 않은 것은 집단생활에서의 생존 본능 때문이라고 한다. 이제는 시대가 변했지만 아직도 불안감은 여전하다. 하지만 집단의 역할이 이전과 같이 생존을 위하지 않는다. 집단 속 개개인이 중요해진 만큼 자신을 관리하는 것이 집단에도 도움이 된다.


"아니요"를 남발(?)하다보면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 아직 그런 경지까지 다다르진 못했지만, 상대의 거절에도 내성이 생긴다는 거다. 거절을 해봄으로써 상대의 거절에도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내가 거절하는 이유를 들여다보면 상대를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몸이 피곤해서, 내 가정에 사정이 있어서, 내 시간이 없어서. '당신이 싫어서'라는 경우는 정말이지 드물다(아예 없을 순 없다).


이런 입장을 생각하면 상대가 내게 하는 거절에 대해서도 딱히 '내가 뭐 잘못했나?', '나를 싫어하나?' 등으로 확대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에 하나 정말로 그것이 이유라면, 당황스럽고 가슴 아프겠지만, 그렇다 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뿐이다.


이런 메커니즘에 의해 "아니요"에 익숙해지면 요청하는 것에도 부담이 적어진다. 언제든 거절 당할 수 있음을 이해하고 그것이 그리 치명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 중요한 요청을 머뭇거리지 않게 된다.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지만 확실히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전에는 팀장이나 상급자에게 요청이 아닌 보고를 하면서도 망설였었다. 내 의견에 대한 반대나 지적에 상당히 많은 신경을 썼다. 따지고 보면 모든 보고는 상대에게 의견을 묻는 일종의 요청이고 그것은 언제나 거절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부담감이 확연히 줄었다.


"아니요"를 말하는 것은 집안에 불필요한 물건을 들이지 않는 것과 같다. 물건이 적으면 정리할 일이 적어지고 청소도 쉽다. 어질러진 거실을 보며 한숨을 쉬는 일도 적고 몸도 마음도 여유로워진다. 들였으면 좋을 것도 분명 있겠지만, 잘못 들인 물건으로 속상할 일을 줄이는 게 조금 더 현명한 판단일 테다.


삶을 정갈하게 정리하는데 "아니요"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다. 비록 확실한 방법을 두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이렇게 분투하고 있지만, 후회의 또 다른 말이 지혜라는 말을 믿으며 다음을 기약하고 있다.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깊숙이 장전한 이 말을 적시 적소에 발사하고 말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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