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이 행복한 거예요?

by 털찐 냥이

벌써 8월이다. 한여름이다. 이례적인 폭염에 깊이 잠이 드는 날도 드물다. 낮에는 눈을 뜨고 있지만 자꾸 멍해진다. 더위가 내 정신을 아이스크림럼 녹이고 있다. 집안 한쪽 구석에 겨놓았던 겨울 니트들을 꺼냈다. 뒤늦게 손빨래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울세제에 담갔다 꺼냈다 반복했다. 겨울 옷의 대부분이 니트라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세탁하는 게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다. 봄 옷을 꺼내면서 겨울옷을 손 빨래하다가 지쳐서 한쪽에 남겨놓고 이제야 마무리를 했다. '세상에 이렇게 두꺼운 옷을 입어도 춥단 말이지?'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서 보온에 신경을 많이 쓰는데, 한 여름에 겨울옷을 펼쳐보니 어이가 없다.


지금은 팔뚝 몇 센티라도 천으로 덮으면 체온이 올라가고 땀이 찬다. 요즘은 어떻게 하면 덜 더울까 싶어서 민소매 얇은 옷을 찾는다. 그런데 이렇게나 두툼한 털실로 짜인 옷들을 둘둘 싸매고도 춥다고 느끼는 계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니. 세 달 뒤면 겨울이 온다니 거짓말 같다. 조금은 선선해질 것 같은 9월, 활동하기 좋고 긴 추석연휴가 기다리고 있는 10월 , 단풍이 들고 늦가을 햇살이 따사로울 11월. 발끝이 동창으로 얼마큼 무서운 추위의 12월. 앞으로 롤러코스터 같은 다른 계절이 기다리고 있다.

뜬금없이 궁금했다. 왜 '나이가 든다'라고 표현할까? 나이를 먹는다. 나이를 스친다. 나이에 물든다 등 다른 표현들을 적용하면 왜 어색할까? '든다'는 의미가 궁금했다. Gemini에게 물어보니 나이가 든다는 표현은 '시간의 흐름' 또는 '어떤 상태에 속하게 된다'는 의미라고 한다. 즉, 시간이 흐르면서 나이가 찾아온다. 또는 나이가 많은 상태에 진입한다라고 대답한다. 의미를 들여다보니 수동적이기도 하고 능동적이기도 하다.


"결핍된 것이 행복한 거예요."

"네?"

"나이가 들어서 먼 훗날 모든 것을 갖출 것 같죠? 그런데 행복은 도달하는 게 아니에요. 리고 나중에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죠? 그런데 막상 그때가 되면 다 사라져 버려요."

"왜요?"

"열정이 없어져버려요. 그래서 막상 예전에 그렇게 하고 싶던 것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어요."

시간이 지나서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이 지금보다 나아질 것 같지만, 그래서 '이제 해야지' 생각하지만 막상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행복은 결핍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것이라고도 하셨다. 족한 부분을 채워야겠다는 생각과 열정이 없어져버린다면 그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감도 없을 것 같다.


이 대화는 교직에서 38년 동안 학교선생님으로 일하시고 은퇴하신 분과의 대화였다. 나는 그분의 안정된 삶을 부러워했는데 오히려 그분은 본인보다 젊은 내 나이를 좋은 때라며 본인에게 없는 것을 갖고 있다고 하셨다. 대화 내용을 기억하고 싶어서 적어놓고 가끔씩 다시 따뜻한 카페라테와 티라미수 케이크를 가운데 놓고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던 날의 분위기를 떠올다.

"소 꾸준히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들여다보지 않았던 것 은퇴 후에 갑자기 하게 되지는 않아요." 마치 내가 봄에 미뤄둔 빨래를 여름에 하듯이 생의 계절이 지나고 나중에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조언이었다. '미룰 수가 없구나...'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해당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동네 문화센터에서 Art messenger 이소영 씨의 특강이 있었다. 잘 짜여진 주제별로 처음 보는 작가들이 소개되었는데 인상 깊었던 사람은 미국 흑인 노예로 평생을 살았던 노숙자였다. 인생의 후반부를 노숙자 살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였다. 그의 이름은 빌 트레일러(Bill Traylor, c.) 1853년에 노예로 태어났다. 태어나 보니 노예라니, 주어진 삶이 너무 고달팠을 것 같다. 평생 그림을 배운 적이 없다고 한다. 노예 생활이 끝난 후 소작농으로 살다가 노숙자가 되고 85세 즈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 재료가 없어서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활용해서 그림을 그렸고 한다. 그런데도 그림을 2000점이나 남겼다. 살아있을 때 전시회를 한 적이 있는데 관객이 3명뿐이었다고 한다. 그중 한 명이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인턴이었는데 신기하게도 간이 흐른 뒤에 그는 미술관 관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빌 트레빌러를 다시 찾았는데 이미 돌아가시고 그의 작품들은 거리의 이웃이었던 구둣방에서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사후에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는데 검색을 해보니 옥션에서 507,000 달러에 거래된 작품도 있었다. 그는 평생의 고단하고 부조리한 삶을 노년이 되어서 그림으로 표현했다. 락하지 못했을 평생의 삶의 결핍을 마지막에 예술로 채운 것 같다.


나는 아직 인생이라는 과제에 제대로 된 답안지를 적어내지 못한 것 같다는 부재감을 느끼며 다. 언제쯤이나 빈칸을 채울 수 있을지 불안할 때도 있다. 런데 어쩌다 보니 벌써 8월이다. 한 해의 반이 넘어갔다. 몇 장 남지 않은 탁상 달력 장수를 세어보니 새로운 나이가 달력너머에서 급하게 달려오는 것 같다. 아 , 도망가고 싶다. '몸이 왜 이렇게 무거운 거야' 더위가 머리 위에서 엄청난 무게로 나를 꾹 누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몸의 움직임이 느려진다. 숨이 턱턱 막히는데 곧 가을이 온다니. 헛되이 또 한 해가 가버리기 전에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마음만 조급해진다. 다음 계절이 도착하기 전에 치고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챙겨봐야겠다.





keyword
이전 07화제 머리 좀 묶어주실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