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스무디를 먹기 시작했다. 케일, 파인애플, 사과, 견과류 등을 갈아서 만드는 건강 음료다. 회사 내 사이드 프로젝트를 일 년간 진행하면서 생긴 변비로 인한 아내의 처방전이다.
일전에 항생제 때문에 변비에 심하게 걸렸었다. 변기에 앉아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을 정도로 고생했던 터라, 물도 자주 마시고 운동도 하는데 사람이 가장 큰 변수였던 프로젝트에서 꽤나 신경을 썼던 모양이다.
아무튼 아내의 처방이 시작됐고 '아내는' 화장실을 잘 가게 되었다. 오타가 아니다. 크게 효과 없었던 나와는 다르게, 배변 활동에 아무 무리가 없었던 아내가 화장실을 '더' 잘 가게 되었다.
그린 스무디의 효과를 체감한 아내의 편안한 표정은 참 선해 보인다.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의 모습. 그렇게 아내의 보다 건강한 배변활동이 시작됐다.
다다다닥. 아내가 아이들을 챙기다 말고 달려간다. 잠시 후 여유롭게 재등장한 그녀는 조금 전보다 훨씬 인자한 모습으로 아이들을 챙겨 학교로 보낸다.
가벼운 발걸음. 부럽다. 다행히 나 역시 아침저녁 꾸준히 마시는 그린 스무디 덕인지 조금씩 중요한 활동이 편해지긴 했다.
이뇨작용이 심하다는 커피와 차를 줄이고 밀가루 섭취도 줄인 덕분도 있겠지만, 본디 모든 공은 상대에게 돌려야 하는 법. 가정을 평화롭게 지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덕분에’를 시전하면 된다. (이 '덕분에'는 정말이지 엄청난 표현이라 나중에 자세히 다뤄볼 요량이다.)
다다다닥. 네 아이를 챙기느라 음식을 만드느라 바쁜 아내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다급하게 화장실을 뛰어가곤 했다. 그리고 이내 인자한 모습으로 나타나 가족을 다시 챙긴다.
어느 날은 아이들 옷을 입히다가 다다닥. 또 어느 날은 아침을 차려주다 다다닥. 그리고 언젠가는 “여보, 잘 다녀~와~~요~~~“하며 다다닥. 그렇게 아내의 다다닥은 화장실 가는 길에 울리는 멜로디 같은 것이 되었다.
다다다닥. '음… 채우기 위해 비우러가는 군…' 자연스런 반응이다.
그러다 얼마 전, 엄청난 실수를 하고 말았다. 아이들과 놀고 있는데 음식 재료를 손질하던 아내가 여느 때와 같이 경쾌한 멜로디를 연주하며 달려갔다. 다다다닥.
그 모습이 너무 익숙하고 다급히 뛰어가는 모습이 귀여워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나도 모르게 아내를 향해 외치고 말았다.
”이런 싸개~“
주말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다음날 여행을 가기로 되어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아니, 여행을 위해 쓴 휴가에 들떠서일지도..
아무튼 나름 웃기려고 한 말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고 아내 역시 일언반구도 없이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화장실을 다녀온 아내로부터 차마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모를 사실을 듣게 됐다.
“한 달에 한 번 고통 받는 아내에게 싸개는 너무한 거 아냐?”
아내의 얼굴에는 원망이 아닌 어이없음이 담겨 있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사과하기 시작했다.
당연한 것은 없다.
상상력이 뛰어난 분들에겐 다소 냄새나는 이야기였겠지만, 많은 오해가 학습 효과로 인해 생겨난다.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이 적지 않다.
지난번에도 그랬는데... 라는 생각에 잦은 실수를 범한다. 이번엔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못하고 뜻하지 않게 상대에게 무례한 말을 던지게 된다.
"또 먹어?"
"... 간헐적 단식 첫 끼거든!"
"...... 그... 그래..."
일정한 패턴 안에서 사는 것이 사람이지만 상황은 언제나 똑같지 않다. 높은 확률로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상대의 상태에 따라 말은 현저히 왜곡되기도 한다.
"요즘은 남편이 속 안 썩혀?"
"...... 무슨 말이 그래?"
매주 남편 욕을 했더라도, 매번 맞장구치고 함께 욕을 했더라도, 남편을 남 편으로 철썩 같이 믿고 있더라도 어떤 때는 남편 험담이 싫을 때가 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하물며 사람은 말해 무엇 하겠나. 변수도 이런 변수가 없다. 그러니 종종 웬수도 되고 원수도 되는 것일 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학습 효과는 나쁜 방향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는 거다. 학습 효과에는 부정적인 요소만 있지 않다. 한 번 나쁜 방향으로 작용한 효과는 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조금 더 나은 태도를 갖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을 보시는 모든 아내 분들께 사과드립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남편들이 저와 같은 실수를 하고 있을 겁니다. 상황이나 사건의 경중이 다를 수 있고 태도나 말투가 다를 수 있을 테지만, 분명 잦은 오해로 인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을 겁니다. 알 수 있습니다. 남편들은 장난꾸러기입니다. 웃자고 한 일에 죽자고 달려드는 그런 치기 어린 남자입니다.
이런 남편들의 장난으로 빗어진 비극은 학습 효과의 부작용이기도 하지만 남편들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부디 이 또한 학습 효과를 생각하며 너그러이 혹은 현명하게 용서하고 가르쳐 주시길 바랍니다. 그런 너그러운 태도와 현명한 아내 분들의 처세에 분명 남편들도 학습하여 좋은 방향으로 변화할 거라 생각합니다.
왜 나까지 싸잡아서 그러느냐고 할 분들이 있는 것을 압니다만 그냥 넘어가 주세요. 제가 했던 장난을 차마 혼자서 감당할 수가 없어 그럽니다. 동지애를 발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