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유정 Jun 19. 2020

집밥, 플랜 B

사람 맘은 참 오묘하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먹을 게 없다 싶어 장을 봐 두면, 이번에는 또 꽉 찬 냉장고가 답답해 미치겠다. 해서 한동안 장보기를 멈추고 냉파랍시며 이것저것 먹다 보면 또 찬거리가 없는 것 같아 꽉꽉 채워두고... 

냉장고 옆면에 종이 하나를 무심히 붙여두고 그 안에 담긴 식자재를 꼼꼼히 기록하시는 엄마를 왜 안 닮았는지... 가끔 우리 집에 오실 때면 5분 만에 냉장고와 부엌 곳곳을 스캔하시고 말씀하신다.

"우리 유정이... 어쩜 이렇게 살림을 못할까... 이건 언제 적거야? 저건 왜 저렇게 많이 사두고 아직도 안 먹었대?"

처음엔 귀찮고 자존심 상하는 잔소리였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흘려듣고 만다. 당신에게 며느리가 없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말이다. 


제때 소비되지 못한 야채는 썩어버리게 된다. 썩기 전까지는 과감히 버리지도 못한다. 어딘가에 쓸 일이 있을 것이라며 들었다 놓고 들었다 놓고를 반복하다가 어느새 누런 물속에 잠긴 모습을 발견해야 안심하고 버리게 된다. 마치 그 날을 기다린 것 같이 말이다. 그럴 땐, 냉장고 구석구석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굴러다니는 야채가 쌓일 때면 칼을 꺼내 든다. 하나하나 모조리 찾아내 썰어내고 소비할 수 있는 메뉴를 고민해내야 한다. 


야채가 신선하다면 월남쌈이나 김밥이 좋다. 

당근, 오이, 양파의 기본 채소부터 시작해 부추, 미나리, 양배추, 쌈채소, 토마토, 사과, 배 등등 가릴 것 없이 채 썰어 놓는다. 동시에 냉동실 정리도 가능하다. 쪼금쪼금씩 남은 고기, 새우를 없앨 수 있다. 큰 조리가 필요하지도 않다. 가스불을 켜면 불이라도 날 것 같은 무더운 여름날에도 덜 덥게 준비할 수 있으니 좋고, 무엇보다도 각자 싸 먹으면 되니 내 할 일은 재료 준비에서 끝이다. 

김밥도 마찬가지다. 정형화된 김밥 따위는 잊어버리자. 당근이나 오이도 생으로 넣어보자. 볶거나 절이는 게 귀찮아서가 아니다. 채 썬 당근과 오이의 식감이 꽤 괜찮다. 굴러다니던 특이한 재료를 넣는 순간 창의적인 요리사로 변신하기도 한다. 언젠가 쌀국수를 해 먹고 남은 고수를 넣은 적이 있는데 작은 아이와 나는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특유의 향으로 깔끔함이 배가 된 김밥. 여기에 고추냉이까지 넣어주니 초밥 저리 가라다. 

김밥은 통으로 잡고 먹어야 제맛이다.  반토막으로 썰어 꼬마김밥을 만들어도 좋다.
가지런히 놓으니 굴러다녔던 재료들 같지 않다.

생으로 먹기에는 거시기한 야채들만 남았다면 '짜글이 찌개'를 만든다.

무엇을 먼저 넣어 볶고 다음엔 무엇을 넣고 따위의 순서는 따르지 않는다. 갖은 야채와 고기, 햄 등을 한 솥에 모두 넣는다. '때려 넣는다'는 표현이 더 적확할듯하다. 고추장과 고춧가루, 파, 마늘, 간장, 설탕 약간을 넣고 아주 소량의 물만을 넣어준 후 한참을 끓인다. 감자가 들어간다면 걸쭉한 찌개를, 두부나 순두부, 연두부등을 넣어주면 부드러운 식감을 가진 찌개를 맛볼 수 있다. 다른 반찬은 필요 없이 밥과 찌개 하나면 그득하고 만족할만한 밥상이 완성된다. 

들깨가루와 깻잎을 넣어준다면 감자탕 느낌도 낼 수 있다.


이렇게 야채를 소진하고 나면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숨쉴틈도 없어 보이던 냉장고에게도 덜 미안하고 태어난 소명을 다하지 못할 뻔한 야채들에게도 삶의 의미를 부여해준 것 같은 자부심이 든다. 남편이 힘들게 벌어다 준 돈을 허투루 써버린 아내라는 죄책감에서도 벗어나고 살림 못하는 딸이라는 오명에서도 해방된다. 얼마 후면 또 똑같은 과오를 범하게 될지언정 잠시나마 내 맘이 편안해질 수 있으니 그거면 된 것이 아닐까... 나에게 관대해져 본다. 


식단을 계획하고 계획한 만큼만 장을 봐서 그때그때 재료를 소진하면 되지 않느냐 할 테지만, 난 참 그게 안 되는 사람이다. '혹시 모자랄지 몰라.', '찾았을 때 없으면 안 되지.'의 마음을, '통이 크다', '준비성이 철저하다.'라는 넓은 마음으로 포장해버린다. 계획적인 식단을 준비하고 냉장고 식재료를 적어본 적도 있지만 급변하는 정세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저것 반찬을 만들어 놓고 젓가락질할 것이 많은 저녁상을 야심차게 준비해 놓은 날은 꼭 전화가 온다. 저녁 먹고 들어온다, 약속 있다는 가족들의 사전 안내다. 사전이라고 하기엔 한참 늦은 고지이나 그들 입장에서는 저녁식사 전에 말한 것이니 사전은 사전이다. 그렇게 한번 버림받은 반찬들은 천덕꾸러기가 되기 일쑤고 며칠 돌아다니다가 버려진다. 반대로, 며칠 동안 집에서 식사할 이가 없는듯하여 식재료를 준비하지 않은 때에는 누군가 친구들을 잔뜩 몰고 온다. 냉장고를 아무리 뒤져도 내줄 것이 없었을 때, 그때 결심했다. 식단계획 따위... 개나 줘버리자... 


작은 아이의 초등학교 졸업식날, 담임선생님의 마지막 말씀이 인상 깊었다.

"살면서 이유 없이 코피 터지게 맞는 날도 있을 거다. 울고 싶으면 울고 코피 나면 쓱 닦고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면 되는 거다."

살다 보면 계획대로 안 되는 일, 내 맘 같지 않은 일 투성이다. 그때마다 좌절하면서 상황이나 자신을 탓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계획을 세우지 말고 대충 되는대로 살자는 얘기가 아니다. 무너지거나 자책하지 말자는 것이다. 다시 플랜 B를 꾸리면 된다. 

냉장고에 야채가 굴러다니걸랑 얼른 모두 끄집어내서 플랜 B의 음식을 만들어보자. 



이전 15화 밥상도 늙는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