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황성 옛터'를 부른 여배우, 이애리수

by 황현수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탤런트가 되려면 KBS, MBC, SBS 방송 3사에서 하는 신인 탤런트 선발대회에 나가 뽑혀야만 했다. 1 기수에 약 24명의 신인을 뽑는데 여자의 비율이 남자보다 조금 많아 14명 정도가 된다. 그러다 보니 방송 3사에서 한 해에 뽑은 신인 여자 탤런트의 수는 평균 40여 명이 되는 셈이다. 1980년부터 2008년까지 28년간 KBS와 MBC가 뽑은 여자 탤런트만 해도 800여 명이나 된다. 그 외에 SBS나 연극 무대, 다른 장르를 하다가 뽑히는 경우를 합치면 그 수는 더 많아진다. 위키백과에서는 텔레비전 여자 배우 수가 1,720명으로 나와 있고 TBC가 있던 1980년 이전에도 방송 3사에서 탤런트를 뽑았으니 그 수는 더 늘어난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방송 3사는 신인 탤런트를 더 이상 뽑지 않는다. 많은 연예 전문 회사들이 생겨나 나름 훌륭한 재원들이 많아지며 방송사에서 굳이 신인 탤런트를 뽑을 필요가 없어진다. 그래서 2010년 이후의 여배우는 아이돌 출신이거나 연예 전문 회사 출신이 많다. 그러니까 40대가 넘은 여배우의 거의가 방송 3사의 신인 탤런트 출신이거나, 혹은 선발대회에서 낙선한 경험이 있다고 보면 된다. 여배우의 이력을 보면 어느 방송사 탤런트 몇 기라는 자부심의 경력이 따라다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2009년 SBS 탤런트 선발대회를 마지막으로 방송사에서는 탤런트를 뽑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많은 여배우들 중에 같은 길을 가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다. 여배우는 필수적인 연기 능력보다 외모와 젊음의 잣대로 가혹한 평가를 받는다. 사람들은 여배우의 외모, 혹은 허상에 가까운 인지도에만 관심을 가진다. 여배우들은 사라져 가는 젊음 때문에 다른 여배우에게 역할을 뺏길 까 봐 노심초사한다.


여성에게 일과 가정의 의무는 여배우라고 예외는 없다. 아내, 며느리, 엄마, 딸로서의 의무 때문에 많은 여배우들이 배우의 길을 포기한다. 연기력보다 외모를 중요시하는 대중의 시선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되고 나이가 들수록 맡을 수 있는 역할이 줄어들다 보니 배우 활동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많은 여배우들이 잊힌다.

한국 최초의 여배우는 1921년 영화 <월하의 맹서>에서 주연을 한 이월화이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파마를 했다는 이월화의 태어난 환경이나 성장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1904년 충남 예산 출신으로 고작 스물아홉을 살고 1933년에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진다. 진명 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천성적으로 타고 난 고운 음성과 섹시한 몸매로 연극을 하다가 영화에 데뷔해 일약 스타가 된다. 영화 <해의 비곡>, <뿔 빠진 황소> 등에서 여주인공으로 확고한 자리를 닦은 그였지만, 그 개인의 생은 그리 평탄치 못했다.

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그 무렵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염문에 휩싸인 그는 자기를 짝사랑하던 청년과 함께 중국 상해로 도피 생활을 하게 된다. 그 후 사업 실패와 사랑하는 이와 헤어짐으로 인해, 정신이 피폐해지고 몸마저 비대해져 영화계를 떠나게 된다. 폐인이 되다시피 한 그는 웃음을 파는 권번(일제 시대 기생 조합)의 기생이 되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병으로 최후를 맞는다. 이러한 비극적 결말은 결코 이월화 개인의 문제 만은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여자들의 사회 활동이 거의 없었고, 신여성이기도 한 여배우에 대한 열광은 굉장했지만, 한편으로는 광대나 술집 여자 정도로 천시하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


그 시절, 또 한 명의 여배우인 이애리수.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히트 대중가요인 ‘황성 옛터’를 처음 부른 이가 바로 이애리수다. 1928년, 18세의 이애리수는 서울 종로 단성사에서 연극의 막간에 이 노래를 부른다.

'황성 옛터'를 부른 여배우 이애리수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


나라 잃은 설움을 에둘러 표현한 애절한 곡조는 이내 객석을 뒤 흔들었고 숨죽인 흐느낌은 어느새 통곡으로 번져, 가수도 목이 메어 울며 노래를 부른다. 놀란 일본 순사들이 무대에 올라와 노래를 중단시켰고, 배우는 물론 가사를 쓴 왕평과 작곡가 전수린 등을 비롯한 공연 관계자들이 종로경찰서로 붙들려 가 경을 친다. 1932년 빅터 레코드사가 발매한 이애리수의 ‘황성 옛터’ 음반은 폭발적인 반응으로 5만 장 이상이 팔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당시의 유성기 보유 대수로 짐작해 좀 부풀린 것 같다.


이애리수는 1911년, 개성에서 태어나, 9세 때 극단에 들어가 배우 겸 가수로 활동한다. 빼어난 노래 솜씨와 아리따운 얼굴로 인기를 누리던 그녀는 '황성 옛터'로 일약 국민 가수로 떠 오른다.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그는 22세에 연희전문 대생이던 배동필과 결혼을 약속하지만, 집안의 반대로 동맥을 끓어 동반 자살을 기도 한다. 그의 사생활은 언론을 통해 확대되기도 하고, 비판받는다. 우여곡절 끝에 시댁의 조건부 허락을 받아 사랑을 이룬 그녀는 그 뒤, 화려한 여배우에서 평범한 아낙으로 자취를 감춘다. 그 이애리수가 2008년 98세로 일산의 한 요양원에 정정하게 생존해 있다는 보도가 있었고, 그 1년 뒤 9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시부모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식에게 조차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 않으며 살았다고 한다.

화려한 배우에서 평범한 아낙으로 자취를 감추다 99세로 세상을 떠난 이애리수.

여배우로 살아간다는 일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힘든 것 같다. 여배우들의 사생활은 대중의 관심이 되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많은 여배우들이 일과 사생활의 경계에서 고통받고 힘들어하며 무대를 떠난다. 이곳 북미주에도 ‘네버엔딩 스토리’의 여배우들이 간혹 보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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