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 4일 토요일 저녁 5시.
여의도 중소기업회관.
28살의 신랑과 24살의 신부가 결혼을 했다.
생뚱맞게 중소기업회관이라니.
3월이라 예식장을 구하기 힘들었으며 여기저기 발품 팔며 찾다가 조용하고 널찍한 곳이라 선택했다지만 돌아보니 '꼭 거기였어야만 했나?', '꼼꼼히 알아보기는 했던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신혼여행지는 호주 시드니.
왜 그곳으로 정했는지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흔한 휴양지는 피하고 싶었던 걸까.
결혼을 준비하며 코엑스에서 열리는 웨딩박람회에 갔고 여행사 부스에서 1인당 120만 원의 5박 6일 패키지여행을 덜컥 계약했다. 남편의 큰누나가 신혼여행 비용을 대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행기간 내내 비가 왔고 마지막 날 잠깐 해가 떴다. 5년 만의 태풍이라며 아무 곳도 가지 않으려 했던 가이드가 아직도 원망스럽다.
아무 준비도 없었고 아무것도 몰랐던 우리의 결혼 생활은 그렇게 얼렁뚱땅 시작됐다.
지나고 보니 그렇다. 왜 그리 서둘렀나 싶게 결혼을 했다. 임신도 안 했는데 말이지.
너무 사랑했고 한 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임계치에 도달했기 때문이라는 꽤나 낭만적인 이유만으로 결혼을 했다. 우리 둘 다 현실적인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어느 정도 경제적인 안정을 이룬 후에 결혼을 해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함께라면 어떻게든 잘 살 것이라는 막연한 자신감만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어렸다.
신혼여행 가방을 시어머님과 고르던 날이 기억난다. 신촌에 있는 백화점 1층, 여행가방 전문 브랜드 매장이었다. 큼지막한 여행가방과 세트로 묶인 화장품 가방도 함께 사주셨는데, 신소재로 만들었으며 새로 나온 디자인이라는 말에 혹해서 산 가방은 예쁘고 튼튼했다.
큼지막한 여행가방은 함을 들이던 날 함진아비의 등에 들려 나에게 전달됐다. 예쁜 핸드백과 각종 장신구로 가득 찼던 여행가방을 새로 산 커플티와 커플 잠옷으로 채우고 신혼여행을 떠났다. 화장을 잘 안 하는 나였지만 화장품 가방을 한 손에 꼭 들고 떠났다. 안을 채울 것이 마땅히 없었어도 왠지 폼나는 가방이었다. 행복한 결혼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물건이랄까.
그렇게 신혼여행에서 폼나게 들고 다니며 의미를 부여하던 물건이 20년 넘게 다락방에 처박혀있다.
어떤 이가 당근 마켓에 똑같은 가방을 올렸는데, 걸어놓은 타이틀이 딱이었다.
"새것 같은 중고"
21년 전 딱 한번 쓰고 그 쓸모를 잃어버렸으니 내 가방 역시 새것이되 새것은 아닌 물건이 맞았다.
큼지막하고 튼튼했지만 가방 무게만으로도 수화물 무게를 초과할 것 같은 여행가방은 버린 지 오래다. 너무 멀쩡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화장품 가방은 버리지 못했다. 왜였을까. 이 집에 이사 온 이래 16년간 한 번도 다락방에서 내린 적 없는데 이고 사는 이유가 뭐였을까. 앞으로도 쓰임새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버릴 수 없는 건 왜일까.
가방을 버리지 못한 이유는...
우리의 미숙하지만 그래서 아름다웠던 젊은 날의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쓸모는 별로였지만 예뻐 보였던 가방은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시작, 그 자체다. 괜히 들어보고 열어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던 것처럼 결혼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던 시절을 소환해낸다.
여전히 꼼꼼하지 못하고 경제적이지 못한 우리의 지금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알뜰살뜰함과는 거리가 멀어 곤궁한 삶을 이어갈 때마다 '저런 거 살 돈을 아꼈어야 했는데...'라는 회한이 밀려올 때가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화장품 가방일 게다. 아무리 어머님이 사주셨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마음가짐에 허세가 가득 차 있었음을 보여주는 물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세상 물정 모르는 우리를 자각시키는덕에 다락방에 올라갈 때마다 마음을 다지게 된다. 조금은 달라져보자고...
그럼에도, 여전히 낭만적인 삶을 꿈꾸게 해 주기 때문이다.
'신혼여행 때처럼 단꿈만 꾸며 여행길에 오르는 날이 올 때, 그때는 꼭 한번 들어봐야지~~'라는 바람 때문에 버리지 못한 것이다.
20여 년의 결혼생활에서 맞닥뜨렸던 굴곡들을 잘 이겨내고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가족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은, 우리의 꿈과 사랑, 낭만이 응축된 저 가방 때문이라는 나만의 주술 때문이다. 결국, 삶을 지탱시켜주는 것은 그러한 추상적이고 쓸모없어 보였던 것들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국은 말이다.
더 이쁘고 튼튼하며 가벼운 가방이 나오더라도 버리지 못한 채 이고 지고 살 수밖에 없을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