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해문방구 Feb 21. 2022

무엇이 될지 모르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처음'

민주주의언박싱, 박싱에서 언박싱으로

민주주의 언박싱, 박싱에서 언박싱으로.


학급 자치를 업무를 맡으면서 어린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내가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린이 민주주의에 대한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던 차에 '민주주의 언박싱’ 서평단을 신청하게 되었다. 시민이 되려는 청소년을 위한 민주주의 가이드북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이 책은 4 개의 박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4개의 박스에는 종합 선물세트처럼 칼럼, 소설, 인터뷰, 만화, 인포그래픽, 기사, 놀이 등 다양한 형태와 형식의 글과 그림을 제공하여 민주주의를 다양한 색과 형태를 지닌 목소리로 제공한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었다. 누가 말하고 있는지 목소리의 주체가 사라진 교과서적 설명이 아니라, 실제 역사와 현장 속에서 민주주의를 경험하며 고민과 실천을 이어온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색과 향을 지닌 다양한 목소리로 듣고 싶었다. 그 속에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교육의 방향성에 대한 성찰이 담긴 조언을 발견할 수 있기를 원했다. 이런 욕구를 이 책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나서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자주 이 책의 제목을 언급하게 되었다. 5학년 1학기 국어와 도덕을 통합한 주제 수업, 소중한 인권 수업을 할 때였다.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과 UN에서 채택한 세계 인권선언문을 살펴보며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인 인권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이 주제 수업 때 자주 언급하게 된 단어가 ‘민주주의 언박싱’이었다. 


‘나의 권리를 내가 포장지를 뜯지 못한 채로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민주주의 언박싱이란 말은 ‘나의 권리를 내가 포장지를 뜯지 못한 채로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물음으로 대신하기도 했고 ‘이 권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주어지는 권리니 마음껏 누리렴! 네와 아니요. 진솔하게 너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해주렴.’이라고 수업 시간에 진솔한 동의와 거절 표현을 권할 때도 쓰였다.


박싱에서 언박싱으로. 민주주의라는 딱딱한 교과서적 개념은 있으나 아직 제대로 열어보지 않은 상태의 민주주의, ‘이 상자를 열어 제대로 경험해보고 그 안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자!’라는 목소리가 이 제목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 말을 하면서 동시에 나를 향해 말했다. ‘민주주의 언박싱’


민주주의 언박싱에 담긴 내용 중 인상적인 칼럼이 있었다. 알고도 못한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시민 의식 실태 엿보기(한국 청소년 정책 연구원 선임 연구 위원 이자 심리학자인 장근영 칼럼)라는 제목의 칼럼이었는데 여기에 IEA ICCS라는 각국의 중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해당 나라의 민주시민교육성과를 측정하는 조사 결과가 나온다. OECD(경제 협력 개발기구)에서 세계 각국에서 민주주의와 시민 사회에 대해 어떻게 얼마나 교육하는지 그리고 그 교육은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서 ICCS(국제 시민성 및 시민 의식 교육 성취 도 연구)를 진행했다. 이 조사는 IEA(국제 교육 성취 도 평가 협의회)에서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이 조사를 IEA ICCS라고 부른다. IEA ICCS는 각 국의 중학교 2학년 대상 을로 하는 해당 나라의 민주 시민 교육 성과를 측정하는데 조사하는 내용은 민주주의와 시민 사회의 원칙에 대한 지식, 태도, 행동이다. 


2016년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ICCS 결과 시민지식은 24개국 중 6위, 참여 경험 (정치 단체 가입률)은 24개국 중 24위, 태도(정부 신뢰도)는 24개국 중 23위에 해당했다. 신뢰와 참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이 요소들이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겐 모두 부족하다. 이 칼럼을 쓴 장근영 한국 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식은 있으나 경험이 적은 우리나라 민주 시민 교육에서 교내에서의 참여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참여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누군가를 만나서 함께 일해본 경험,
그 사람들과 진심으로 교류해 본 경험이 신뢰의 바탕이 된다. (... 중략...)

교내에서의 참여도 중요하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주의=투표’ 정도로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그 이상이어야 한다.
-민주주의 언박싱 p.73-


이 글을 읽으면서 어린이 물결단이 투표 그 이후, 그리고 투표 그 이상의 경험을 만들어 내는 참여의 기회가 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무엇이 될지 모르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경험을 차근차근해 나간다.


소곤소곤 고민상담소, 직접 만나 상담하던 날.
열심히 공감하며 답변을 준비했는데 상담 당일날 오지 않은 친구도 있고, 학급 대표가 번갈아 참여하면서 회의 내용 전달이 잘 안 되어 상담해주기로 한 대표가 오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열심히 매주 물결단 활동에 참여하다가 당일날 못 오게 된 학생도 있었다. 이렇게 당일날 여러 상황들이 발생하자 순간 당황스러움과 조급함 이 일어났다. 그렇지만 그때에도 마법 같은 주문이 있지 않은가. 처음이니까. 차근차근.


호흡을 가다듬고 물결단에게 말했다.


“그래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는 거니까.
우리 함께 해결해 보자.
할 수 있는 만큼 해 보자.
서로 도우면서 해결해 보자. ”


그렇게 유연하게 서로의 빈자리를 채우고 그동안 준비해준 어린이들의 아이디어와 노력을 담아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담아 직접 상담이 진행되었다. 상담받기로 한 신청자가 안 온팀은 보너스 상담팀으로 하여 정해진 상담팀에서 이야기해 준 답변 외에 추가로 상담을 받고 싶은 경우나 상담이 빨리 끝난 경우 추가 상담을 해보자고 하였다. 그러자 ‘키가 안 커요.’라는 사연의 주인공이 앞 팀에서 자신에게 맞는 해결방법을 못 찾아 추가 상담을 신청하였고 그 덕분에?! 모든 팀이 상담을 진행할 수 있었다.



<직접 상담받은 어린이들의 소감>


“조언들을 열심히 실천해서 키 많이 클게요.” -5학년-

“상담을 해서 속이 후련하고 재밌었다.” -4학년-

“앞으론 화가 날 때 화풀이하지 말고 혼자 있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상담을 받으니까 더 나은 것 같아요.” -5학년-

“너무 도움이 되었다.” -6학년-
“딱히 좋은 해결방법을 얻지는 못했지만 이야기를 털어놓아 좋았다.” -5학년-


<어린이 물결단 소감>
“고민이 어려워서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다. 파이팅! “

“물결단을 끝낸다고 생각하니 시원섭섭하다. “

“처음에 많이 긴장해서 고민상담을 잘해줬을까 걱정했는데 고민을 듣고 공감도 해주는 것이 재밌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첫 고민 상담이어서 조금 떨렸지만 그래도 잘해준 것 같아 뿌듯하다.”

“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준다는 게 너무 설렜다.”
“ 모르는 사람과 만나 고민을 해결해 준다는 우리들의 아이디어가 신선했다. 우리가 자랑스럽다.”



없던 것이 처음 생겼다. 처음을 대하는 태도.


소곤소곤 고민상담소가 끝나고 책상을 정리하고 돌아가는 길, 

“ㅇㅇ 에게 상담을 해주었다. 고민이 어려워서 힘들었지만 재밌었다. ㅇㅇ야, 파이팅!”이라고

마지막까지 상담을 했던 어린이를 응원하는 소감을 적은 5학년 학급 대표가 가장 마지막에 교실을 나서기 전 내게 물었다.


“그런데요. 선생님. 어린이 물결단이 작년에도 있었어요?”


“아니. 올해부터 처음 시작됐어.”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다시 한번 어린이 물결단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없었던 것이 생겼다는 것. 없었던 어떤 것을 만들었다는 것.


어린이가 스스로 경험을 창조하는 일, 무엇이 될지 모르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경험, 흰 도화지 한 장을 받았을 때 무엇이든 스케치하고 그릴 수 있는 그 처음의 느낌으로. 차근차근.


투표 그 이후, 투표 그 이상의 일을 함께 해 나아가는 첫 경험을 했다는 것. 이것이 어린이 물결단의 가치이고 앞으로도 계속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어린이의 마지막 질문을 통해 마음에 새긴다.


없던 것이 처음 생길 때의 마음가짐. 

차근차근.

그 마음으로 어린이 물결단 1기와 함께한 첫 학기는 ‘늘 처음처럼’이라는 태도의 힘을 다시 보게 했다.


처음이라고 생각하니 속도를 늦추게 되었다.
‘차근차근해보자.’라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처음이라고 생각하니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대해 관대해졌다.


결과나 성과를 요구하기보다 시도 그 자체로 감탄하게 되었다.
‘처음이니까 차근차근’이라는 마음이 섬세한 혼돈, 산만한 질서, 한계의 허용, 유연한 창조. 

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살아 숨 쉬게 했다.


이 ‘처음’을 대하는 태도가 학생자치의 핵심임을 깨닫는다.


나는 예전에 ‘어린이는 어른의 길잡이’라는 말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어린이를 대상화하다 못해 신성시 하는 듯해서였다. 어른이 어린이를 잘 가르치고 이끌 생각을 해야지. 어린이한테 길 안내의 책임을 떠맡기다니. (...) 그런데 어린이에게 할 말을 고르고, 그 말에 나를 비추어 보면서 ‘길잡이’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 어린 이가 가르쳐 주어서 길을 아는 게 아니라 어린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고심하면서 우리가 갈 길 이 정해지는 것이다.  
-어린이의 세계 P(253-254)



<어린이의 어린이에 의한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 물결단>

소파 방정환 선생님의 호 소파(작은 물결)의 뜻을 이어 어린이가 어린이의 ‘작은 물결’이 된다.

1.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어린이가 학교 생활을 주인공으로 누리도록 하는데 기여한다.
2. 리더십 교육을 통해 감사하고 공감하며 자연스럽게 순환하는 마음의 힘을 기른다.
3. 어린이들의 마음에 공감하며 학교의 모든 어린이를 위한 활동을 어린이 스스로 창조한다. 
4. 앞에 말한 어린이의 목소리에 이어 말하며 소통 능력을 키운다.
5. 무엇이 될지 모르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경험을 차근차근해 나간다.







이전 03화 작고 사소한 고민에 정성껏 공감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