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행군은 어쩌면 매우 손쉽게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었어요.
흔히 유학 패키지로 불리는 GRE (별칭 '지랄이'), SOP, writing sample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토플 점수도 애저녁에 만료되어서 없었거든요. 그 와중에 지도교수님 수업 조교도 하고 있죠 (7-80명 분의 중간고사 & 기말고사 에세이 채점을 제가 합니다), 제 대학원 수업도 듣고 있죠, 공저 논문도 써야죠, 진짜 불안 사고회로가 미쳐 돌아가기 딱 좋은 환경인데, 제가 이걸 모르고 덜컥 "네, 유학 준비해 보겠습니다" 했던 거였어요.
영어 점수만 해도 어느 정도 고득점이 나올 때까지 계속 시험을 치는 경우가 많았고, 거기에만 할당할 시간이 필요해요. SOP는 Statement of Purpose의 줄임말인데 보통 1-2장짜리이지만 거의 몇 개월간 준비하는 경우도 많아요. 내가 해당 학교를 지원하는 이유, 어떤 연구를 할 것인지, 지금 내 역량은 어느 정도인지, 등을 아주 설득력 있지만 간결하게 써야 합니다. 논문과는 성격이 아주 달라서 지나치게 지엽적인 이야기를 하면 안 되지만, 큰 줄기를 건드리는 동시에 구체적이어야 해요 (아오, 스트레스). Writing sample은 이미 석사 논문이 있다면 그걸 어느 정도 수정해서 내거나, 출판된 논문이 있다면 그걸 내기도 하죠. 아, 물론 저같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은 매 서류마다 값을 지불하고 전문 proofreading을 받아야 합니다. 추천서는 보통 3장인데, 이것도 교수님들마다 선호하는 방식이 달라서 학생에게 letter material을 다 준비해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본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쓰시는 분도 계세요. 주로 노교수님들은 전자를 선호하시지만 정말 케바케입니다. 추천서는 잘 써줄 사람에게 가야 해서 단순히 그 교수님 수업에서 성적 좀 잘 받았다고 부탁할 수도 없고, 본인 제자가 유학 준비를 할 경우 써야 할 레터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사람도 있고, 가지각색입니다. 유학 준비 과정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불확실성의 연속이에요. 카오스 그 자체.
이 모든 것이 단 한 문단으로 요약될 정도로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매 단계 단계는 신경 쓸 것도 너무 많고 알아볼 것도 너무 많고, 정말 말하자니 구차하지만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는 요인들이 정말이지 너무나 많았어요. 이 '패키지'가 잘 준비되어 있어도 힘든데, 저는 저걸 준비하면서 수업에 조교에 공저 논문까지 하려 하니 말 그대로 미쳐 돌아버리겠더라구요. 준비가 잘 안 되는 것도 힘들지만, 제대로 준비를 못 하고 있는데 시간만 가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은 진심으로 힘들었어요. 제가 봐도 거지 같은 퀄리티의 결과물을 교수님께 갖다 보여야 하는 것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고역이었습니다. Red Bull을 달고 살았고, 얼굴이 매일 잿빛일 수밖에 없었어요. 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숱한 고민과 마음앓이 끝에, 제대로 준비해서 다음 해에 지원하기로 결론 냅니다.
제가 고난의 행군이었다고 이미 말씀드렸죠.
그 다음해 여름, 갑자기 급성 우울증이 찾아왔어요. 생전 처음 겪은 우울증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때 알아차렸어야 했어요. 제가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큰 일을 겪으면 그 여파가 바로 오지 않고 6개월에서 1년 뒤에 "왘"하고 찾아온다는 것을. 그 이후에도 이런 지연반응을 2-3번 더 마주했거든요.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 제 멘탈은 땡땡 부어올라 터지기 직전이었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방의 바늘만 있으면 뻐벙 폭발할 상태였을 겁니다. 뒷목이 너무 결린 나머지 길바닥에 주저앉아 헛구역질을 하던 어느 날 대낮이었습니다. 물리치료를 받으러 갔던 정형외과 앞에서 엄마와 통화를 하다 그 '바늘'을 맞이합니다.
참고로 저는 징징이가 아닙니다. 투덜이가 될지 언정, 징징이와는 거리가 멀어요.
서울로 보내면서 "네 삶은 이제 네가 책임져야 한다"라는 말을 무겁게 포장해서 양손 가득 들려주신 아빠 덕분에, 그리고 타고난 기질과 성격 때문에, 어지간히 거지 같은 일이 있지 않고서야 부모님께 미주알고주알 전하지 않았어요. 말해봤자 해결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사람들 걱정만 시킨다는 것이 제 나름의 합리화였습니다. 그런 제가 그날은 길거리에 주저앉아 헛구역질을 하며 마음이 약해진 것이 분명합니다. 엄마에게 투정 섞인 하소연을 했겠죠.
자식 문제라도 늘 객관성을 잃지 않는 부모님들이 계시죠. 그게 저희 어머니였습니다. '괜찮다'라는 위로보다는 '너의 문제점은 이런 것이고, 이런 해결 방안이 있다'라며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그런 분이셨죠. 제가 가끔 미래에 대한 걱정을 가불 해서 하고 있으면, '다 잘 될 거다'라는 위로 대신, '걱정 당겨서 하는 것 아니다' 혹은 '오늘 일에 충실해라'는 말로 제 불안을 종식(?)시켜 주셨답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에게서 으레 볼 수 있듯,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 섞인 한탄도 일절 하지 않으셨고요.
그런 엄마가 그날은 좀 달랐습니다. 자식이 맨날 시험이다 뭐다 공부만 하다가 뒷목이 너무 아파 토하고 있다고 하니 속상해서 하신 말씀이겠지만, 엄마는 왜 그날 그 말씀을 하셨고, 그 말은 왜 저를 그렇게 깊은 심연으로 끌어들였을까요 (참고로 부모님은 이 말의 여파가 그렇게 컸다는 것도, 제가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것도 모르십니다). 한참 정적을 유지하던 휴대폰 너머에서 어떤 말풍선 하나가 터져나옵니다. "어휴,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공부시키지 말고 취업이나 시킬 걸 그랬나 보다." 우와, 엄마는 역시 능력자였어요. 단 한 마디 말로 일타 4피 정도는 하신 것 같았거든요. 그 말풍선은 귀를 통해 뇌로 흘러들어가며 생각의 소용돌이를 만들었고, 이는 곧 쓰나미가 되어 저를 덮쳤습니다. 그 말을 소화할 시간도 없는데 내 안에서 엄청나게 많은 감정 회오리가 몰아치는 그 느낌, 아시나요.
쉴 새 없이 사고회로가 돌아갑니다. 저게 다 무슨 말이지? 공부가 내 의지에 의해 시작된 게 아니라는 건가. 취업을 '시키면' 내가 시키는 대로 따라간다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까지 공부한 결과가 눈에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지난 내 노력을 다 부정하는 말인가. 그래도 내가, 지금, 뭔가를 해보겠다고 하는데, 취업'이나' 시킨다는 건 나를 무시하는 건가. 취업은 쉽다고 생각하는 건가...??!!
압니다. 엄마는 잘못이 없어요. 단지 그 일이 일어났을 때 거기 있었을 뿐이고, 그 때 제 상태가 좋지 않았을 뿐이란 것을 지금은 압니다. 하지만 그 때는 성숙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저의 감정적, 심리적 메커니즘에 대해 아주 무지한 상태였습니다. 어떻게 통화를 마무리했는지 모르겠어요. 크게 화를 냈던 것 같기도 하고, 뭐라 반박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저 기억이 희미합니다. 다만, 갑자기 마음이 크게 가라앉으면서, 나 자신이 매우 초라해지면서, 세상이 조금 고요한 것 같기도 하면서, 그렇게, 그렇게, 식음이 저절로 전폐된 기억은 납니다. 평소라면 데드라인에 절절매던 저인데, 이 때는 교수님께 보내야 할 draft가 있다는 것 따위 중요치 않았습니다.
그 여름은 사실 기억이 잘 안 나요. 참 더웠다는데 저는 에어컨 켤 생각도 못 하고 칩거했거든요.
일주일 넘게 나를 둘러싼 주위가 침잠하는 것 같은 느낌에 절어 있다가 대만으로 놀러 간 친구의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대만 현지인 친구의 집에 놀러 간 제 한국인 친구가 저를 초대(...?) 한 것인데, 여하간 저는 두 번 생각할 겨를 없이 다음날 뜨는 비행기를 검색해서 대만 남쪽지방으로 갑니다. 저의 첫 대만 여행기였어요.
대만 현지인 친구가 망고 농장주의 딸이었던 덕분에 망고 씨를 말릴 기세로 따 먹으며 놀다 왔지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어요. 잠깐의 여행으로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저의 큰 오산이었습니다. 상태는 점점 더 나빠지기만 했고,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살면서 처음으로 했던 것 같아요. 그까짓 일이 무슨 대수냐고 그렇게 나자빠지냐고 물으시면 아직도 답은 못 하겠어요. 그 이후에 더 힘든 일도 종종 있었지만, 당시 내 온몸을 지배했던 '희망이 없다'는 느낌은 지금도 생경합니다. '죽어도 상관없다'라는 결론은 쉽게 내릴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조건만 갖춰지면 아주 어렵고 무거운 마음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지금도 '죽고 싶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유심히 봅니다. 정말로 이 세상에 선택지가 '죽음' 밖에 없다면 내가 그걸 말릴 권리도 방법도 없지만, 혹시 '죽음'이라는 단어 뒤에 '힘듦'이나 '절망'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해서요.
학교에서 제공하는 무료 심리상담센터를 갑니다.
검사를 하고 4-6주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했었는데, 3-4일 만에 연락이 왔어요.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으니 바로 상담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그리고 상담 2회 차,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집에서 가까운 피아노 학원을 찾아갑니다. 성인 레슨 위주의 학원이었고 원장님이 마음에 들어서 바로 레슨을 시작하기로 했죠. 그렇게 저는 짝사랑하던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그 이후 1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피아노에 열정을 쏟았어요. 학교에서 유학 준비를 하다 속이 터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레슨실을 찾아 혼자 건반을 갈겨댑니다. 피아노에서 손을 놓은 지 10년이 지났었지만, 열정을 갖고 두들겨대니 금방 감이 돌아왔어요. 무슨 이유에선지 원장님은 저를 좋게 봐주셨고, 그 덕분에 아마추어 연주회도 참가하고, 늘 배워보고 싶던 곡도 심도 있게 다뤄보고, 아마추어 성인 피아노 콩쿠르에서 입상도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상은 '참가상' 같은 겁니다. 큰 의미가 없어요). 전문 피아니스트가 아닌 일반인의 피아노 연주회나 콩쿠르가 의미가 있어봤자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래도 연습하는 시간이 좋아서, 연습으로 나아지는 내 모습이 보기 좋아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유학준비를 하는 것보다는 자기 효능감을 얻을 수 있어서, 그저 피아노를 다시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연습실 출근도장을 무던히도 찍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연주회나 콩쿠르이지만 나에게 뿌듯하고 싶어 손톱에서 피가 날 때까지 연습했어요. 저를 참 신기하게 생각하신 원장님과 다른 학원생들과도 친해졌고 오랜만에 술을 엄청 먹어댄 기간이었네요. 그렇게 그놈의 유학에 대해서 잠시 거리를 둘 수 있는 시간을 잘 보내고 나면, 어떤 일부터 해야 할지 조금은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자 무료 상담도 끝이 났어요. 나를 지탱해 주던 상담이 없어진다니 조금은 겁이 났지만, 홀로서기를 해야죠. 여름 내내 지도 교수님께는 일언반구 말을 하지 않고 정상적(?)인 척 연기를 했습니다. 겨우내 어렵게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준비를 했지만, 지원한 학교에서 연락이 오지 않거나 waitlist에 올라있다는 연락만 받았어요. 크게 실망스럽지도 않았어요. 어차피 제 상태를 제가 잘 알고 있었고, 그 정도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원서를 '뿌렸'거든요. 선생님도 크게 실망한 기색 없이, 어차피 갈 유학이라면 실적이나 더 만들자며 영문저널에 낼 공저와 석사 논문을 먼저 해결하기로 합니다.
인생은 늘 예상치 못한 일의 연속이라죠. 그 해 겨울을 장식한 공저 덕분에 연구에 대한 희열을 짧게 맛봤습니다. 그 찰나의 불꽃같은 희열감 때문에 연구를 계속해야겠다고 마음먹었나 봐요. 지금 생각하면 참 귀여운 수준의 논문이지만, 데이터를 어설프게나마 직접 모으고 가설을 만들고 그걸 지도교수와 함께 말이 되게끔 만드는 작업이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물론 출산의 고통도 컸어요. 마지막 마무리할 때에는 새벽 3-4시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과 통화를 주고받으며 수정을 했거든요. 신경줄이 너덜거리는 느낌이었지만, 무언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그 느낌에 벅찬 감동을 곁들인 와인 한 잔을 냅다 원샷했던 기억이 납니다. 결과물보다 과정이 더 기억에 남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다음 해 여름.
별안간 뉴욕에서 인턴쉽 공고가 났고, 저는 아무런 전략적 계산 없이 지원했어요. 그냥 가고 싶었거든요. 지도교수님은 그 시간에 SOP이나 writing sample이나 보강하지,라고 하셨지만 저는 그냥 뉴욕을 꼭(!) 가야겠어서 지원했고 합격했습니다. 심지어 석사 논문 디펜스를 하고 며칠 뒤에 바로 뉴욕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 빠듯한 일정이었습니다. 디펜스 후 최종 수정한 원고를 논문으로 찍어서 도서관에 제출해야 했었는데, 최종 수정은 뉴욕에서 밤새가며 마쳤고, 도서관 제출은 후배에게 부탁해서 겨우 마칩니다.
뉴욕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부터 뉴욕행 비행기를 타는 날까지 "Empire State of Mind"를 주야장천 들었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vk6014HuxcE). JFK 공항에 내려 맨해튼 도심으로 들어갈 때의 설레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해서 유리병에 평생 간직하고 싶을 정도였어요. 다행히 좋은 하우스메이트들을 만나 물가가 미쳤다는 뉴욕에서 굶지도 않고 아주 잘 놀았습니다. 인턴쉽을 했던 기관의 디렉터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나중에 추천서도 받을 수 있었고요. 현지 재단에 계신 분들과 여러 고마운 분들이 물심양면 도와주셨고, 다양한 이야기와 경험을 나눠주셨어요. 그러면서 유학에 대한 내적 동기부여가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넓은 세상으로 나와서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같이 했죠.
인턴쉽이 끝나고 뉴욕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펑펑 울면서 왔습니다. 제 사랑을 듬뿍 남기고 온 도시였기에, 박사 공부를 그곳에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이번에는 마음가짐부터 달랐어요. 제가 하고 싶은 연구에 대해 나름 뚜렷한 청사진을 그릴 수 있었고, 꼭 가야겠다는 마음이 이를 뒷받침해 주었거든요. 정량적 지표로 봐도 내세울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졌답니다. 이전 화에서 말한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 걸린 시간'의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음이 느껴졌습니다.
지원은 여차저차 마쳤지만 도저히 결과를 맨 정신으로 기다릴 자신이 없었어요. 서울 도심의 한 연구기관에 덜컥 지원했고, 또 덜컥 합격합니다. 개인적인 일정이 꼬인 바람에 예상보다 일찍 퇴사를 하긴 했지만, 결론만 놓고 보면 잘한 선택이었어요. 일단 연구소 일이 바빠서 합격 소식에 24시간 레이더를 세우고 있을 겨를이 없었거든요. 때마침 복싱과 중국어를 시작했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또 다른 공저 논문을 써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이것도 좋은 경험이었어요. 일과 공부를 병행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점을 몸소 깨달았거든요. 그 이후로 저는 절대 멀티태스킹을 하지 않기로 굳게 다짐합니다.
해가 바뀌고 날이 조금씩 따뜻해지면서 슬슬 소식이 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대학 중 한 곳에서 합격 소식을 받았어요. 이후에도 2-3군데 정도 더 연락이 왔던 것 같은데, 최종적으로는 '전지훈련지'를 뉴욕이 아닌 캐나다로 삼게 되었죠. 이 과정에서 가장 크게 느꼈던 감정은 '안도감'이었어요. 기쁘거나 뿌듯하다기보다는, 그저 안도감이 무척 컸어요. 뉴욕 인턴쉽에 합격해서 갈 날만 기다리며 "New~ York~" 노래 부르고 다닐 때에는 정말 내가 곧 Jay Z가 된 것 마냥 신이 났었거든요. 그런데 박사 합격 소식은 그런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몇 년 간 불확실로 가득하던 제 삶이 어느 한 방향으로 결정되었다는 점 덕분에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는 것만 기억에 남네요.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느끼셨겠지만, 저는 처음부터 박사 공부 자체에 엄청난 뜻을 부여하며 시작한 것이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박사를 생각하는 것은 고사하고, 학부에서조차 이 전공을 오래도록 공부해서 박사 학위모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물론 나이가 들면 어느 분야에서 전문성을 지니며 일하고 있겠거니, 라는 막연한 생각은 했지만 그 방법을 박사로 국한시킨 것은 아니었거든요. 가끔 석사생 중 '확신의 박사형'을 볼 수 있는데, 저는 따지자면 그 유형도 아닙니다. 어쩌다 박사 유학을 떠나게 되었지만, 대단히 큰 포부를 안고 유학길에 오른 것이 아니에요. 박사 공부를 해야 할 이유조차 입학 전 확실하게 찾은 것이 아니라,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서서히 깨달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헐렁하게 박사를 시작한 건 아니었습니다. 시작할 땐 저도 저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을 거잖아요? 저는 미련하디 미련할 정도로 세부적인 부분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는데,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이러이러한 모습의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청사진은 매우 명확하고 자세하게 그리면서 시작했어요. 어쩌면 제가 바라는 자아상에 대한 갈망이 박사에 도전해 보게끔 그리고 지금까지 버틸 수 있게끔 해 준 유일무이한 원동력이 아닐까 싶어요.
그럼 '네가 원하는 자아상이 뭐냐' 싶으시죠?
저는 제가 세워놓은 목표에 도달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제 정체성의 아주 큰 부분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 목표가 반드시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더라고요. 비교에서 아주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궁극적으로 화살의 끝은 제 자신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피아노 콩쿠르에서 이 정도는 치자', '자유형을 이 정도로는 하자'와 같은 목표에서 '이 정도'란 정량화 이상의 그것 - 결국 자기만족이라고 생각해요. 여담이지만 제가 요즘 학교에서 수영 강습/훈련반에 참가 중인데, 어느 날 제 상담사가 묻더라고요. 그건 왜 시작하게 되었냐고. 그리고 우리는 통달(mastery)에 대한 저의 욕망을 그 대답으로 추려냈습니다. 네, 저는 제가 '잘'하는 모습을 다른 누구도 아닌 저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아무리 자기만족이라지만 '잘'이라는 것은 보통 결과값을 의미합니다. 성취나 성공이라는 단어로 치환될 수 있을지도요. 하지만 성취와 성공을 동일시하면 안 되겠죠. 성취는 결과 지향적이고 성공은 목적 지향적입니다. 박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저는 성취에 좀 더 경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쓸데없이 힘들었지요). 하지만 박사 과정을 거치면서, 향후 제 삶의 목적이 반드시 어떤 자리, 직위, 그리고 이름으로 귀결되게 놔둘 생각은 없음에 확신을 더 할 수 있었어요. 앞으로 펼쳐질 여러 종류의 '훈련과정'을 통해 오랜 시간 벼리고 추려낸 확신의 집약체라고 할까요. 제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지향점이자 자아상은 결국 '통달 (mastery)'이었습니다.
자, 그 이야기는 또 차차 해 볼게요.
다음 주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