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이 나의 서재가 된 지는 오래다.
그 안의 무수한 책에 대한 욕심이 사라진지도 제법 된다.
젊을 때는 서점을 가건, 도서관을 가건, 내가 좋아하는 방향의 서가 앞에 서면
마치 읽을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언제 이 책을 다 읽을까, 읽어낼 때 까지 읽고 싶었다.
그게 무슨 어린애 같은 생각인가,
설령 내게 지니가 나타나 “주인님 원하는 것을 말씀 하십시오” 해도
지니는 물건이나 상황에 대한 것을 들어줄 뿐이지 머릿속 뇌에 대한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니 소유는 더 말해 무엇하리,
책을 좋아해서 모으는 것이 취미인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총 네 번 정도 책을 버렸다.
버리고 나면 삼삼하게 떠오르고 누군가의 글에서 버린 책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처럼 그립기도 했다.
요즈음 내가 사랑하는 잠언은
죽고 사는 일 아니면 별것 아니다.
(사실은 죽고 사는 일도 별일이 아닐 수 있다고 내겐 자주 속삭인다)
오늘 아침 도서관에서 전화가 왔다.
젊고 딱딱한 목소리였다.
내가 맨처음 신청해서 읽은 책 <나는 메트로폴리탄의 경비원입니다>에 커피 얼룩이 있다는 것,
커피 얼룩은 아닐 것이다.
반신욕을 하면서 읽었으니 물자국,
어쩌면 되죠? 새책을 사오셔야 합니다. 네 그럴께요.
너무 대답이 쉬웠는지 수화기 저편의 젊은이가 오히려 당황한 듯,
변명 같지만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너무 새것이면 마음이 좀 그렇다.
그러게 너를 그렇게 사람들이 모르는 척 했구나. 너두 외로웠겠다.
그러나 경비원, 책은 사실 내가 신청해서 내가 맨 처음 읽은 책이다.
경비원을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그렇게 고급한 경비원 처음 본다.
메트로 폴리탄을 나도 가봤는데 말이지
그 경비원처럼 깊게 보기는커녕 기억두 나지 않더라.
그러니 새책을 사오라면 사가야지. 덕분에 책 한 권 또 늘게 생겼네.
그보다는 피아노로 돌아가다.
음악책 문장이 눈부셨는데 그 책을 반신욕할 때 읽을 껄, ㅠ
올해, 아니다. 이젠 작년이군. 눈(目)이 약해지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검은 나비가 갑자기 날아다녀서 오호, 이게 바야흐로 그 비문증이구나.
너무나 확실하게 보이는데 세상에 없는 존재를 바라보는 이 황당함이라니.
다행히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고 몇 번 그러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러하니 나에게도 다시 찾아 들겠지,
뿐만 아니라 잠자리에서 막 일어나 습관적으로 책을 펼쳐 들면
한참 눈이 제자리를 잡지 못한다.
다촛점 렌즈를 처음 쓸 때처럼 시간이 좀 흐른 뒤에야 글씨가 고정된다.
균형 잡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잠에서 깨어 화장실을 갈 때도
아 조심해야지, 생각이 먼저인지,
아니면 몸이 지가 알아서 조심을 하는건지 느리다.
그러니
<노년이란, 원하지 않는 존재들이 무시로 방문하는 열린 몸으로 확장> 되는 것이다.
문장상으로는 무척 좋아 보이지 않는가.
모든 사람이 지향하는 열린 사고처럼 열린 몸이라니,
(열림은 헐거움을 품고 있어서 도둑이 들기 쉽다는 것,
열린 사고 역시 팔랑귀가 필수 요인이다)
노년에 대한 논문을 한편 아주 열심히 읽었다.
노인과 노년의 차이,
노인이 얼마나 낮은 급의 칭호라는 이야기를
회장님 노인, 국회의원 노인이라는 호칭은 안쓰면서
독거노인 폐지 줍는 노인, 사회에서 어렵고 낮은 계급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갖다 붙이는 문화.
이런 칭호가 결국 지배 문화의 해석이라는 것,
지배문화가 젊음을 우선적으로 우수하게 견고한 자리에 덕목으로 놓으니
늙음은 상대적으로 취약해진다는 것,
결국 그 학자의 말은
현대에서 노년은 젊음과 상대적이고 관계성이고 일종의 정체성이라는 것,
그것을 인정하고 그들과의 게임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젊은 타자들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 확립과 함께
노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서사를 노년들 스스로가 마련해야 한다는 것,
그 일환의 하나가
서구의 철학이 본질에 머물렀듯이
노년도 본질을 생각하고 그 형이상학, 실체론, 존재론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단순히 머릿속 담론이 아니라 행동까지 나아가는,
가령 가난하게 살던 할머니가 전재산을 기부하는 것은
행동으로 나가는, 행동으로 쓴 자서전이라는 것,
삶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인식하고 승인하라는 것,
내 막내 이모는 조금 특별하시다.
나이와는 상관없이 사고가 총명하시다.
하긴 울 외갓집 식구들이 좀 그렇다.
더군다나 막내이모에게는 아주 놀라운 신심이 있어
세상을 보는 눈이 남다르시다.
언젠가, 내게 하신 말씀.
아야, 늙은 게 꼭 나쁘지만은 않어야.
우선 아이들이 다 커서 키워야 할 아이들이 없으니 얼마나 자유롭냐,
(이모는 홀로 네 아이들을 키우셨다. 이모부가 노름을 해서 가난하게 됐고 아파서 일찍 떠나셧다
그러니 아이들 키우는 일에서 놓여나셧으니....)
책임에서 놓여난 것이여. 자유제,
그라고 늙응께 아무도 나를 안쳐다봐야.
그랑께 어디 살짝 귀퉁이에서 기도를 해도 되고 찬송을 해도 된다.
젊을 때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제,
우리 막내이모는 노년을 인정하고 승인하며 그 자유로움 까지 찾으신거다.
노년이라는 정체성으로부터 자유하신 것이다.
노년의 자리는 청년의 자리와 상대적이지 않다.
몽테뉴도 수상록을 나이들어가며 업그레이드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달라진 생각을 고칠 때 망서렸다고,
청년들도 금방 뒤따라 노년의 자리에 들어선다.
그러나 청년은 가지 않는 길이라 알 수 없다.
노년은 왔던 길이라 알 수 있다.
그러니 굳이 그들의 모름을 탓할 일도 아니다.
우리도 얼마나 사소한 것조차 경험해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념에 가두고 타자의 삶이라고 여겨버렸던가.
노년은
그 어느때보다 자유롭다.
비교에서 경쟁에서 가능성에서 희망에서
그래서 젊음보다 무한 자유로울 수 있다.
젊음이 미래의 삶이라면
노년은 현재의 삶이다.
하루하루를,
작은 나무를,
오 사소한 모든 것들을,
유심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간과 시각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오늘 하루 행복할 수 있다.
행복이 즐거움 기쁨 환호성이라고?
아니 행복은 그런 것들뿐 아니라 고요함 적막함 스산함 서늘함, 슬픔속에도 있다.
우리는 슬픈 노래를 들을 때 자꾸 들으며 자꾸 슬퍼하며 자꾸 좋아하지 않던가.
행복은 절대 상황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그날 내게 허락된 마실 수 있는 샘물이다.
이게 나의 현재 노년에 대한 헌사겸 서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