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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Apr 05. 2018

모리스 드니 <마리아와 마르다> 1896 캔버스에 유채


이즈음 봄빛을 바라보노라면 자연의 섭리가 사무치게 다가옵니다. 

겨우 내 언 채 닫혀 있던 완강한 대문 앞에서 ‘이리 오너라’ 어느 높은 분이 서슬 푸르게 외쳤을까요.

 단단하고 거대해서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던 커다란 자물쇠가 내려지고 창대한 문이 스르르 열렸습니다. 

진달래는 살짝 솟구치고 개나리는 소리라도 내듯 자지러지고 매화는 우아하게 피어났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 앞에도 봄처럼 죽음의 문이 스르르 열리리, 윤슬이 눈부신 한강을 지나가며 든 생각입니다. 

벌써 수수꽃다리가 피어나 있는 국립박물관에서는 겨울궁전에서 온 프랑스미술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시 미술관내의 프랑스 미술들이 우리나라로 나들이를 왔습니다. 

재정 러시아 시절 예카테리나 대제2세는 수많은 작품들을 수집했고 

귀족들과 학자 기업가들도 유럽의 작품들을 대거 구입 러시아 공공건물과 상류층 저택을 장식했습니다. 

이런 개인 소장품들은 20세기 초에 전부 국유화 되었고 

이로서 에르미타시 박물관은 가히 세계적인 명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니콜라 푸생과 클로드 로랭 로코코회화의 거장 프랑스아 부셰를 비롯 

궁정화가들의 작품과 19세기 프랑스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귀스타브 쿠르베, 

폴 세잔의 마른 강 기슭, 시슬레, 모네의 건초더미를 실제로 바라보는 느낌은 

즐거움을 넘어 차오르는 기쁨을 느끼게 하더군요. 

그리고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 모리스 드니의 <마리아와 마르다>를 대할 때는 

정말 팔을 번쩍 올리며 환호작약....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주인공인 세 사람은 작품의 전면을 조금 벗어나 있습니다. 

이른 봄 소나무 아래서 진달래 가만히 피어나듯 그렇게 있습니다. 

평온하고 고요한 모습입니다.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습니다.

시선의 무위함이 엿보입니다. 

오히려 바라보고 있지 않기에 더 깊이 응시하고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유리잔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보입니다. 

가볍게 펼쳐진 손은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은 채 자신을 내어주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마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요.

그러면서도 교차된 손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난 뒤의 다짐 같은 것이 읽어지기도 합니다. 

실제 성서에서는 마음이 분주한 마르다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림 속 마르다는 전혀 분주하지 않는, 평온하고 고요한 모습입니다. 

‘마르다야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뒤였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녀가 든 접시에는 원죄를 나타내주는 사과와 그리스도의 대속을 나타내주는 포도가 있습니다. 

그녀의 검은색 옷은 상복을 의미하며 화가의 아들 장폴을 애도하는 의미와 

부활의 약속을 믿으며 죽음을 겸허히 수용하는 태도가 엿보인다는 미술사학자도 있습니다.  

모리스 드니는 예언자들이란 뜻의 나비(Nabis)파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신앙심이 아주 깊은 사람이라 성서를 잘 알고 있었고 

이는 그가 평생 성경을 통한 작업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드니의 작품은 부드러운 윤곽의 실루엣과 고요한 리듬이 흐릅니다. 

간소화되고 생략된 화면에서 신앙의 순수함이 읽어지기도 합니다. 

그가 그린 나무들은 점점 형상을 잃어가며 본질만 남게 되는  몬드리안의 나무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회화란 군마나 여인의 누드 혹은 어떤 일화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특정한 하나의 질서에 걸맞게 배열된 색채들로 뒤덮인 평면이다”고 그는 적고 있습니다. 

소박하면서도 자연스러움이라는 아우라를 거느린  ‘마리아와 마르다’에서도  모리스 드니의 철학이 엿보입니다. 

삶은 태어남으로 시작해서 수많은 것들로 이루어져 가는 것 같지만 

결국 죽음 앞에 서는 지극히 단순한 형태 아니던가요. 

몸서리칠 정도의 놀라운 공평함 말입니다. 

그래서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결을 지닌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이름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입니다. 

작품의 전면 주인공들 보다 후면의 배경이 선명합니다. 

모리스 드니의 화실이 있던 생제르맹앙레의 몽루주 별장입니다. 

미술사학자들은 작품의 주제가 지닌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고 했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을 향해 질주하는 우리를 멈추게 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서성이게 합니다. 

고린도전서 13:12절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교계신문 연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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