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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금비 Oct 04. 2023

날 움직이는 동력, '그래서 나 뭐 하지?'

뿌연 회색 안갯속 운전대만 꽉 잡고

아무도 나에게 뭐가 되라고 한 적은 없다.
딱 한 명 빼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아무도 나에게 뭘 하라고, 뭐가 되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 그건 신의 부름도 아니고, 부모의 바람도 아니고, 선생의 멘토링도 아니고, 이 사회의 기준도 아니다. 바로 나 자신, 나만이 나에게 강요할 수 있다는 걸 시간의 흐름 속에서 깨달았다.


'그래서 나 뭐 하지?'


이젠 저 질문이 어느새 고통이 아닌 설렘으로 바뀌면서 나는 기쁘게 새로운 경험들을 맞이한다. 그로 인해 얻은 나의 새로운 타이틀이 더 반짝거린다. 내 이력서에서나 빛나는 타이틀은 언젠간 쓸 때 쓰더라도, 지금의 나는 뭘 할지에 대한 질문으로 내 하루를 다채로운 경험으로 쌓는다.


물류창고 알바, 학습지 방문 교사, 뮤지컬 시간 강사, 연극 공연 연습으로 바쁜 하루를 보낸다고 하면 주위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로 날 쳐다보지만 새로운 경험을 통해 나의 역량과 능력치를 발견하는 순간순간이 짜릿했다.


하나의 정답을 위해 애쓰는 질문이 아닌, 이제는 나를 한없이 확장해 나가는 이 에너지 넘치는 물음을 오늘도 던져본다.


"그래서 나 뭐 하지~?"



초등학교 때는 걸스카우트 보장도 하고, 고등학교 때는 반장도 두 번이나 했다.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해 스무 살에 미국으로 도망치듯 혼자 공부하러 갈 때도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2년 동안 싸이월드, 네이버, 무한도전을 독하게 끊고 자신을 닦달하며 공부에만 전념했다.


미국에서 3년이라는 이미 긴 시간을 보내 놓고도 대도시에서 공부하고 싶은 욕심에 또다시 일 년의 시간을 더해서 휴스턴에서 뉴욕으로 이사를 갔다. 건축을 공부를 위해 갔던 대학교에서는 한인회 회장도 맡고, 졸업 전시 때는 2등 상을 받고 나오기도 했다. 귀국 후에 갔던 MBA 과정에서도 모든 수업 내용이 외계어 같았지만 노력으로 교환학생 기회를 얻어 프랑스로 갔다.


나의 첫 회사인 브랜드 컨설팅 회사에서 매 프로젝트에 임할 때도, 퇴사 후 갓 시작한 에어비앤비에 슈퍼 호스트 배지를 한 달 만에 달았을 때도, 그 후 계속해서 생기는 새로운 직업들에 하나하나 열정적이고 진심으로 대하는 오늘까지.


오랜 기간 지속된 습관이 관성처럼 남아서인지 여전히 나는 뭘 해도 열심히다.

Pratt Institute 건축 학교 2학년 재학 중 3일 밤을 꼬박 새우고 나서 프로젝트 발표 중인 열심쟁이 나



난 세 자매 중 가운데 끼어있는 둘째 딸.

세상에 모든 아버지들이 일주일에 한두 번 들어오는 줄 알 정도로 고등학생 때까지 얼굴 보기 힘든 바쁜 우리 아빠.

그리고 학창 시절 학부모 모임에는 꼭 나가셔도 내 성적표는 궁금해하지 않으셨던, 그때도 지금도 뭘 강요한 적이 없는 방임형 우리 엄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환경이 나를 뭐든지 열심히 하게 만든 환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무언가를 특출 나게 잘하면 부모님으로부터 지대한 관심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인정욕구불만에서 발현된 습성이랄까.


인정을 받기 위해, 혹은 튀기 위해 자연스럽게 나는 무언가가 되기를 쫓고 있었다. 무언가가 되려면 내가 무얼 하고 싶은지가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성인이 될 때부터 늘 하나의 질문을 머릿속에 꽉 채우며 살았다,


‘그래서 나 뭐 하지?'




'그래서 나 뭐 하지' 모먼트 - 첫 번째

막상 공부하러 미국에는 갔는데 전공을 정해야 했을 때, 그림도 그리고 싶고, 옷도 만들어보고 싶고, 주얼리도 좋고, 인테리어도 좋고 등등… 디자인이라면 모두 좋았던 나는 건축을 전공하면 모든 할 수 있다는 한마디에 건축과를 선택했다.


그렇게 뉴욕 브루클린에 위치한 Pratt Institute에 입학했고, 밤샘 작업이 당연한 건축학도 생활이었지만 선택의 후회는 전혀 없었다. 졸업 땐 정말이지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결국은, “그래서 나 뭐 하지?”


'그래서 나 뭐 하지' 모먼트 - 두 번째

9년 만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갈피를 못 잡고 있던 나에게, 아빠는 MBA 대학원 진학을 제안하셨다. 종합예술의 끝인 건축을 배웠다면, 자본주의의 끝인 경영을 배우면 뭔가 균형이 맞춰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서울대학교 MBA를 입학했다.


하지만 20대 전체를 미국에서 보낸 나에게 대학원 수업에서 다루는 모든 용어들이 마치 제2 외국어 듣듯이 생소했고, 사회생활도 전무하고 경제 개념도 없던 나에게는 특히나 고된 과정이었다. 그래도 매일 앞줄에서 수업을 열심히 듣고 동기들의 도움도 받으면서 무사히 졸업도 했다. 하지만 그때쯤 또 떠오르는 질문, “그래서 나 뭐 하지?”


'그래서 나 뭐 하지' 모먼트 - 세 번째

대학원을 통해서 회사 오퍼가 들어온 곳은 브랜드 컨설팅 에이전시 회사였다. 내 이력에 맞춰 제안받은 업무는 용어도 생소한 ‘공간 브랜딩.‘ 내가 공부한 건축과 MBA를 둘 다 쓸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얻었고, 나의 첫 회사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인턴 기간 중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삶 자체에 대해 허무함을 느껴버린다. 현실적인 이유로 일에만 집중해 보지만 삶의 궁극적인 목표와 방향에 지속적으로 물음표를 던진다. 결국 컨설팅 4년 차에 첫 회사를 퇴사를 하고 또 그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나 뭐 하지?”


'그래서 나 뭐 하지' 모먼트 - 네 번째 ~ N번째

회사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이후로 지금까지 매일 단 하루도 빠짐없이 “그래서 나 뭐 하지”를 묻는다. 천 번 이상의 동일한 질문을 묻기까지 나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많은 시도와 실패와 성공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이 질문을 죽을 때까지 할 거라는 것을.


저 사실을 받아들임과는 별개로 그 질문은 꽤 오랜 기간 동안 나를 괴롭혔다.

[뉴욕 유학생], [서울대 MBA 졸업생]이라는 누가 들어도 멋들어진 내 타이틀은 나에게 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힌트를 전혀 주지 못했고 오히려 나의 꿈틀대는 도전 정신을 대차게 가로막았다.


단, 이 사회는 내가 걸어온 길을 보며 가리키는 방향은 명확했고
주변에서는 지금까지 얻은 스펙이 아깝다며 그걸 왜 효과적으로 쓰질 못하냐며 나를 나무랐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내 마음 한 구석은 계속 불편했지만 난 분명 다른 길이 있을 거라고 어렴풋이 믿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나 혼자 힘든지, 괴로움의 기원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 보니 나는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그게 창피한 줄은 알아서 처음엔 쉬이 인정하지 못했지만 결국엔 승복했다.


직업의 귀천은 과연 누가 정하는가. 타인이 정한 기준 속에서 나는 바보같이 혼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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