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마쓰 요코, <혼자서도 잘 먹었습니다>
저는 2019년 1월부터 9월 말까지, 경상북도 안동에서 살았습니다. 일 때문에 내려갔지요. 미혼인 저는 안동역 근처 원룸에 혼자 살면서, 주변 맛집을 돌아다니거나 홈플러스에서 재료를 사서 집에서 해 먹었습니다. 함께 서울에서 내려와 일했던 후배는 와이프와 함께 살았고, 저는 두 신혼부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혼술 혼밥족이 되었지요. 추운 겨울에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따끈한 갈비탕을 데워서 후후 불어 먹은 뒤, 배를 두들기며 월령교를 한 바퀴 돌고 오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습니다. 혼밥이나 혼술은 기본이고, 혼고기(혼야키니쿠, 혼자서 고기 구워먹기), 혼노래(혼가라오케, 혼자서 노래방 가기)도 거뜬히 해치웠습니다. 사는 동네에는 저를 아는 사람이 없었고, 저는 마치 방콕 카오산로드에 홀로 온 배낭여행족처럼 두 팔을 휘휘 저으며 맘껏 살았습니다. 뭐, 저를 아는 사람이 있었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딱히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성격이라.
사실 저는 제가 혼술 혼밥족이라든지 싱글족이라든지 1인 가구라든지 하는 의식조차 없었습니다. 어째서 나 자신을 유행에 따라 뜨고 지는 카테고리 속에 집어넣어야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요. 게다가 저는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싱글족조차 아니었지요. 신문 기사를 보니, '솔로충'이란 말도 있더군요. 벌레를 뜻하는 충(蟲)이 아니라, 충실하다는 의미의 충(充)을 씁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충실하게 즐기며 보내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랍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혼자 있는 시간을 충실하게 즐긴다면 솔로충이 될 수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싱글족은 아니라도 솔로충 정도는 되겠네요.
저는 대단히 섬세한 혀를 지니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인 이노가시라 고로(井之頭 五郎)처럼 혼자서 먹으러 돌아다니는 것만큼은 1990년대 때부터 몹시 좋아했지요. 대단히 멋진 일도, 남의 눈치를 볼 것도 아닙니다. 그냥 타고난 기질이 그러했을 따름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혼술 혼밥 문화에 대해 관심이 생겨, 대형 서점 홈페이지에 들어가 검색해본 저는 그만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철학 전공자라, 혼술 혼밥의 철학, 아니 그 저변을 흐르는 혼술족 혼밥족의 속내를 자세히 다룬 책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온 책들은 죄다 혼술 혼밥족들을 위한 레시피를 담았더군요. 그런 책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그런 책들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유용하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혼밥 혼술의 기쁨과 행복을 정말 담담하게 들려주는 책을 찾기란 어려웠습니다.
참고로 저는 "그래, 나는 혼술 혼밥족이다. 그래서 어쩔래? 한국과 일본의 집단 문화 때문에 지금껏 우리가 목소리를 못 내었지. 이제 우리 세상이 왔어. 그러니까 무시하지 마!" 등의 선언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1990년대부터 혼술 혼밥을 즐겼는데, 제게 뭐라 그러는 사람은 보질 못했습니다. 물론 뒤에서 석연치 않은 소리를 하는 집단주의자들도 없지는 않았겠지요. 하지만 그 정도 말에 멘탈이 흔들흔들해서야, 세상 무슨 일인들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사실 남들은 내게 그렇게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본인이 괜히 남을 의식하고 사는데 길들여져 있으니, 무슨 자그마한 행동을 해도 남들이 나를 신경 쓰고 비난하는 것처럼 느낄 따름이지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혼밥족 혼술족의 존재를 인정해달라고 TV에서 강하게 주장하는 이들이야말로, 그들에게 책을 팔아먹기 위한 밑밥을 깔거나, 아니면 정말로 유행에 민감해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뭐, 아니면 말고요.
여하튼 저는 수많은 요리책들을 패스하며 정신없이 마우스를 놀리다, 얏호, 드디어 제 마음에 드는 책을 찾아냈습니다! 역시 일본 사람이 쓴 에세이가 이런 주제에는 딱입니다. 쇼지 사다오의 <혼밥 자작 감행>(시공사, 2019)과 <고독한 미식가> 원작자 구스미 마사유키의 <먹는 즐거움은 포기할 수 없어>(인디고, 2018)를 다시 대학교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검색했습니다. 아뿔싸, 한 권은 아예 없고 다른 한 권은 대출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우울해졌습니다. 그러나 하라마쓰 요코의 <혼자서도 잘 먹었습니다>라는 책도 왠지 제 시선을 끌었습니다. 그나마 얘가 도서관에 있으니, 대출해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지만, 그냥 느낌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 느낌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일본의 푸드 저널리스트입니다. <산다는 건 잘 먹는 것>이라는 작품으로 제16회 분카무라 드 마고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합니다. 한국에도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그녀 글쓰기의 가장 큰 장점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음식을 따뜻한 시선으로 기막히게 묘사해낸다는 것입니다. 프롤로그에서 그녀는 말합니다. "애당초 혼자 먹는 것은 외로운 일도 부끄러운 일도 전혀 아니다. 능숙하게 자기를 대접하고 나면, '됐어, 해냈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누구와 함께할 때와는 다른, 또 다른 깊은 만족감이 느껴지니 참 신기하다."
그렇습니다. 고된 하루를 끝내고 나면, 내게 주는 조그만 선물이 바로 혼밥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는 자리도 즐겁습니다. 하지만 멋진 에세이 하나를 마쳤을 때, 근처 일식집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돈코츠 라멘을 후후 불며 혼자 먹는 것도 또 다른 행복입니다. 따뜻하게 데운 정종을 곁들이면, 여기가 천국인지 우리 집 근처인지 헷갈릴 정도이지요.
그러면 이와 같이 따뜻한 마음과 시선을 지닌 요코 씨는 평소 사람을 피해 일부러 혼자 먹으러 다니는 걸까요?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혼자는 재미있다. 자기 멋대로 계획이 없이 무작정,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얽매이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가끔 하는 실패나 낭비도 나 혼자 받아들이고 끝내면 그만이니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이 있다. '그래, 다음에는 그 사람을 데려와야지'라는 생각이 들 때다. 혼자만의 시간에 새로운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멋진 식당을 발견하고 거기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면, 다음에는 좋은 사람과 그 경험을 함께 하고자 합니다. 맛있는 우동 집이 있네? 다음번엔 우동을 좋아하는 엄마와 함께 와야지. 이 가게의 타코야키가 끝내주는 걸? 지난 일본 여행 때 오사카에서 타코야키를 먹고 상사병이 걸린 동생을 데리고 와야지. 나도 즐겁고 내 사람들도 행복한, 모두가 행복한 알이즈웰 구루메 철학입니다.
그녀는 음식에 따라 주제를 바꿔 답니다. <메밀국수=실연의 상처, 가뿐하게 극복>. <인도 카레=여행 본능을 깨우는 향기>. 에세이는 그녀가 주인공이 아닌, 단편 소설 모음집의 형식을 띱니다. 사람 냄새가 폴폴 나는 단편들을 읽다 보면, 진부한 표현이기는 합니다만,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한국의 돌솥비빔밥=울고 싶은 밤, 작은 위로>. 궁금하지 않습니까? 어째서 돌솥비빔밥이 울고 싶은 밤과 연결될까요? 결국 그녀의 체험이나 귀동냥이 담겨 있겠지요. 저는 아직까지 돌솥비빔밥을 위로삼아 먹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이런 식으로 그녀는 혼밥 혼술을 '선언'하지 않고, 담담하게 혼밥 혼술의 일상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설명충'이 아닌 '솔로충'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잘 쓴 소설은 설명하지 않고 묘사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리마쓰 요코 작가는 무심한 듯 슥삭 보여주는 글쓰기의 대가입니다. 저는 감히 대가라고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나 좀 알아줘. 나 힘들어 죽겠어. 세상이 나를 괴롭혀. 나는 당당해."하고 '설명'하는 베스트셀러 에세이스트들과는 달리, 그녀는 평범한 사람들의 고단한 일상을 말 그대로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보여주기' 글쓰기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척척 구사해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단편 하나하나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합니다.
진정 가슴 따뜻한 혼밥 혼술 에피소드를 담은 책을 읽고 싶은 분들께, 저는 <혼자서도 잘 먹었습니다>를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행복한 혼밥 혼술 되세요. 가정이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