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경제학으로 이어진 우리의 탐구는 과학으로 옮겨갔다. 정재승의 <열두 발자국>, 유시민의 <문과남자의 과학공부>, 송민령의 <송민령의 뇌과학>, 차란 란가나스의 <기억한다는 착각>, 호프 자런의 <랩걸>,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김상욱의 <김상욱의 양자공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등 과학책을 가장 많이 읽었다.
일찌감치 수학을 포기했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별자리를 이해하지도 외우지도 못해서 수능 과학 문제 한 두 개는 그냥 포기했던 나에게 과학은 철학보다 더 어려운 학문이었다. 하지만 어려웠을 뿐 싫지 않았다. 오히려 경이로웠다. 다음 생에는 이과적 두뇌를 갖고 태어나 과학 책에 나오는 수학공식과 복잡한 과학 이론을 모두 이해하고 싶었다.
행동경제학, 심리학, 과학책의 공통점은 구체적인 사례와 연구결과를 풍부하게 소개한다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사례와 연구만을 골라서 책에 담았을 수 있지만 거짓은 아니다.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설계한 실험, 연구의 과정, 그리고 그 결과와 해석, 연구의 미흡한 점, 후속 연구에 주는 시사점을 모두 소개한다. 전문적인 내용이 많이 나오는 탓에 낮은 수준의 이해에 그쳤지만, 모든 책 중에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다름 아닌 과학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정치로 흐려진 세상에서 명확한 해법을 찾는 설득력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도 과학이었다.
* 모두 뇌가 하는 일?
인간을 이해할 수 있던 첫 번째 단추는 '뇌과학'이었다. 우리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형편없게도, 뇌에 대해 모르며 뇌를 장악할 수 없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의 대부분은 인간의 생존에 유리하도록 뇌가 내리는 명령이었다. 철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조차 과학에서는 뇌의 정보처리과정으로 설명한다. 특히 기억과 관련된 뇌의 작용이 인상 깊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은 객관적이지 않다. 다른 기억의 간섭을 받기도 하고 뇌의 선택을 받아야 하며, 다양한 외부 작용에 의해 재구축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위험을 감지해 생존에 유리하도록 돕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학습 욕구를 자극시킨다. 어떤 기억은 맥락이 있어야 기억 갱신에 유리하지만, 어떤 기억은 맥락이 없어야 접근이 더 쉬워진다.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과거 기억의 재구축을 지배하는 것은 그 순간에 우리가 채택하는 신념과 시각이다. 따라서 나의 기억을 떠올릴 때든 상대가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도울 때든 긍정적이고 유쾌한 기억으로 재구축할 수 있게 돕는 것은 긍정적인 시선과 마음이다.
기억은 과거에서 현재로 일방적으로 흐르고 생겨나지도 않는다. 기억을 통해 과거를 바꿀 수도 있다. 기억이라는 건 역사처럼, 과거와 현재의 대화였다.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재구축되는 것. 그렇게 해서 나를 성장시키고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행동할 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는 자전적인 기억의 영향을 받는데, 자전적인 기억이 흐려지고 자신을 성찰하는 태도는 이전과 같은 행동을 반복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울이란, 해도 안 되는 상황에서 자세를 낮춰 기다리고, 자신을 깎아내면서 변화를 감내하는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 송민령의 뇌과학 >, p133
뇌가 기억을 다루는 메커니즘의 특성과 한계, 가능성을 이해하고 이용한다면 우리의 삶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시민은 <문과남자의 과학공부>에서 "뇌과학을 조금 알고 나니, 나를 포함해 어떤 인간도 무한 신뢰하거나 무한 불신하지 않게 되었다."라고 했다. 나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상대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자유의지 때문일 수도 있고 뇌의 작용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럴만한 상황과 이유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나면 대화가 조금은 쉬워지지 않을까.
당신이 남의 생각과 감정을 안다고 확신한다면, 그건 착각일 확률이 높다. 또한 한때 그런 확신을 가졌더라도 아니라는 증거가 쌓이면 그 확신을 고쳐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의 과학적인 태도고, 세상은 그렇게 진보해 왔다.
< 송민령의 뇌과학 >, p202
* 모두 유전자가 하는 일?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읽는 순간 경탄하고 잊어버리고, 관련 영상을 찾아보면서 감탄하고 또 멍해졌던 책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책을 읽기 전에 내가 갖고 있던 잘못된 상식이 깨졌다는 것이다.
책을 읽기 전에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집단의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유전자들의 명령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가끔 우리가 목격하는 이타적 행위조차도 그것이 인간 전체의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이기적 목적을 품고 있다는 표면적인 해석을 해왔다. 책은 생명의 진화를 '집단'이나 ‘개체’가 아닌 ‘유전자’의 관점에서 설명했다. 그렇다고 유전자가 어떤 의식을 갖고 의도적으로 개체의 행동을 조종한다는 것은 아니다. 개체는 기껏 100년을 살 뿐이지만, 유전자는 개체를 옮겨가며 불멸의 존재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유전자의 생존방식이었다. 유전자는 ‘경쟁’을 통해 우위를 점하고, ‘협력’을 통해 생존 확률을 높인다. 자연 상태에서 한정된 자원을 놓고 벌이는 경쟁은 불가피하다. 유전자도 마찬가지다. 유전자는 개체 내에서 다른 대립 유전자와 경쟁해야 하고 다른 개체와의 경쟁에도 관여해야 한다. 하지만 때로는 생존을 위해 전략적 협력도 한다. 한 개체 내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유리한 환경이 되어주기 위해 유전자끼리 협력을 한다. 자신이 희생하더라도 유전자가 많이 공유된 개체인 형제나 자식을 돕는 것으로 협력에 관여한다. 심지어 혈연관계가 없는 다른 개체를 돕는 "호혜적 이타성"도 갖고 있는데, 미래에 도움을 받을 가능성을 높여 생존 확률을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결국, 협력도 경쟁에서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협력이 단순한 선의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경쟁 속에서 생존과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불멸을 위해 경쟁이 숙명인 유전자조차 전략적으로 협력을 선택한다. 먹이를 나누거나 경고음을 통해 위험을 알리는 행동은 집단 전체의 생존율을 높여 자신의 유전자도 보존할 수 있게 하는 전략이다. 하물며 유전도 협력하는데, 다른 생물과 달리 뇌가 비약적으로 발달하고 이성적 사고가 가능한 인간도 협력을 최고의 무기로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저들이 죽어야 우리가 살아남을 것 같은 생각이 들겠지만, 전략적으로 협력하는 것이 서로의 안정적인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싶다.
* 양자역학이 알려준 것
가장 어려웠던 분야는 '양자역학'이었다. 과학자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내가 설명할 능력은 없다.
"거시 세계는 뉴턴의 고전 물리학으로 설명이 됐다. 그런데 미시 세계로 들어가니 이 물리학 법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법칙을 찾으려면 관찰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원자, 전자를 관찰을 하는 것 자체가 대상을 변화시켜 버린다. 존재하고 움직인다는 사실은 확실하지만, 존재를 확인하려 하면 이동하고, 운동을 관측하려고 하면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으니 그 값을 확인할 수 없다. 있지만 관측할 수 없는 상태. 확률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양자역학이다. 하지만 그게 반도체를 만들고 오늘날 과학기술의 모든 것을 만들었다."
이 정도로만 뭉뚱그려 이해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라고 하면 턱 막히지만, 책을 읽을 때는 분명 감탄했다.
양자역학에서 얻을 수 있던 통찰은, 경험과 직관의 빈약한 근거에 기대 세상을 설명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빛은 이중 슬릿 실험에서 파동으로 행동하고 흑체 복사나 광전 효과에서 입자로 행동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유일한 근거는 우리의 경험뿐이다. 과학의 역사가 우리에게 일관되게 들려주는 하나의 메시지가 있으니, 바로 경험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 김상욱의 양자역학 > p65
양자역학뿐이 아니었다. 과학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과학 이론,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마음의 자세, 사유의 방식, 삶의 태도였다.
과학은 '과학적 방법론에 따라 차근차근 검증해 가는 집단적인 과정'을 거쳐 확인된 만큼만 말하는 것,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 엄밀하게 지키지 않은 채 효과를 주장하는 것은 과학이 아닌 사이비이며, 과학적으로 검증해보지 않은 것을 무턱대고 부정하는 것도 과학이 아니다. < 송민령의 뇌과학 >, p283
인문학자가 과학을 공부하지 않고 과학자들이 찾아낸 사실을 활용하지 않는 데서 인문학의 위기가 싹텄다고 본다...... 무엇인가를 새로 아는 즐거움을 주거나 오래된 생각을 교정하도록 격려한 것은 과학 책이었다.
< 문과남자의 과학공부 >, p27
과학의 역사는 인간의 상식이나 경험이 얼마나 근거 없는가를 보여준다. 과학을 제대로 하려면 우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상식조차 의심해야 한다. 따라서 과학의 핵심은 합리적 의심이다. 허나 의심 전문가인 과학자들조차 상식의 덫에 걸리는 경우가 있다. 바로 직관 때문이다. 과학자에게 직관은 중요하다. 과학자는 직관으로 할 일을 결정하고 결과를 예측한다. 직관은 믿음의 일종이다. 정확한 근거나 논리적 이유 없이 경험과 느낌만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상당히 근거 있는 믿음이라 종종 유용하기는 하지만 믿음은 믿음이다.
< 김상욱의 양자역학 >, p114
정치를 과학처럼 한다면 어떨까. 정치적 결정과 정책 수립을 감정이나 이념이 아닌, 객관적 데이터, 실험, 검증, 합리적 분석에 기반해 수행하는 것. 정치도 과학처럼 ‘문제 해결 중심’으로 접근하고, 실패한 정책을 인정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는 유연성을 갖는다면 지금의 비합리적 갈등이 끼어들 틈이 어디에 있을까. 새로운 이론의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오히려 반가워하는 과학의 특성을 정치에서도 발견하기를 기대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