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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이 May 01. 2024

타이베이의 잠 못 이루는 밤

지진이든 바선생이든 하나만 해라...

4월 14일 한국에서 돌아온 이후, 2주 가까이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졌다. 


4월 3일 대지진 이후의 여진이 아직까지 이어지면서 잊을만하면 대만섬을 흔들어댔기 때문이었다. 워낙 강력한 지진이었던지라, 뒤틀린 지각이 새로운 균형을 찾는 데에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는 전문가의 인터뷰가 연일 보도 되었다. 나의 숙면을 더 방해하는 것은 정작 지구 내부의 일이 아니었다. 땅이 조용할라치면 지구 표면에서 바선생이 존재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난 27일, 미친 바선생의 습격에 백기랑 휴지랑 에프킬라 통이랑 있는 대로 다 던지고, 바로 짐을 싸서 중심지에 있는 호텔로 나와버렸다. 


내가 무엇을 위해 그 시간을 견디고자 애썼던가...

포기하면 편하다는 희대의 진리를 또 이렇게 깨닫는다.





4월 14일, 대만으로 돌아오던 날부터 잊을만하면 땅이 흔들렸다. 초반에는 주로 자정이 넘은 시각을 위주로 아주 잠깐, 1-2초 정도 흔들 혹은 빙글, 하고 마는 수준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렇게 대만에 적응하나 보다, 훗, 이 정도 흔들림은 아무것도 아니지,라는 오만방자한 생각도 잠시 했다. 


하지만 여진이 숙면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컸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새벽 2-3시가 되면 혹은 날이 밝기 전, 꼭 1-2번은 매트리스가 흔들렸다. 참고로 이 기숙사는 방음이 전혀, 정말, 전혀 되지 않는 건물이다. 이 기숙사에서 지낸 지 3일째 되던 날, 나는 이 낡아빠진 건물을 지을 때 주변이 모두 우롱차 밭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방음에 대한 고려를 1도 안 하고 건물을 지을 수가 있나... 도로에 다니는 자동차 및 스쿠터 소리가 들리는 것은 당연하고, 저 아래 인도에서 사람들끼리 나누는 대화도 다 들린다. 저녁 9시 정도에는 쓰레기차가 동네 쓰레기를 수거하러 다니는데 (바퀴벌레도 좀 같이 수거하지), 삼삼오오 모여있는 동네 주민들이 떠드는 소리도 잡음 하나 섞이지 않고 4층 내 방까지 다 올라온다. 놀랍다. 


바깥 소음으로 인해 잠을 설치는 일도 꽤 잦아들 무렵, 여진이 찾아왔다. 잠이 들랑 말랑 하면 흔들, 또 잠이 겨우 들만하면 흔들, 그러니 아침마다 눈꺼풀이 팅 부어서 일어나기 일쑤였다. 일주일째 그러고 있으니 돌침대에서 자면 흔들림이 좀 덜할까, 차라리 물침대에 누워있으면 늘 흔들릴 테니 그게 더 나은가,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지반이 흔들린다는 것은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었다.  


4월 셋째 주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최소한 자정을 전후한 시각으로 1-2번 흔들리고 말았으니까. 4월 넷째 주가 되자 지진은 점차 잦아졌다. 대만에서 5-6년 살았다는 내 친구도, 대만 남부 지방인 타이난에서 나고 자란 내 친구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이렇게 오래, 그리고 자주 발생하는 여진은 처음 본다고. 실제로 낮 시간에도 땅이 흔들리는 빈도가 잦아졌다. 이제는 땅이 흔들린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인지, 정말 땅이 흔들리는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앉아 있다가도 빙글, 차로 이동하면서도 빙글, 누워서도 빙글, 서서도 빙글, 하도 빙글 대니 나중엔 묘하게 어지럽기까지 했다. 


낮 시간에도 흔들림이 잦았고, 저녁시간까지 흔들림이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저녁을 먹다가 또 의자가 흔들리길래 책상 밑에 들어가서 밥을 퍼 먹고, 그 와중에 최근 급 친해진 대만 친구랑 메신저로 수다를 떨며 '지진 지긋지긋하다'라는 시답잖은 말을 나누고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어지럽지 않았니', '난 저녁을 테이블 밑에서 먹었어', '아웅, 머리 아파', '우리 남편이 친구랑 놀러 나간걸 보니 괜찮은 것 같은데, ' 뭐 이런 시답잖은 메시지를 보내던 중, 건물 복도의 창문이 찰랑찰랑 하는 소리를 냈다. 그동안 들리지 않았던 소리였다.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너네 집도 흔들려?" 


그렇게 여러 번 흔들림이 이어지니, 사람들이 복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각은 어느새 자정을 향해 가는데, 다들 걱정이 되어서 나온 모양이었다. 나도 나가볼까, 하면서 방문을 여는 순간, 건물 복도의 창문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바닥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데 몸이 흔들린다는 것은 또 다른 경험이었다. 얼른 방문을 닫고 책상 밑으로 뛰어가 몸을 숙였다. 그 와중에 기어가는 바선생 유충, 빌어먹을, 진짜 다 불구덩이로 가 버려라.


바선생 유충 눌러 죽이랴, 책상 밑에 쭈그려 앉아 있으랴, 여러모로 바빴지만 꽤 놀랐던 모양인지 심장이 콩닥거렸다. 옷장에 세워둔 짐가방이 제멋대로 덜컹거렸다. 책상에 올려둔 화장품 중 하나가 쓰러졌다. 친구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방금 거 꽤 큰데? 괜찮아?" 4살과 5살, 연년생 딸 둘을 키우고 있는 친구가 말했다. "나 노이로제 걸리겠어... 잠깐만, 우리 둘째가 침대에서 나왔는데 다시 재우고 올게." 


실시간으로 지진을 관측하는 웹사이트를 새로고침했다. 화롄에서 진도 6의 여진이 발생했다는 경보가 떴다. 4월 3일 지진 이후로 이렇게 강력한 여진은 처음이었다.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너굴아, 혹시 모르니까 휴대폰이랑 컴퓨터 다 충전해 놓고, 운동화 신고 있어. 그리고 가능하면 물도 좀 받아놔."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 준비하자는 뜻이었을 텐데, 친구의 말을 듣는 순간 지진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짝꿍한테 카톡으로 실시간 상황을 전하고, 한국에 있는 가족 단톡방에 내 대만 거주지 주소와 담당 관계자 연락처를 남겼다. 정말 혹시 모르니까... 모든 중요 문서를 백팩에 넣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마실 물이 충분한지 확인한답시고 냉장고를 수도 없이 열었다 닫았다. 얼마 전에 선물로 받은 펑리수와 누가 크래커가 반가웠다. 비상식량으로 쓰이기에 적합해 보였다. 혹시나, 더 큰 지진이 오면 패닉이 올까 봐 종이봉투도 손 닿는 곳에 두었다. 순간 중국어 스피킹이 잘 안 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참, 나는 대만 현지 전화번호도 없지... 젠장, 이 건물이 무너져도 구조 요청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뭉게뭉게 확산되더니 나는 어느새 영화 '터널'의 한 장면에 나를 대입하고 있었다. 


그날 밤, 진도 6을 넘는 여진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지만, 진도 3-4의 여진은 꾸준히 왔다. 짧게는 20분 간격, 길게는 1시간 간격으로 계속 땅이 흔들렸다. 물론 지진의 진원지는 화롄 지방이고, 그쪽에서 진도 4 정도의 지진이 발생하면 타이베이에서는 침대 매트리스가 약간 출렁이고 말 정도이긴 하다. 진도 6이 발생하면 타이베이에서는 건물 창문이 철컹이는 정도이구나, 어느 정도 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친구도 나도, 동이 틀 때까지 제대로 자지 못했다. 뉴스를 검색해 보니 진도 6의 여진을 직격타로 맞은 화롄 지방에서는 건물이 또 하나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지난 4월 3일 대지진으로 다수의 여행객이 고립되었던 화롄 타이루거 국립공원은 잠정 폐쇄되었다. 그래도 삶은 이어져야 하지 않나. 오후에 차로 1시간 떨어져 있는 신추(Hsinchu) 지방에서 인터뷰 약속이 잡혀있었기에, 비몽사몽 정신줄을 부여잡고 긴 여정에 나섰다. 도로에서 차가 정차하던 중에도 앞 차가 양 옆으로 갸우뚱갸우뚱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제 내 몸이 닿아 있는 곳이 흔들린다는 자각도 거의 할 수 없는 단계인 듯했다. 그저 미묘한 어지럼증만 계속될 뿐. 


신추 지방엔 대만 GDP의 30%를 책임지는 TSMC가 있다. 지난 4월 3일 대지진 때는 일부 공정 라인이 잠시 가동을 중단하기도 했었다는 뉴스를 봤다. 대만의 지진이 삼성에게 호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분석(?)도 심심찮게 곁다리로 보였다. 그래 뭐, 기업을 운영하는 혹은 그 기업의 주식을 보유한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무 쉽게 "아싸, 삼성 개이득"이라고 말하는 댓글 혹은 '분석'을 보며, 때로는 모든 일을 다 겪지 않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많이 알아봤자 혹은 많이 경험해 봤자 다양한 종류의 고통을 잘 아는 것 밖에 안 될 테니까.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해지는지, 굳이 모든 사람이 알 필요는 없겠지. 


진도 6의 여진이 지나가고 약 이틀 동안은 만나는 사람마다 "지진 무서웠지"로 대화를 시작했다. "아니, 괜찮았어"라는 말을 진심으로 할 정도로 그날의 충격에서 빠르게 벗어났으나 미니미 지진은 계속 이어지던 어느 날, 대만의 '봄' 답게 하루 종일 폭우가 이어졌다. 삽시간에 양동이로 물을 쏟아붓는 소나기가 1시간씩 이어지는, 대만의 봄, 이라고 했다. 


이 폭우를 좀 더 눈여겨봤어야 했는데, 나는 그만 나의 적군이 깨알같이 작은 벌레(=바퀴벌레 유충)라는 사실에만 집중한 채 마음을 놓고 말았다. 





'대만', 그리고 '바퀴벌레'로 검색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글들이 여행객의 바퀴 '간증글', 그리고 장/단기 거주자들의 바퀴 '적응기'이다. 여행객들은 주로 가공할만한 바퀴의 크기, 이들이 도로에서 '걸어'다닌다는 점(기어 다니지 않는다), 그리고 꽤 많은 바퀴가 밟혀서 도로에 빈대떡이 되어 있다는 점, 등에 대한 간증을 충격과 공포를 가득 담아 털어놓는다. 장/단기 거주자들은 처음 겪었던 충격과 공포에서 적응기 그리고 무덤덤기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공유하며 인간은 실로 적응의 동물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물론 종래에는 담담하게 대처하게 된 그들에게도 대만 바선생과의 첫 조우는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임을 잘 알 수 있었다.


대만의 기후, 음식, (느려터진) 행정처리, 차와 사람이 뒤섞여 다니는 도로, 재래식 변기, 등, 굵직한 것들에는 어느 정도 적응하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바퀴에 관해서만큼은 나는 아직 여행객의 마음을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그들에게 '바선생'이라는 존칭을 쓰면서까지 내 생활반경에서 절대 절대 뵙지 않기를 바랐다. 깨알 같은 그들의 후손 정도는 내 능력 범위 안에서 해결이 가능했다. 그저 조금 큰 개미라 생각하고 편하게 저세상으로 보내면 그만이지만, 그 이상은 감당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내 본능을 지배하고 있었다. 어쩌면 검은깨 같은 바퀴벌레 유충을 매일 1-2마리씩 잡으면서 안심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실내에 서식하는 독일바퀴의 후손이니, 외부에서 유입되는 겁나 큰 바퀴가 아니라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가드를 내려버린 것은 아닐까. 둘이 철천지 원수도 아니고, 가끔은 실내에서 사이좋게 조우할 수도 있는데, 왜 그런 헛된 희망을 가졌을까. 아아, 나는 멍청하게도, 실내로 들어온 독일바퀴의 후손들을 보이는 족족 처리하면 내게 강 같은 평화가 오리라 생각했다. 타이슨이 그랬던가, 누구나 링 위에서 처 맞기 전까지는 계획이 있다고.


혹자는 대만에서 길을 걸을 때 흐린 눈을 하고 다닐 것을 권했다. 다른 지인은 눈을 똑바로 뜨고 내가 밟는 땅이 어떤 땅인지 꼼꼼히 확인하고 걸으라 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봐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누군가는 폭우가 내린 대만의 여름날 밤을 조심하라고 했다. 또 어떤 이는 마을에 소독차가 돌고 간 다음 날 아침을 조심하라고도 했다. 


온통 바선생에 대한 이야기였다. 길바닥에 얼룩덜룩한 무늬들은 낙엽이 인도에 들러붙은 것이 아닐 확률이 높다고 했다. 바선생은 대단히 빠르지만 인간은 그 보다 몇 백배는 크다. 누군가는 그것을 처음 밟고, 누군가는 그걸 또 밟고, 이름 모를 그대들이 계속 밟고 밟아서, 도로와 인도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을 낙엽으로 알고 산다면, 그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꼭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곳은 대만. 날이 덥지 아니한가. 옷차림도 가볍지만 신발차림도 가볍다. 가뜩이나 바닥이 얇은 쪼리나 샌들을 신고 어떤 생명체를 밟게 된다면, 그 느낌이 발바닥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우리는 이런 것을 트라우마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기억을 간직한 채 평생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럴 바에는 내가 걷는 이 길을 두 눈 똑바로 뜨고 걷는 편이 좋겠다는, 어느 현자의 말도 일리가 있다. 


폭우가 내린 날 밤이면, 하수구에 물이 차서 바선생들이 있을 곳이 없어지기에 도로로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침수되는 것은 싫어하시지만, 젖어있는 도로에서 수분을 섭취하기 위해 머물러 있는 그분들, 혹은 수분과 뒤섞여 더욱 강렬한 냄새를 뿜어내는 쓰레기 봉투 주변으로 모이는 그분들을 봤다는 간증글이 차고 넘친다. 물이 찰랑이는 하수구 구멍에서 삐죽삐죽한 검은 털 혹은 검은 꼬챙이 같은 것을 보았다는 글도 많았다. 아아, 실로 질기디 질긴 것이 생명이란 말인가.


마을에 소독차라도 도는 날은 대량 살육이 일어나는 날이다. 다음날 아침은 유난히 짙은 잿빛으로 시작하는데, 은은하게 소독약 냄새가 남아있는 도시는 지는 해의 어스름인지 떠오르는 해의 푸르름인지 알 수 없는 빛에 반사되며 그 윤곽을 드러낸다. 강렬하지 않아서 더 돋보이는 세계가 바로 이것인가. 전날 들이마신 소독약과 살충제의 콜라보로 뒤집어진 바선생들이 도로에서 버둥거리는 모습은, 동틀 녘의 해를 배경으로 더욱 드라마틱하게 다가온다. 


26일은 이 모든 것이 합치하여 선을 이룬 날이었다. 일주일 정도 독일바선생의 후손들과 전투를 이어갔고, 26일 자정을 기점으로 나름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끝까지 긴장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25일 아침, 묘하게 소독약 냄새가 길거리에 퍼져있다고 생각했다. 24일, 그야말로 억수같이 비가 쏟아져서 도로 하수구 구멍에서 물이 넘쳐도 이상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26일 밤늦게 귀가한 나는, 건물 입구에서 미국 바선생이 터벅터벅 걷고 있는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왜 하필 건물 안이었을까. 왜 하필 그 바선생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그러고 있었을까. 나는 왜 그때 용감하게 바선생의 프로필을 찍겠다고 카메라를 들이밀었을까. 공공의 적을 해치우는 마음으로 올라가서 살충제나 갖고 왔어야 했는데, 나는 빠르게 사라지는 바선생의 육중한 피지컬에 감탄(?)한 채, 유유히 내 방으로 올라갔다. 


내 방에서 독일 바선생의 유충이 발견되지 않아서 퍽 기분이 좋았다. 후텁지근한 날을 보냈으니 샤워를 하기 위해 세면도구를 챙기는 순간, 침대 프레임 밑으로 아까 건물 입구에서 본 무언가와 비슷한 생명체가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 살면서 슬로모션으로 기억되는 장면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오늘이 그날이구나. 무언가가, 뚜벅뚜벅 걸었다.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 이정재의 등장씬과 맞먹을 정도였다. 하얀 타일 바닥과 옅은 나무 색깔의 침대 프레임과 대비되어 그 무언가는 더욱 검게 보였다. 심지어 그 생명체가 만들어 낸 그림자가 보이는 듯도 했다. 그 우람한 덩치는 바닥에 붙어있지 않았다. 족히 0.5cm는 바닥에서 떨어진 상태로, 길고 육중한 다리를 이용해 몸통을 지탱하며 바닥과의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끔찍한 것을 보거나 너무 무서운 것을 보면, 울음 섞인 "엄마아" 소리가 저항 없이 나온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육성으로 이런 소리를 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건물 입구에서 본 그 바선생인지, 혹은 그 바선생의 친구인지 알 길은 없으나 (내 방은 4층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바선생은 미국 바선생이라는 것. 즉, 실외에서 들어오시는 분이지만, 일단 크기가 가공할 만큼 크고 (실제로 보니까 소름 끼치게 공포스러웠다), 비행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 


욕이 육성으로 나왔다. 

아, 이것들이 밖에서나 놀 것이지 멀쩡한 사람 방에는 왜 들어와 가지고. 

으아아아아악. 미친 거 아니야.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지만, 나는 한동안 보이스톡 너머에 있는 짝꿍에게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바선생을 저주하느라 상당히 진상을 부리는 이웃이 되었다. 짝꿍은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묘수를 제안했지만 도저히 내가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휴지를 말아서 잡으라는 둥, 유리컵 같은 것이 있으면 덮으라는 둥, 약을 뿌리라는 둥, 밖으로 보내라는 둥. 


안타깝지만, 그런 얕은 수도 상대가 어느 정도 만만할 때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과장 없이, 내 검지 전체에 달하는 크기의 생명체를 휴지로 잡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자꾸 잊는 것 같아서 덧붙이는데, 저 생명체는 비행능력이 있다. 내가 잘못 건드려서 이 미국 바선생을 화나게 하면 내 얼굴로 날아올지 내 귀 옆을 날아갈지 알게 뭔가. 어느 경우든 내가 과호흡을 맞이할 가능성이 컸다. 


인생에서 너무 무섭고, 너무 끔찍하고, 너무 싫지만, 그 일을 하지 않고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을 때, 굉장히 많은 용기와 심호흡과 강단이 필요하다. 내가 캐나다에 사는 너굴이라 친밀감을 느끼고 들어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미국 바선생과 오늘 밤 같은 공간에 있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 미국 바선생을 쫓아내는 수밖에. 


짝꿍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로 나를 설득시켰다. 나 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지금 짐을 싸서 갈 호텔도 없었다. 갈 호텔이 있다한들, 바선생 옆에서 짐을 쌀 엄두도 나지 않았다. 나는 대단히 결연한 마음으로, 그렇지만 너무 놀라서 덜덜 떨리는 팔을 부여잡고, 운동화로 갈아 신고, 라텍스 장갑을 끼고, K94 마스크를 낀 채, 대만 에프킬라 통을 한 손에 들었다. 그리고 바선생이 숨어계신 침대 밑을 공략했다. 


덩치가 커서 이 정도 살충제는 애교인 것인가. 바선생은 아무런 인기척을 내지 않았다. 

갖은 욕과 소리와 별의별 저주를 다 퍼부으면서 살충제를 몇 차례 더 뿌렸다. 듣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어지러울 정도의 살충제는 되었던지, 바선생은 그 육중한 다리로 침대 프레임 아래에서 몸을 여기저기 부딪히며 덜거덕 거리는 소리를 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 가족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렇게까지 큰 생명체는 아니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까. 나는 왜 바선생만 보면 카프카의 '변신'이 생각나는 걸까. 그러라고 쓴 문학작품은 아닐 텐데 미치겠네. 


바선생은 드디어 침대 프레임 옆 새하얀 바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망할 것이 침대 밑은 다 쓸고 다녔는지 엉덩이 부분에 먼지를 질질 붙이고 다녀서 더 그로테스크한 모습이 되었다. 살충제를 다시 뿌리기엔 위치가 좋지 않았다. 여기서 더 뿌렸다가 다시 침대 프레임 밑으로 숨으면 곤란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적군을 평지로 몰아야 한다. 손자병법에서도, 삼국지에서도, 협곡이나 산세가 험한 곳에서는 수비하는 쪽이 유리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이럴 때 쓰라고 나관중 씨가 삼국지연의를 쓴 것은 아닐 텐데, 뭐 여하간 살면서 한 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된 것 아닌가. 


바선생이 평지로 나올 수 있도록 반대편으로 살충제를 뿌렸다. 썩어도 준치라 했던가. 먼지에 뒤엉켜서 살충제를 들이마셔도, 미국바선생은 대단했다! 행여나 바선생이 날아서 이 공간을 탈출하겠다고 마음먹을까 봐 정말 가슴을 졸였다. 전력질주로 수영장 100m를 왕복한 것 마냥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내 간절함이 닿았는지 아니면 나관중 씨의 책을 내가 열심히 읽은 덕분인지, 바선생은 드디어 너른 평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나의 패전이 불 보듯 뻔했기에 나는 도망치는 바선생의 후방에서 계속 공격을 이어나갔다. 적을 잡을 때 퇴로를 열어주는 듯하면서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야 전멸시킬 수 있다고 제갈량 선생이 말하지 않았나. 나는 비틀거리며 평지로 달려가는 바선생에게 주저 없이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더 넓은 세상(aka. 살충제를 미친듯이 뿌릴 공간)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열린 방문을 넘어 복도로 바선생이 탈출하자 이 전쟁의 승기가 내 쪽으로 넘어왔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샴페인을 일찍 터뜨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전쟁에서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전쟁물자의 보급이다. 아무리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드높아도, 식량과 보급품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패색이 짙어진다. 미국 바선생은 그 이름에 걸맞게 체격 조건이 좋았다. 바퀴 그림이 떡하니 그려진 에프킬라 한 통을 다 써 가는데도 당최 백기를 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스프레이 분사구를 누르고 있던 검지가 저렸던 나머지 힘이 빠진 찰나, 바선생은 방향을 틀어 내 방문을 다시 노리기 시작했다. 실로 대단했다. 약을 그렇게 처먹었는데도 저렇게 빠르게 내달릴 수 있다니. 저 자가 여포의 환생이던가. 


맹획과의 전투가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던 어느 날 제갈량은 꾀를 내었다. 식량도 부족하고 병사들의 사기도 바닥을 친 지 오래였지만, 식량과 보급품 조달에 문제가 없는 '척'을 하는 것도 적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주요 전술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밥 지을 쌀은 없었지만 제갈량은 군사들로 하여금 밥을 짓는 척 화구에 불을 피우라고 명했다.  승리를 확신했다가 적진에서 피어오른 밥 짓는 연기를 본 맹획군은 적잖이 당황하였다.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하기 위해 뜸을 들였고, 이는 제갈량에게 시간을 벌어 주었다. 나 역시 아군의 전쟁 물자가 떨어져 간다는 사실을 적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에프킬라를 마셔서인지 아니면 에프킬라 바람에 싸대기를 맞아서인지 잠시 비틀거리는 바선생에게, 나에게는 끝도 없는 에프킬라 보급부대가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잽싸게 방으로 들어가 한국에서 가져온 손풍기를 최고 강도로 틀었다. 에프킬라 분사에 강풍이 더해지자 바선생은 꽤 당황한 것 같았다. 내 검지 손가락이 휘는 한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해보자는 마음으로 에프킬라가 바닥을 보일 때까지 바선생과 대치했다. 바선생은 결국 뒤집어졌고 (왜 꼭 뒤집어지냐, 징그럽게), 나는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보이스톡 너머 실시간으로 듣고 있던 짝꿍은 나에게 가드를 내리지 말라고 조언했다. 지금이 가장 위험할 때라며, 바선생은 잠시 기절한 것 뿐일 테니 얼른 휴지부대를 투입하여 수중전으로 전투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했다 (덧: 그의 전공은 군사개혁이다). 아아... 도저히 뒤집어진 바선생을 휴지든 뭐로든 붙잡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선명하게 보이는 바선생의 다리는 처음이었다. 뒤집어진 배의 가로 줄은 왜 그렇게 선명하단 말인가. 이전에 봤었던 독일 바선생은 정말 애교였다. 그들은 바닥에 붙어 다니기라도 하지, 미국 바선생은 정말 이름값을 하는지 체격조건이 너무나도 월등했다. 더듬이도 검은색 가느다란 나뭇가지처럼 굵고 튼튼했고, 뒷다리에서는 실제로 근육이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다리의 털(!!) 역시 아주 굵고 선명했는데, 털 한가닥 한가닥이 어지간한 여왕개미 다리만큼이나 굵었다. 


짝꿍에게 절규하듯이 외쳤다. 저걸 잡았을 때 살아나서 움직이면 어떻게 하냐고. 저렇게 선명한 배의 줄무늬를 내 평생 본 적이 없다고. 저걸 무슨 수로 잡냐고. 


짝꿍은 덤덤히 나를 설득시켰다. 처한 상황은 대단히 안타깝지만 때로는 혼자서 해결해야 할 때도 있다고. 순간의 안녕을 위해 쉬운 길을 택하면 더 어려운 상황이 닥친다고 말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저 미국 바선생이 지금은 기절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내 방으로 복수혈전을 벌이러 올 수도 있지 않나. 설령 저 미국 바선생이 임종을 맞이했다 하더라도 여기저기 소문이 나서 동료들이 조문하러 찾아왔다 내 방을 공격할지 알게 뭔가 ㅠ 


그래. 때려 죽여도 싫지만,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진심 미친년처럼 새벽 1시에 흐느끼다 웃다 울다, 별의별 소리를 다 내며, 휴지를 손에 감았다. 자원낭비 그딴 거 다 필요 없고, 지금은 최대한 내 손을 보호하고 정신건강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두루마리 휴지 한 롤의 절반을 풀어서 손에 감고 뒤집어진 바선생의 몸뚱아리를 잡았다. 별 느낌은 없지만 내가 이걸 붙잡고 있다는 사실이 몹시도 기괴했다. 변기에 던져 넣고 물을 어찌나 많이 내렸는지, 처음엔 파란색이던 변기물 색깔이 나중엔 물색으로 투명해졌다. 





바선생과의 대전투를 치르고 한 시간이 채 지났을까. 

에어컨을 풀로 틀었음에도 불구하고 땀에 흠뻑 젖었기에, 샤워를 하긴 해야 하는데 샤워하고 나오면 또 바닥에 뭔가가 있을 것만 같은 공포에 사로잡힌 채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던 그 찰나. 


이번엔 건물이 흔들렸다. 

바닥이 흔들거리고 마는 수준이 아니라, 건물의 창틀, 내 방의 모든 가전제품과 옷장 속 짐가방이 크게 덜컹거렸다. 와 나, 진짜. 가지가지하네. 


새벽 2시가 넘었지만 보나 마나 잠에서 깼을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 뿐 아니라 그녀의 두 딸도 잠에서 깨어 울고 있다고 했다. 서둘러 지진 관측사이트를 확인했더니, 역시 진도 6의 여진이 또 화롄에서 발생했다. 하아... 나는 방금 바선생과의 대 전투를 치렀다고 친구에게 알렸다. 지진도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더 애쓰지 말자고. 이미 할 만큼 했다고. 내 인내심의 바닥은 여기까지라고. 


폭풍검색으로 호텔을 찾아냈다. 이틀 뒤면 짝꿍이 대만을 방문해서 이 기숙사에서 며칠 머문 뒤, 다음 여행 장소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다 필요없어. 그냥 이곳에서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었다. 이제 끝. 아, 정말 끝. 


이어지는 미니 지진과 함께, 뜨는 해를 보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편집증 환자처럼 항균티슈로 닦고 닦고 또 닦고, 짐을 싸기 직전 바퀴벌레든 바퀴벌레 새끼든 무튼 살아있는 생명체는 없는지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짐가방을 닫았다. 엘베도 없는 건물 4층에서 겁나 큰 짐가방을 2개나 혼자 1층으로 내리려니 땀이 미친 듯이 쏟아졌지만, 괜찮았다. 나는 이제 문명화된 세계로 나아가는 중이다. 


지진을 함께 견디며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던 내 친구는 진심으로 나의 결정을 지지해 주었다. 마지막 1주라도 사람답게(?) 지내라며, 충분히 버틸 만큼 버텼고 더 이상 버티지 않아도 된다고 나를 도닥여주었다. 지난 2주 동안 지진과 바선생에게 시달렸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탓일까. 호텔 체크인을 한 후 약 12시간 동안은 주변 바닥과 벽에 있는 크고 작은 얼룩이 벌레로 보이는 듯한 환영에 시달렸지만, 하루 하고도 절반을 내리 잠만 잤다. 우연의 일치인지 여진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

절체절명의 순간, 정신줄을 부여잡고 전술을 마련할 수 있도록 단련시켜 준 나관중 씨에게 감사를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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