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제일 많이 먹거든요
다친 발목은 여전히 뻣뻣하여 멀쩡한 다른 발목보다 가동범위가 떨어지지만, 수영장에 한 번씩 갈 때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발목으로 물을 전혀 감아내지 못해서 바보 같았던 지난주를 뒤로 하고, 느리지만 제법 정상적인 꼴을 갖춘 flutter kick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정도 걸을 수 있게 된 이후, 지난 2주간 수영장에서 풀부이를 끼고 상체 연습만 했다. 지난주 수업도 상체 연습만 하다가, 코치가 "관절을 움직여서 혈류량을 늘려주는 게 회복에 더 도움이 된다 (aka. 조금 아파도 안 죽는다)"는 명언을 남긴 이후로 하체도 조금씩 쓰기 시작했다.
흔히 수영은 상체로 하는 운동이라고 한다.
모든 영법이 그렇겠지만, 특히 유선형 유지가 관건인 자유형과 배영에서는 상체의 역할이 75%인 반면 하체가 25%에 불과할 정도로, 상체로 해야 할 일이 훨씬 많다. 발차기는 그저 하체가 물에 가라앉지 않도록 지지해 주는 역할 정도 (물론 단거리는 이야기가 다르다. 상체도 하체도 모두 100%로 가동해야 하기에). 그래서 풀부이를 끼고 하는 상체 연습만 해도 어느 정도 운동량이 채워지리라 생각했으나,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물론 지난 2주간은 운동량을 줄여서 그랬겠지만, 이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상체만으로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가 분명 있나 보다. 1달 만에 kick drill을 했더니, 세상에, 100m도 채 가기 전에 허벅지가 뜨끈하다.
쳇, 나약해졌어.
"자, 오늘은 배영을 할 거야."
코치는 단 한마디만 던지고 무언가를 화이트보드에 죽죽 써 내려간다. 오늘의 운동량이다.
아휴...
썩 달갑지 않은 한숨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내 운동량의 9할은 자유형이었다.
고관절이 좋지 않으니 평영은 피해라, 허리가 안 좋으니 접영도 피해라. 의사들 말대로 차 떼고 포 떼고 나면 남는 것은 자유형과 배영뿐이다. 둘만 남은 상황에서 왜인지 배영은 재미가 없었다. 또 이유는 모르겠지만 배영을 한 후 어깨가 아픈 경우가 있다 보니 자연스레 뒷전으로 미루기 일쑤였다. 그러다보니 남은 것은 가장 만만한(?) 자유형. 교정도 자유형으로만 받고, 연습도 자유형으로만 하고, 그저 자유형 하나만 죽어라 팼다. 때문에 자유형과 나머지 영법 간의 실력 차이가 좀 난다.
올 여름 adult swim club까지만 해도 나의 자유형 편애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코치도 큰 기대가 없었던 것인지 자유형 테크닉 교정에 힘썼고 나머지 영법에는 큰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심지어 접영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학기 student swim club은 시작부터 달랐다. 첫날부터 IM(접, 배, 평, 자)를 시켰고 (공교롭게도 내 발목은 이 날 나가고 ㅠㅠ), 부상으로 결석한 2주의 훈련 프로그램은 모르지만, 아마도 매 주마다 다른 영법을 하나씩 가르치는 것 같다. 지난주는 평영, 이번주는... 배영!
요즘은 한국에서도 수영 초급반에서 배영을 먼저 가르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초급반은 일단 물에 대한 공포부터 없애고 물속에서 호흡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 중요한데, 간혹 이 단계에서 코를 물속에 담근다는 행위 자체에 큰 거부감을 갖게 될 수 있다. 그래서 아직 물과 친하지 않을 때 억지로 얼굴을 물속에 넣지 않아도 되는 배영부터 가르치는 강사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하지만 배영은 나에게 가장 어려운 영법이다. 독일병정 코치조차 접영이 아닌 배영이 가장 힘들다고 했으니, 나만 그런 것은 아닌가 보다.
얼굴을 물속에 넣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배영 호흡은 어렵다. 멍하니 수영장 천장을 바라보며 팔을 휘저었다간 내 팔이 만들어내는 물보라가 얼굴로 들이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행여 내 옆에서 누군가 가열하게 접영이라도 한다 하는 날에는, 누워서 수영장 물로 뺨 맞고 그 물을 그대로 마시는 거다. 참고로 입으로 마시는 물보다 코로 마시는 물이 50배 더 맵다. 결국, 코는 물 밖에 나와있다지만 배영에서의 호흡은 더 정교한 테크닉을 요한다. 코가 아닌 입으로 산소를 들이마시는 연습을 해야 하고, 코로는 숨을 그저 (짧게) 뿜어내야 한다 (넋 놓고 살살 뿜었다간 또 물을 먹는다). 이 모든 과정이 리드미컬하고도 신속하게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영을 했을 뿐인데 뱃속에 물이 가득 차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내가 배영을 한 후 어깨가 뻐근한 이유는 아마도 롤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일 확률이 높다. 자유형에서처럼 배영도 스트로크를 하는 팔의 방향에 맞춰 상체를 돌려주는 동작이 중요한데, 그동안 배영을 멀리하다 보니 이 연습이 거의 되어 있지 않았다. 상체를 수면과 평평하게 고정한 채 양팔로 노를 젓듯이 스트로크를 하다 보면 어깨가 후방으로 과하게 꺾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배영은 생각보다 팔을 빨리 저어야 한다. 간혹 수영장에서 유유히 배를 뒤집고 떠다니는 수달 영법을 구사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데, 이 복잡한 세상과 잠시 단절한 채 물 흐르듯 세상을 살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갖는 데에는 이 만한 훈련이 없다. 하지만, 코치들은 우리가 그렇게 태평하게 나자빠져 있는 꼴을 볼 수 없다. 그야말로 풍차 돌아가듯, 한 팔이 천장을 향해 뻗어있을 때 다음 팔은 벌써 물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해야 한다. 그 속도가 생각보다 빨라서 얌전하게 물보라를 일으키지 않는 수영을 하기란 불가능하다. 호흡법과 팔동작 모두 어느 정도 숙련이 되어 편안한 상태가 되어야 실력도 늘텐데, 배영이 달갑지 않은 내 상태에서는 어깨만 죽어라 용을 쓰며 뱅글뱅글 돌아가게 된다. 아무리 뻣뻣한 내 몸에서 가장 유연한 곳이 어깨라고는 하지만 그 정도로 회전하면 어깨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다치기 싫어서 배영을 멀리했다는 뭐 그런 이야기...
수영도 다 같은 수영이 아닌지라, 자유형으로 단련된 근육은 그저 자유형을 위한 것이다.
배영을 위한 근육, 평영을 위한 근육이 조금씩 다른 관계로, 다 같이 물에 빠져서 하는 운동이지만 영법에 따라 부익부 빈익빈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즉, 잘하는 건 쉽고 접근성이 높다는 이유로 더 많이 할 테니 더 잘할 것이고, 못하는 건 어렵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멀리 할 테니 더 못 할 수밖에. 그래서 성장(?)에는 어느 정도 강제가 필요한 법인가 보다. 독일병정 코치 앞에서는 배영 싫다고 찡찡댈 수 없으니 말이다. 으흑.
처음엔 풀부이를 끼고 허우적댔지만, 자유형도 아니고 배영에서, 즉, 내가 물잡이도 잘 못하는 영법에서 하체를 고정시켜 버리니 정말 꼴이 우스워졌다. 코치가 나를 멈춰 세웠다. 풀부이가 문제가 아니고 롤링이 안 되니까 상체를 돌리라고. 그리고 물속에서는 high elbow를 한 채로 팔을 내리라고. 나도 머리로는 알지만 아직 몸이 머리의 지시를 잘 이행하지 못하는 중이다. 자유형 팔 동작을 반대로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는데 당최 그게 무슨 말인지... 결국 풀부이는 던져버리고 약간의 뻐근함과 찝히는 느낌이 남아있는 발등을 무시한 채, 일단 '나 살려라' 영법을 구사한다. 롤링, 사이드킥, 그리고 배영에서 평영으로 이어지는 턴까지 연습을 한 뒤 semi-IM (배영, 평영, 자유형)을 시킨다. 벌써 어깨가 또 뜨끈하다.
벽에 걸린 전자시계가 60분이 넘었음을 알리자, 어딘가 들떠 보이는 코치는 가장 어려운 배영을 넘겼으니 다음주는 full IM (접, 배, 평, 자)를 할 수 있겠다고 노래하듯 말한다. 한 학생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말을 더듬었다.
"나, 나... 접영 못하는데..."
코치는 배우면 된다고 걱정 말라며 happy halloween을 외치곤 쿨하게 퇴장해 버렸다.
다음주는 접영인가보다...
스포츠 채널 이런 곳에서 격한 운동을 하고 냉수로 샤워를 하면 근육 염증을 줄일 수 있다는 정보를 본 것 같다. 금방 내 몸이 마시멜로처럼 녹아내릴 수 있는 hot tub을 외면하고, 도닦는 수도승처럼 냉수 샤워대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추위를 세상 많이 타는 애가 냉수 마찰을 하고도 열이 뻗쳐서 이 날씨에 아이스 음료를 사 먹고 어깨에 덕지덕지 파스를 붙인 채 끄적이는 수영 일지 정도쯤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