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사랑으로 만들 사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소설을 하나 쓰려고 한다. 몇 년 전 학교 공모전으로 단편 소설을 쓴 적이 있었는데, 수상은 했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이번에는 '나'가 주인공이다. 말 그대로 '나'이다. 나의 상처를 드러내고 극복하려고 쓰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자전적 소설이 될 것 같다. 심지어 남자친구에게 막 차인 모습은 그야말로 나와 판박이이다.
그렇기에 잠시 에세이도 중단하려고 한다. 여기서는 주로 나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고 '내가 이렇게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라고 드러내기만 했다. 실제로 실천하는 것은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 소설을 통해 좀 더 깊게 내 상처에 다가가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나의 행동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잔뜩 변명만 늘어놓는 나의 글을 조금은 쉬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떤 영화를 보고 다시 노트북을 열어버릴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러므로 이 글은 당신에게 올리는 마지막 글이다.
n번의 연애를 하면서 나 스스로 '바뀌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단 두 번이었다. 그것도 가장 최근의 연애에만 해당된다. 즉,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남자친구라는 존재에게 떠받아 들여지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상대를 좋아하는 마음이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보다 적다는 것이 아주 큰 권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첫 번째 계기는 2년을 함께했던 사람 때문이었다. 가장 행복했고 동시에 가장 불행했다. 예전 글에도 썼듯 그는 나에게 우울증을 가져다주었고 동시에 우울증을 극복할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덜 사랑한다는 이유로 권력을 휘둘렀던 나에게 그는 큰 깨달음을 주었다. 연애는 '둘'이 하는 것이라고 그로부터 배웠다. 남자가 당연히 나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나는 주로 남자에게 혼을 내는 입장이고 남자는 들어주는 입장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그 친구가 "나는 네가 원하는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아"라는 말을 하면서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사람을 움직일 수는 없는 거구나.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어쩜 나는 이리도 극단적인지, 그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나의 스타일, 옷, 취향, 먹는 것 까지도 그를 위해 바꾸었다. 내 옷장의 한 켠에는 예쁘지만 안 입는, 잔뜩 쌓아둔 옷이 있는데 그를 만날 때 샀던 옷이다. 지금은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내가 그런 옷을 입는 것을 그가 너무 좋아했기에 얼마나 많이 샀는지 모른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연애를 통해 '내 마음대로 관계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것'과 '나 자신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을 깨달았다. 참 우습게도 마지막 1년은 오로지 후자에만 치우쳐져 있어서 전자의 깨달음은 잊은 지 오래였다. 오로지 나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번 연애를 시작했다.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연애는 다음과 같았다. 소개팅 날 상대 즉, 남자가 원하는 옷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옷을 입기. 덕후를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상관하지 않고 당당히 덕후라고 밝히기. 내가 스스로에게 느끼는 자신감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기.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사람이 떠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기였다. 나 자신을 지키는 것에 그리도 집착을 했다.
2년 간의 연애가 나를 너무나도 망쳐놓았기 때문에 나의 마음을 당신에게 주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고, 나는 빠른 시간 동안 당신에게 빠져버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간 동안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 무단히 애를 썼다. 나와 평생을 바라보는 당신에게 나는 '비혼'이라고 밝히고, 당신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애써 못 들은 척했고, 당신이 그리도 원하던 칭찬에 인색했다. 나의 마음을 감추는 일이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고, 내가 덜 상처를 받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헤어지고 나서 더 아팠다. 내가 가진 마음에 비해 방어적인 태도만 취했기 때문인지, 그저 당신이 마냥 좋던 나의 마음을 표현하면 되는데 그걸 에둘러 부정했다.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몰아서, 지금까지 못해준 칭찬들을 짧은 글을 통해서라도 쏟아부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주인공 멜빈의 모습은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모든 이를 뿌리친다. 독설도 서슴지 않는다. 집에 오면 꼭 다섯 번씩 문을 잠그는 괴상한 편집증도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해 캐롤은 좀 더 너그럽고 포용할 줄 안다. 둘의 모습이 마치 나와 당신을 보는 것 같았다. 물론 내가 멜빈정도의 인간쓰레기는 아니지만, 적당한 히스테리와 신경질적인 모습을 합친다면 내가 탄생할 것이다. 이런 멜빈도 캐롤과 함께 하면서 조금씩 변화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캐롤이 멜빈에게 변화하라고 강요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캐롤과 함께 하기 위해 멜빈 스스로가 변화했다.
가장 재미있었던 장면은 멜빈이 사과를 하는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 멜빈은 두 사람에게 사과한다. 한 명은 자신이 사랑하게 된 여인인 캐롤이고 다른 한 명은 줄곧 무시했던 이웃인 사이먼이다. 멜빈은 결코 직접적으로 "미안하다"라고 하지 않는다. 그저 행동으로 표현할 뿐이다. 캐롤의 아픈 아들을 위해 자신의 인맥을 써서 직접 집으로 의사를 보내준다거나, 사고를 당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이먼을 위해 스프를 끓여다 준다. 직접 말을 통해 사과하지는 않지만 그는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줄 안다.
나는 줄곧 나와 당신의 관계에 있어서 내가 더 어리고 덜 성숙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무 이기적이고 아직 잘 몰라서 당신을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면, 내가 좀 덜 이기적으로 굴었다면 당신을 덜 힘들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마치 멜빈처럼 직접 당신에게 "미안하다"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조금은 둘러서 표현을 했었다.
하나는 당신에게 쓴 편지였다. 나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쓴 편지였다. 너무나도 소극적인 나에게, 너무나도 마음을 늦게 여는 나에게 당신은 언제가 섭섭함을 토로했었다. 그래서 작은 편지를 써서 주었다.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지 못해 미안하다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말하겠다고 말이다. 사실 당신이 이 편지를 잘 읽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듣지 못했다. 그 생각을 듣는 것이 너무 낯간지러워서 피했는데, 글쎄 당신은 그 편지를 쓸 때의 나의 마음을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다녀왔던 여행이었다. 내가 해외로 여행을 가는 동안 우리는 딱 한 번 크게 싸웠는데, 나의 오해와 무지로 비롯된 일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화해를 했을지라도 사과를 하고 싶었다. 내가 이만큼 당신이랑 함께 있고 싶다고 그때 그 일은 미안하다고 직접 말로 표현하진 못했지만 당신 몰래 예약했던 그 여행이, 당신에게 서프라이즈로 준비했던 그 여행이, 나에겐 사과의 표현이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자꾸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멜빈을 캐롤은 자꾸 밀어낸다.
당신과 함께 지낸 게 사실은 즐거웠어요. 하지만 당신은 절 힘들게 만들어요. 아무래도 안 만나는 게 좋겠어요. 당신은 아직도 준비가 안 됐어요. 준비할 나이가 지났는데도 말이에요. 그걸 무시할 만큼 저는 젊지 못해요.
이 말을 듣고 멜빈이 아무 말하지 못한 것처럼 나 역시 아무 말하지 못했다. 마치 당신이 나에게 하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멜빈은 그저 한 마디 할 뿐이었다. "당신과 함께 춤을 췄어야 했어요" 아니다, 사실 나는 당신과 함께 춤을 출 필요가 없었다. 그저 솔직하게 사과하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어야 했다. 이렇게 내가 이기적으로 굴어도 괜찮겠다며 자만하지 않고 당신에게 먼저 다가가야 했다. 내가 당신에게 배려를 원하는 만큼 나 역시 당신에게 배려를 해주어야 했다.
캐롤은 사과하는 멜빈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그만! 왜 나는 보통의 남자친구를 가질 수 없는 거죠? 절 힘들게 하지 않는 그냥 평범한 남자 말이에요" 그러자 옆에서 자고 있던 엄마가 나와 말한다. "누구나 원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어"
그래, 이것은 내가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감정 소모가 싫다는 당신에게, 싸우는 것이 싫다는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애초에 우린 차이를 알고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다툼이 있을 거라고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두 달 동안 우리는 딱 두 번 싸웠고 그 두 번째 싸움에서 이별했다. 만약 내가 당신에게 좀만 덜 이기적으로 굴었다면, 그리고 만약 당신이 '바뀌겠다'라고 말하는 나의 마음을 조금만 믿어줬더라면 오늘 비가 오는 궂은 이 날씨에도 나는 당신을 만나러 한 시간을 걸려 서울에 갔을 것이다. 조금은 피곤하지만,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당신을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요
이 말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듣던, 혹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하던 두 사람에게 모두 행복이 되는 말이다.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연애는 내가 꿈꾸었던 연애였다. 나에게 피해의식만 보이던 지난 사람들과는 달리, 당신 특유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존경할 수 있고 내가 본받을 수 있어서,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연애를 하고 싶었다.
당신과 만나기 불과 며칠 전에 학교에서 행사가 있었다.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찾아와서 책 이름의 앞 글자를 말하면 선생님이 이어서 뒷 글자를 말하는 게임이었다. 예를 들어, 학생이 "안네의!"라고 외치면 우리는 "일기!"라고 외치면 되는 것이다. 한 학생에 나에게 와 외쳤다. "키다리!" "아저씨!"
키다리 아저씨,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난 그 날부터 지금까지 당신을 보면 떠오르는 이미지이다. <키다리 아저씨>를 읽은 지는 거의 20년도 되었지만, 적어도 그 사람이 당신과 비슷한 사람이라고 느껴진다. 아직 어리고 부족한 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당신이 되어줄 거라 생각했다.
우리 이별의 공통원인이 서로에게 있다면 아마 이것일 것이다. '소통' 웹툰 <유미의 세포들>에서 웅이와 유미가 헤어진 것이 새이의 이간질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소통이었듯, 우리는 좀 더 이야기 했었어야 했다. 사랑에 취해 서로 웃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나를 힘들게 하는 것, 나를 위해 바꾸어주었으면 하는 것을 솔직하게 털어놨어야 했다. 우리의 관계가 좀 더 지속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 말한 그 '결혼'에 좀 더 다가가기 위해서는 소통이 필요했다.
내가 앞으로 쓸 소설의 주인공은 해피엔딩을 맞을 것이다. 차였던 남자친구에게 돌아갈지, 혹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건 주인공이 어떤 남자를 만날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연애를 통해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느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이 소설의 주요 내용이다. 그 결말이 어떻듯 내 소설의 주인공은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고 좀 더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나도 주인공을 따라 함께 더 나아지고 행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