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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un 17. 2020

밥상도 늙는다...

"더 이상은 못 먹겠어!"

"숨도 못 쉬겠어!"

"넌 왜 그리 먹지도 못하는걸 많이 시키냐~~ 우린 이제 예전의 우리가 아니야~~"

"야! 난 너희들이 이거 다 먹으면 또 시킬 줄 알았어~"

두 명의 생일 식사자리이니 그만큼의 회비를 써도 된다며 한우를 먹으러 간 고교 동창생들 모임. 이 정도도 못 먹을쏘냐 등심, 안심, 살치살, 갈빗살을 골고루 섞어 11인분을 시켜버린 친구와,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막연하게 믿던 우리... 5명이 이 정도는 거뜬히 먹던 시절이 있었건만 마흔을 훌쩍 넘긴 이제는 딱 5인분 만큼만 먹고 모두 남겨버렸다. 생일이면 으레 케이크에 커피까지 먹어치우기도 했건만 이제는 그것도 들어갈 자리가 없다.


연말이면 파티 핑계로 모이는 우리는 편하게 시간 구애받지 않고 수다를 떨자며 가끔 우리 집에서 모이기도 했다. 저녁은 간단히 시켜먹자고 했지만 간단히 먹는 법이란 걸 몰랐다. 회, 족발, 치킨은 기본이고 호스트인 내가 준비한 스테이크, 샐러드, 밑반찬까지 한상 가득 차려 먹었다. 배부르다 배부르다 하면서도 마지막엔 김치말이 국수나 입가심용 어묵 튀김을 먹었으며 후식도 빼먹지 않았다. 결코...


2,30대 때는 왕성한 식욕만큼이나 삶과 결혼에 대해서도 열정적이었다. 미혼이었던 친구들은 소개팅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고 기혼인 친구들은 남편 얘기, 시댁 얘기를 거품 물고 했다. 와구와구 먹으며 와글와글 떠들어대던 시간들... 잘 사는 친구를 보며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고 사회생활하는 친구들의 싱글라이프가 부럽기도 했다. 그런데 마흔이 넘으니 특별히 먹고 싶어 안달 난 음식도 없고 타인 때문에 내 속이 안달 날 일도 덜하다.  내가 가진 것과 못 가진 것의 무게를 저울질하며 내 속을 볶는 일 대신, 잘 사는 친구는 잘 사는 친구대로 싱글인 친구는 그런대로 응원을 보낸다. 음식에든 사람에든, 좋게 말하면 내려놓게 되었고 슬프게 보자면 관심과 열정이 덜해지고 있다.


팔순을 넘기신 어머님은 늘 자신의 밥상을 이렇게 소개하신다.

"현미밥에 네가 준 고추장 하나랑, 열무김치, 볶은 멸치... 이게 내 밥상이다."

고기를 좀 챙겨 드셔야 한다고 말씀드리지만, 알고 있다. 나 하나 먹자고 고기를 굽고 볶는 일 따위는 나 조차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있으면 먹고 없으면 말게 되는 것. 식구라도 한 명 있어야 뭔가를 지지고 볶는 밥상이 등장하는 것을 말이다.


밥상에 대한 열정과 시도, 노력 따위는 젊을 때 이야기가 아닐까. 나이 듦과 동시에 대충 한 끼 때우는 것, 살기 위해 먹는 것이 '밥'이 되어 버리는가 보다. 친구들을 초대하기 위해 뽀대 나는 그릇을 장만하기도 하고 사진이라도 찍어볼 요량으로 플레이팅에 신경 쓰는 호들갑. 다 한때다.

기껏 마흔 넘긴 주제에 무슨 나이를 논하느냐 싶겠지만, 새 그릇이나 주방기기를 사는 것이 꺼려지고 혼자 먹을 밥 차리기귀찮아 배고픔을 참다 참다 멸치에 열무김치만 차려 대충 끼니를 때우는 특이점이 온듯하다. 비싼 그릇은 고사하고 반찬을 하나하나 그릇에 옮겨담아 먹는 것도 사치다. 접시 하나로 모든 걸 해결한 밥상.

나의 밥상도 늙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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