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배운 것은 태도였다
서울에서 생활하기 시작했을 때, 나의 최대 난관은 '말'이었다. 한 번도 사용해본 적 없던 '서울말'. 경상도 사나이로 태어나 20년을 경상도에서만 살았던 나에게 서울말의 억양은 네이티브 영어 발음을 따라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처음엔 쉽게 생각했다.
“서울말 그거야 말끝만 살짝 올리면 되는 거 아냐?”
오산이었다. 오산의 정도를 수치화할 수 있다면 그건 오산이 아니라 오만산은 되었고, 흉내 내려던 내 얼굴은 오만상이 되기 일쑤였다.
어째서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지? 어째서 "얼마예요?"라는 말을 끝까지 발음하지 못하고 "요?"에 다다르면 목소리가 음소거 수준으로 작아져 반말이 돼 버리는 거지? 이상하게도 생각이 목구멍을 지나는 순간 말끝이 삼켜져 버렸다.
덕분에 나는 선배들에게 어설프게 반말하는 신입생이 되었고, 한동안 그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야 말았다. 대답은 “네네”거리며 잘도 하고 마주치면 고개도 깍듯이 숙여 인사하는데 입에서 나오는 인사말은 "안녕하세...." 혹은 "식사는 하셨어..."다 보니, 다들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서울말이 잘 안 되면 그냥 시원하게 경상도 사투리를 쏟아내면 될 일일 것 같지만, 당시엔 그것도 녹록치 않았다. 그즈음엔 TV 드라마에서 등장인물이 사투리를 사용하면 자막이 붙던 시기였으니 대화가 쉽게 이어질리 만무했다.
게다가 생면부지의 타지, 그것도 눈 깜빡하면 코 베어 간다는 서울에서 안 그래도 소심한 나로선 대놓고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물론, 내가 입을 여는 순간 모두가 알아차렸겠지만, 나로선 코를 지키는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역시나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했다.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거라는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조금 당황스러운 것은 늘어야 할 서울말이 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경상도 억양과 말투에 적응해 버린 것인데... 어쨌든 생활의 불편함은 많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런 뜻하지 않은 안락함은 첫 사회생활에서 커다란 복병이 됐다.
문제는 주변 사람들이 경상도 말에 익숙해진 것을 내가 서울말을 잘하게 된 것으로 착각했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착각은 첫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처참히 깨졌다.
분명 나는 친절하게 “안녕하세요?”를 외쳤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오는 건 손님들의 미묘한 눈초리였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새침한 서울 손님이라고만 생각했다. 내 나름의 최선이었고 최대한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있다고 믿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컴플레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직원이 반말을 섞어 한다는 이유였다. 사장님과 매니저가 나를 조용히 불러 앉혔다. 사장님이 내뱉는 한숨은 꽤나 무거웠다.
"저기, 안녕하세요? 한 번 해볼까?"
"안녕하세요." (들릴 듯 말 듯한 “요”)
".... 그.. 그래, 잘 안 될 거야. 그럼 이번엔 요~하고 길게 한 번 해볼까?"
"안녕하세요~ 이렇게요?" (들릴 듯 말 듯한 두 번째 “요“)
"그래그래, 훨씬 낫네. 이제 그렇게 해보는 거야. 응? 부탁해~"
사장님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아르바이트생에게 이렇게 절절하게 부탁하다니. 나로서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최대한 끝말을 길게 붙이려 노력했다.
사장님의 간절함이 체념으로 바뀌는 데는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한동안 나는 매니저 누나의 배려(?)로 손님 응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 나를 무던히도 아끼던 매니저 누나가 손님에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온 날이었다.
그렇게 바(Bar) 주방으로 물러난 나는 들어오는 손님에게 "안녕하세요~"만을 외치며 맥주를 내리고 컵을 씻었다.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안녕하세요?”
'어? 되게 비슷한데?'
어느 순간 나는 "요"를 굉장히 또박또박 발음하고 있었다. 어떤 거리낌도 없이, 어떤 여과 과정도 없이 말을 끝맺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평소 대화에서도 이전과는 다른 상냥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2주일이 되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부족한 손을 채우기 위해 홀에 투입됐다.
당연하게도 컴플레인이 없지는 않았다. 손님 자리에 술병을 놓을 땐 신문 배달하듯 툭 내려놓고 지나가면 안 된다는 사장님의 참을성 있는 설명을 들어야 했고, 주문을 못 알아들으면 “뭐라고요?”보다는 차라리 “네?”라고 하라는 매니저 누나의 어금니 꽉 깨문 가르침을 받아야 했다.
우여곡절이 수없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처음보다 훨씬 나아졌다는 칭찬이 늘어갔다. 이 시절, 거칠었던 말과 행동이 제법 매끄러워졌다. 실상 나는 서울말이 아니라 상대를 대하는 태도를 배웠다.
말이란 게 참 신기하다. 나의 진심과는 무관하게 상대에게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단체 손님의 방문에 내심 치를 떨었지만 익숙해진 "안녕하세요?"가 사람들을 미소 짓게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웃음)
말은 이왕이면 따뜻하게 하는 것이 좋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수없이 반복한 덕분에 마스터했던 "안녕하세요?"처럼, 내 진심이 가닿거나 비록 진심과는 거리가 멀어도 상대를 웃게 만들 수 있다면, 따뜻해서 나쁠 게 없다.
여러 매체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말 하나 때문에 곤욕을 겪는 광경을 목도하곤 한다. 진심이 어떻든 입 밖으로 나온 말은 타인을 향하고 그 자체가 나를 대변한다. 그러니 조심하고 또 조심할 수밖에 없다.
말이 거칠다면 부드럽게 매만지고 부정적인 표현이 가득하다면 조금씩 덜어내는 일. 의식적이고 반복적으로 노력하면 분명 조금은 나아질 일이다. 말도 결국 하다보면 느는 법이니까.
두 말하면 입 아픈 소리겠지만 말의 힘은 어마어마하다. 사람을 웃거나 울게도 하고 위로나 상처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말이란, 생각보다 훨씬 신중하게 다뤄야 할 도구다. 잘 다루면 유용하지만 잘못 다루면 무기가 된다. 되도록 고운 말을 쓰고 연습해야 하는 이유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몇 주 뒤, 숙련된 나의 "안녕하세요?"는 선배들을 적잖이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 놀람은 무슨 힘에선가 그들의 지갑을 열게 했다. 뜻하지 않은 공짜 밥. 그것도 좋았지만, 미묘하게 어색했던 기류에 더해진 온기는 따뜻한 밥 한 끼보다 더 따뜻했다.
모름지기 따뜻하면 좋다. 푹푹 찌는 이런 더위 속에서도 말과 마음의 온도만은 그렇다. 오늘 하루 차가웠던 모두의 내일이 조금이라도 따듯해지길. 줄곧 미지근했던 일상이 내일부턴 뜨뜻해지길 바라본다. 먼저 시작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는 분명 따뜻함을 불러올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