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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이 Nov 10. 2024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나요?

당연히 박사는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이토록 오래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분들은 종종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공부가 재미있나 봐요"

"박사가 꿈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공부 엄청 잘했겠어요" 등등.


속 시원하게, "예, 저는 밥 먹고 공부만 해도 삶이 충만하고 행복합니다"라는 대답을 들려드릴 순 없을 것 같네요. 그에 덧붙여, "예, 저는 살면서 늘 1등을 놓치지 않았고 2등이란 게 뭔지 도통 알 수 없습니다"라는 대답도 물 건너갔어요. 


공부는 막 미친 듯이 재미있지 않습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으면 큰일 난 거라고.  

어릴 때엔 다른 꿈이 있었지만, 능력이 안 되어서 일찌감치 포기당했거나, 포기했고요. 

공부만 놓고 보자면, 제가 기를 쓰고 아무리 잘해봤자 월등하게 잘하는 혈육이 옆에 있어서 성장기 내내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을 살았어요. 


네, 맞아요. 언론 매체에서 보는 '박사감'들 있잖아요. 영재, 천재, 등등. 누가 봐도 쟤는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학문에 정진하도록 해야 인류의 미래가 밝을 것 같은 그런 사람들요. 저는 그런 과가 전혀 아니었어요 (차라리 제 혈육이 그런 쪽에 더 가까웠습니다). 박사는 어쩌다 보니 하게 되었고, 시작했으니 그저 이 길의 끝에서 매듭을 짓고자 하는 거예요. 정말, 그저. 


그렇다면, 공부에 큰 뜻도, 큰 재능도 없다면서 박사는 어쩌다가 하게 된 건지 궁금하실 수 있겠어요. 게다가 보통 사람들이 유학 나가는 시기에 비해 저는 4-5년 정도 늦게 나왔거든요. 그럼 그건 왜 또 늦어졌는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요. 다른 브런치 일기장에서 토막으로 끄적인 적이 있지만, 이렇게 시계열 분석(ㅋㅋ)을 해보는 건 처음입니다. 




어릴 적 꿈 이야기부터 할까요. '꿈'이라니 뭔가 거창하지만, 또 '꿈'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일단은 제가 많이 좋아했던 대상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저는 아주 잠깐 피아니스트를 꿈꿨습니다. 하지만 전문적인 훈련을 받고 예중, 예고 진학을 희망하는 그런 축에 속하진 못했어요. 시작은 빨랐습니다. 4살이면 꽤 어릴 때 시작한 편이거든요. 손이 작아서 금방 포기하겠거니 했던 아이가 곧잘 따라 하니 부모님께서 여러 지원도 해주셨지만, 저는 엄청나게 재능이 있던 아이는 아니었나 봐요. 그냥 막연하게 피아노를 시작했고, 연주회를 여는 우리 피아노 선생님도 멋있고, 그럼 나도 피아니스트 너굴이로 불리면 어떨까, 그 정도의 1차원적인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귀엽네요. 


캐나다에 와서 보니 아이들이 secondary에 (덧: 한국으로 치면 중/고등학교) 진학하고도 운동이며 악기는 하나씩 계속하더라고요. 부러웠어요. 저는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유로 어느 시점부터 레슨을 종료당했거든요. 삶을 훨씬 더 많이 살아본 '인생 선배'들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전도유망한 피아니스트가 되기엔 재능이 모자란 것 같으니 더 늦기 전에 시간/돈 낭비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흔히들 예체능으로 성공하는 것이 공부로 성공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들 하잖아요.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성공하기 '쉬운(?)' 공부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나요. 좋은 학벌로 규정되는 '성공'에 대한 1차 방정식은 한국에서 모두의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드는 엄청난 힘이 있나 봐요. 지금이라면 그 '인생 선배'들에게 당돌하게 물어볼 텐데. 하지만 아직 확고한 자아상을 갖기엔 너무 어렸고 경제력 능력도 없었던 11살의 저는 감히 이렇게 묻지 못했습니다. 


"잘하지 못해도 그냥 계속하면 안 되나요?


예... 안 되나 봅니다. 안타깝지만 그 당시 시대상으로 보건대 혹은 제 주변 '인생 선배'들의 가치관으로 보건대, 조성진이나 임윤찬이 될 깜냥이 아니라면 잘하지 못하는 것을 '그냥 계속'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선택지였어요. 어른이 되고 제 돈으로 레슨을 받으면서도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내가 좀 더 재능이 있었다면 피아노를 계속할 수 있었을까? 한국이 아니라 캐나다였다면? 아니, 한국에서도 미국처럼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예체능 요건을 갖추는 것이 엄청나게 중요하다면, 계속 레슨을 받을 수 있었을까? 아직도 레슨 마지막 날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를 드리지 못한 채 울멍울멍한 눈으로 선생님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저를 기억합니다. 그 후 약 15년 정도, 부모님이 집에 계실 때에는 피아노 쪽으로 눈도 돌리지 않았어요. 혼자 있을 때만 피아노를 치다가, 부모님이 외출에서 돌아오시는 소리가 나면 황급히 뚜껑을 덮었습니다. 그분들도 억울하실 거예요. 희생정신으로 자식 교육에 매진했고 주어진 여건 하에서 최선의 선택과 집중을 했을 뿐인데 말이죠. 

피아노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할 때가 있을 테니 투정 섞인 하소연은 이쯤 할게요. 




고등학교는 이과로 다니고 재수를 하면서 문과로 전과한 저는 동시통역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외국어를 좋아했고 나름 잘하는 편이었거든요. 당연히, 정치학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어요. 게다가 고등학교에서는 물리, 화학, 생물 등의 기초/심화 과목만 배웠기 때문에 정치학과 관련된 수업을 들은 적도 없었고요. 수능을 치고 원서 지원 시점이 다가오니 '진로 상담'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 다 알잖아요? 대단히 큰 뜻이 있지 않고서야 내가 받은 점수에 맞춰서 최대한 상위권에 위치한 학교와 전공을 선택하는 것이 '진로 상담'의 정의라는 것을. 다만, 당시엔 세부 전공으로 바로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과대로 지원한 후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큰 줄기만 잡고 지원하는 방식이었어요. 법학, 경영학, 사회과학, 뭐 이런 식으로요. 


지원서를 만지작 거리던 어느 날, 당시 저를 오래 가르치셨던 논술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십니다. 


"너굴아, 너 정치외교학 이런 거하면 진짜 잘할 것 같은데."  


쓰고 보니 다소 점쟁이의 점사 같은 표현이네요. 당시 그 선생님은 글쓰기를 잘 지도하기로 소문난 분이었고, 학생도 가려 받았으며, 결정적으로 학생들의 적성과 재능을 기가 막히게 잘 파악하기로 유명한 분이었어요. 호랑이같이 엄격한 선생님이었지만, 제가 대입 과정에서 잠시 방황할 때 누구보다 따뜻하게 조언을 건네신 분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두통이 30분 만에 씻은 듯이 낫는 기적을 경험했답니다). 저희 어머니께 "너굴이 고집이 대단한 건 아시죠?"라고 하실 만큼 저를 지도하시면서 여러 애로사항이 있으셨던 듯했지만, 제 글쓰기의 이상한 아집을 많이 고쳐주신 분이셨어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 선생님을 꽤 따랐었고 그 분의 조언을 받잡아 사회과학 계열로 진학합니다. "힝, 저는 외국어가 좋은데요" 했더니, "외국어는 다른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잘할 수 있어!"라고 하시더군요. 뭐, 그래요. 결론만 놓고 본다면 그분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그렇게 대입을 겪으며 저는 인생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오솔길과 같음을 깨닫게 됩니다. 


대학을 서울로 가게 되었으니 부모님으로부터의 독립은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이었어요. 저에게 서울은 오랫동안 갈망하던 자유의 땅이었습니다. 내가 드디어 그 땅으로 가다니. 무한한 자유에 감개무량하여 주체할 바를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날뜁니다. 첫 해는 많은 신입생들이 그러했듯 저도 미친 듯이 술을 먹고, 토하고, 나사 빠진 것처럼 놀고, 시험기간에만 벼락치기해서 성적 받고, 또 술 먹고 토하고, 가끔 뭐 해 먹고살지 고민하고, 그러다가 다시 연애 고민으로 돌아오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전공 선택 전 맛보기로 여러 학과의 과목을 들어야 했는데, 큰 이변 없이 정치학이 가장 재미있었어요. 오히려 그놈의 물리, 화학, 생물보다 훨씬 쉬웠고 직관적으로 이해가 잘 되었어요. 글로 뭔가를 써 재껴서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었고요. 그래도 나름 진로 탐색을 한답시고 경영학과 수업도 듣고, 행정학과 수업도 들어봤지만, 도무지 재미가 없어서 둘 다 선택지에서 지웠어요. 로스쿨은 법이 너무 지겨워서 생각도 안 했고요. 이렇게 돈을 버는 학문에서는 점점 멀어져 가네요 (과거의 저에게 귀띔이라도 해 주고 싶군요...). 




지금 제가 20살, 21살 학생들을 보면 참 어리다는 생각부터 듭니다. 

뭐든 할 수 있는 나이임이 분명하고, 어떤 선택을 해도 실패란 없을 것 같은 나이입니다.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고요. 하지만, 시험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기에 급급한 경로를 걸으면, 다음 목표도 시험으로 결정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찾아오나 봅니다. 저를 포함하여 숱한 20살배기 동기들의 '진로 고민'이라는 것도 사실은, '어떤 종류의 시험을 쳐서 인생을 결정할까'의 문제였지, 정말 다양한 경험을 쌓고 견문을 넓히겠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예요. 저와 제 주변의 일부 샘플에 한한 이야기입니다). 캐나다에 와서 제가 학생들을 가르쳐보니, 이런 부분이 훨씬 더 잘 보이더라고요. 오히려 시험으로 무언가가 결정되는 인생 경로를 걷는 아이들의 비중이 낮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그 시절의 저와 제 친구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험으로 많은 것이 결정되는 사회에서는 점수를 잘 받는 방법 외의 전략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도 사치이고, 그럴 경험도 현저히 적죠. 


저는 결국 또 다른 종류의 시험으로 인생을 결정해 보기로 마음먹은 1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대학생이라면 교환학생 한 번쯤 다녀와야지'라는 유행이 널리 퍼진 시기라 저도 자연스레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눈을 돌렸지만, 이내 접었어요. 어차피 시험으로 인생을 결정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면 1년씩 외국에서 시간 낭비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 '인생 선배'들의 중론이었고, 저도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마음을 먹은 이후에는 실천이 매우 빠른 편이라 바로 휴학을 한 후 신림동 고시촌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술도 끊고 사람도 끊고 그렇게 독서실에 처박혀서 살았어요. 친하게 지내든 학부 친구들이 모두 각양각색의 시험을 준비한다고 고시 라이프를 시작했지만, 저는 친구도 만나지 않았어요. 사람 좋아하는 제가 사람 만나 술 먹고 마음이 흐트러질까 봐 두렵다는 이유에서였죠. 몇 년이 걸리든, 제가 스스로에게 허락한 기간 동안은 '동굴에서 쑥과 마늘만 먹는 호랑이와 곰처럼 살아보자'라는 각오를 다지며 살았습니다. 고시촌에서 한 동안 시간을 보내고 복학 후 학교에서도 한 동안 시험 준비를 했어요. 시험공부를 하다 보면 느낌이 와요. 아직은 준비가 덜 되었다, 올해는 해볼 만하겠다, 와 같은 종류의 느낌이 옵니다. 저는 그걸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결국 내가 합격할 준비가 되었냐 아니냐는 매일같이 공부하며 나를 관찰했던 제 자신이 잘 안다는 뜻이죠.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 에피소드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아니었어요. 저의 자만이었겠지요. 스스로에게 약속한 시간 동안 자신감은 얻은 것 같았는데 인간이 되지 못했거든요. 웅녀가 되지 못한 저를 덮친 감정은 매우 복잡다단했습니다. 열심히 하지 못했던 나날들과, 내가 했어야만 했는데 하지 못했던 것들이 끊임없이 떠올랐어요. 마음이 흐트러졌던 날들, 슬럼프가 찾아온 날들, 대충 지나쳤던 교과서의 어느 한 페이지, 시험장에서 실수한 것들, 제가 만들어낸 징크스 등등. 집착하다 보면 끝도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약속한 시간이 끝났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고시 낭인'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렇게 열심히 할 자신이 없다',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들춰보면 더 열심히 할 구석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거기서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던 것도 컸지만, 정말로 더 열심히 할 자신이 없었거든요. 


80세 혹은 100세 시대에서 그 몇 년은 티끌 같은 점선이겠지만, 저에겐 아직 형광색 점선으로 남아 있습니다. 원 없이 공부했던 시간이었어요 (물론 그 이후에 이렇게까지 공부를 계속할 줄은 몰랐지만요... 쳇). 30대가 되니 오롯이 공부에만 나의 하루를 쏟아붓는다는 것은 정말 '사치'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먹고살아야죠, 배우자나 가정이 생기면 또 더해진 역할에 맞춰 최선을 다해야죠, 건강도 돌봐야죠, 부모님도 가끔 챙겨야죠. 사회에서 나에게 원하는 역할이 많아지는데 맹한 눈으로 등 돌리고 있을 수가 없어졌어요.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는 시간이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피부로 깨달았기에, 20대의 그 순수하고 찬란했던 날들이 더 아련합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그렇다고 결과가 아쉽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에요.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시절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제가 과거를 미화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그래도, 그때, 그 시절의 제가 가끔은 기억 속에서 찰랑입니다. 맹목적이지만 순수한 불나방 같았고 - 그래서 더욱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스스로를 괴롭혔지만 - '나 이렇게 열심히 살아봤다'라는 경험을 저에게 안겨준 시간들이었어요. 오은영 박사님이 그러셨잖아요. 고등학교 2학년 중간고사에서 받았던 수학 점수가 아니라, 내가 열심히 해봤다는 기억으로 오늘을 사는 거라고. 물론 내 젊음의 한 토막을 바쳐서 불태운 시간 끝에 제가 원했던 결과가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서 결과가 조금 아프긴 했지만, 이제는 고뇌의 시간조차 귀엽게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제 나이가 좀 든 것 같아요. "내가 더 열심히 했더라면" 혹은 "내가 그 과목을 더 잘 준비했더라면" 하는 가정법적 생각에 굿바이 인사를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캐나다에서 나이 먹어가며 얻은 깨달음 덕이 큽니다. 모든 일이 다 좋을 수 없고 다 나쁠 수 없듯이, 그 과정에서 제가 얻은 것도 많았어요. 목표가 시험에서 고득점을 얻을 답안을 써내는 것이다 보니 사고의 유연성을 기르기는 어려웠지만, 오히려 자아 탐구는 이 과정에서 시작한 듯 싶습니다. 이 시험공부가 아니라면 하지 않았을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해 볼 수 있었고, 그 중 일부는 이후 제 연구에 토대가 되기도 했으니까요.




시험 준비를 그만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당장 다음 도전 과제(...)를 무엇으로 삼을지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 놓고 그만둔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다 보니 당시 상황에서 가장 택하기 쉬운 선택지를 골랐던 것 같습니다. 바로 자대 석사 대학원 진학이었죠. 맞아요. 도피성 진학이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시험공부만 하던 제가 당장 성격이 다른 목표를 향해 눈을 돌릴 수 있을 만큼 사고방식이 유연하지 않았어요.  


대학원에서의 삶은 고시촌의 삶과 같은 듯 달랐어요. 미친 듯이 읽어야 하는 점, 그리고 시험을 쳐야 한다는 (페이퍼가 아닌 자필 시험이 아직 있었답니다. 대학원에서...) 점은 제가 적응할 필요가 없었지만, 사고방식 전환에 나름 애를 먹었어요. 대학원에서는 대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다각도로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미덕으로 삼는데 (물론, 한국에서는 대체로 교수님의 입만 바라보고 있긴 합니다), 저는 '고득점'을 잘 획득할 수 있는 시험 글쓰기를 몇 년간 '훈련'한터라, 비판적 사고가 익숙하지 않았거든요. 어떤 이론이 다른 이론의 반대점에 서 있다는 것은 잘 외워서 알았지만, 그 차이를 스스로 알아낸다든지, 내 나름의 근거로 이론적 스탠스를 취한다든지의 능력은 거의 0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엉덩이 구력은 있는데, 머리는 바보인 것 같아 내심 고민이 많았답니다. 남들은 의자에서 엉덩이 뗄 생각없이 앉아있는 저를 보며 집중력 좋다고 감탄하고 있는데 쪽팔리게 "저 비판적 읽기를 잘 못 하겠어요...우엥" 같은 소리를 하고 싶진 않았어요. 그럼 교수님들한테라도 찾아가서 애로사항을 터놓고 조언을 구하면 될 일인데, 제가 또 '도와달라' 소리를 징그럽게 못 했거든요. 정말 혼자 끙끙 앓고 맨땅에 삽질 엄청 했었죠. 그때 냈던 과제들 보면 진짜 한숨 나옵니다. 그런 걸 보고 나름 시간을 들여 코멘트를 달아주신 교수님들은 사실 알고 보면 굉장히 너그러우셨던 거죠. 비판적 사고가 힘들다는 건 한중일에서 나고 자란 학생들 모두가 겪는 공통적인 문제점이라는 사실을 캐나다에 건너가서 알게 되었지만, 그 이야기는 또 나중에 풀어볼게요. 


얼레벌레 2년 차가 되었고 아직 허덕이는데, 어느 날 당시 석사 지도교수님이 유학을 권유하셨습니다 (네에? 유학이요오?). 물론, 저도 생각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습니다. 석사만큼 신분이 애매한 학위가 또 없거든요. 특히 한국에서처럼 '몇 살에 뭐 하고, 몇 살에는 어디쯤 가 있고' 식의 줄 세우기식 사고방식이 심한 곳에서는 석사의 입지가 더 좁을지도 몰라요. 이미 학력 인플레이션 문제가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고, 사회생활을 많이 하신 선배들은 석사를 '학교 2년 더 다닌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전문가라고 말하기엔 애매하지만, 뭘 안 한건 아니고, 그렇다고 뭘 했다고 하기도 애매한, 뭐 그런 상태인가 봐요 (지금은 생각이 좀 다릅니다. 특히 캐나다에서는 석사 졸업 이후 관련 분야에서 일하면서 경력을 쌓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학위를 끝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이를 토대로 삼아 경력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박사가 되면 다 좋을 것 같지만, 정말로 아주 세부적인 분야의 전문가 1인이 되는 것이라 job market에서 석사보다 덜 선호되는 경우도 왕왕 있어요). 


아무리 유학 생각이 없진 않았다 하더라도 바로 뛰어들 생각은 없었습니다. 유학을 준비하는 것은 시험 준비처럼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일이었거든요. 하지만 지도교수님께서 권해주신 이후론 그다지 오래 고민하지 않았던 기억이 나요. 어찌 보면 저희 선생님의 '눈'을 믿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러고 보니, 제 인생의 중요한 결정마다 선생님들이 함께 하셨네요). 게다가 제 지도교수님은 까다롭기로 유명하신 분이라, 본인이 보시기에 공부 깜냥이 아니면 학생이 먼저 유학 가겠다고 찾아와도 '공부하지 않는 게 좋겠다'라고 하시는 분이었어요. 그런 선생님이 먼저, "너굴이 유학 안 갈래?" 하셨으니, 내가 아주 돌탱이는 아닌가 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그때 돌탱이 판정을 받는 게 나았을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치 못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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