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손해를 볼 줄도 알아야 한다?

by 털찐 냥이

약국에서 받아온 종이봉투 뒷면을 무심히 쳐다봤다. 건강을 위한 상식적인 수칙 몇 가지기 쓰여있다. '그래 뭐 다 아는 건데 실천이 안 되는 거지.' 그런데 유독 한 문장이 자꾸 눈에 콕 밟힌다.

'때로는 손해 볼 줄도 알아야 한다.'

'어?'

우선 내 마음이 편해야 한다는 요지였다.

'흠, 그래 모든 병의 근원은 스트레스니까 그럴 수 있겠다.'

그래도 정말 그런가? 생각이 자꾸 든다.


'손해를 보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이사를 가던 날이었다. 정신이 없는 하루였다. 도시가스 기사님이 방문을 했었다. 오늘까지 사용료가 얼마인지 알려준다. 몇천 원을 내밀었다. 을 지불하고 영수증을 받았다. 그리고 돌아서서 짐을 챙겼다. 그런데 이상하다. 어? 영수증은 받았는데 잔돈을 안 받았다. 밖으로 나가서 아저씨를 찾았다. 다행히 엘리베이터 앞에서 발견했다.

"저기 잔돈을 안 주셨는데요?"

"여기요. 내가 일부러 안준건 아니에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당황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자연스럽게 잔돈을 주면서 능글맞게 말의 어감을 둥굴린다. 번잡한 이삿짐들 사이를 조용히 자연스럽게 퇴장고 매우 능숙한 몸동작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잔돈이고 정신이 없는 날이니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은 작은 손해를 봤을 것이다. 태연한 태도를 보니 그동안 이런 일이 문제가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나 보다. "짜로 이렇게 푼돈 모부자 되겠네...'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혹여 실수라도 손해는 절대로 보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중학교 때 하굣길에 친구와 놀다가 도시락가방을 벤치에 놓고 온 적이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부모님이 퇴근한 깜깜한 저녁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아뿔싸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단서를 찾기 위해 하루의 동선을 이실직고했다. 혹시나 싶어서 친구와 앉았던 윗동네 교회 벤치에 가봤다. 가방은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었고 숟가락이 없어졌다. 나는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서럽게도 혼이 났다. 없어진 숟가락이 금으로 만든 건데 그걸 잃어버렸다고 부주의 한 성격에 대한 비난을 15분 넘게 들었던 것 같다.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아마도 내가 집에 있던 금쪼가리를 고물상에게 팔아서 과자로 바꿔먹은 줄 알았을 것이다. 어른이 되고 생각해 보니 사실 그 숟가락은 도금을 했던 것 같다. 행사 기념품이었는데 설마 금을 녹여서 만들었을까. 여하튼 다음 날부터 새로 들고 다닌 숟가락은 은색이었다.

안국동에 외근을 나갔을 때였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 아저씨가 큰 도로변 한쪽에 차를 댔다. "여기 앞에 신호등에서 길을 건너서 저기 보이는 골목에 들어가면 목적지 근처일 거예요." 유턴을 해서 반대쪽으로 가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아저씨는 내려서 걸어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고 했다. 타고 온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서 기본요금밖에 나오지 않았다. 돈을 건넸다. 그런데 아저씨는 나에게 일부를 돌려주었다. 아저씨의 태도에서 본인이 목적지까지 태워주지 못한 미안함이 느껴졌다. 자발적인 손해였다.


살면서 작은 손해들은 어쩔 수 없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작은 손해들에 속상함이 너무 커지면 결국 사람에 대한 실망, 분노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 마음 한켠에 작은 서랍을 만들어두고 어떤 일에 '그럴 수 있지~' 하면서 넣어두면 마침표를 찍고 넘어갈 수 있다. 만약 그런 공간이 없다면 나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에 대한 분노로 이 번 수 있다. 혹여나 그런 게 반복되면 마음에 병이 날 것다.


아파트 단지 작은 교차로에서 야채와 과일을 조금씩 길가에 놓고 파는 아저씨가 있다. 거의 사계절을 내내 나와서 장사를 하신다. 그늘막이 없으니 여름에는 뜨겁다. 겨울에는 찬바람을 고스란히 맞는다. 그래도 사람들이 자주 오고 가는 길목이어야 물건이 팔리니 항상 그 자리에 계신다. 한 번은 그 길을 지나가다 부추가 눈에 들어왔다. 아저씨는 마감 떨이를 한다며 얼마에 가져가라고 나를 불러 세웠다. '그럼 오늘은 부추전을 해야겠다.' 부추가 싱싱하고 억세 보이지 않았다. 양도 한 끼 분량 딱 좋았다. 나는 잔돈을 거슬러 받지 않고 제 값을 드렸다. 잔돈을 꺼내려던 아저씨의 표정이 밝았다. 이 정도 가격이면 마트보다 저렴했고 나도 아저씨도 웃을 수 있으니 손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약봉지 뒤에 쓰여있는 '때로는 손해를 볼 줄 알아야 건강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이 전부 이해가 된 것은 아니다. '언젠 가는 손해를 본 것이 되돌아온다'라고 쓰여있었지만 사실 세상살이가 그렇게 정의롭거나 이유 없이 내편이 되어 주지는 않는다.


그래도 일단 '살면서 손해를 볼 수도 있다'고 염두해 둔다면 만병의 근원인 마음의 병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고 뜻밖에 다른 곳에서 손해 수 있는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인생을 길게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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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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