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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想像)님!

by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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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근무지를 옮길 때마다 가까이 지냈던 동료들로부터 별다방(스타*스) 커피 쿠폰을 선물로 받곤 한다.

특정 브랜드 커피를 일부러 챙겨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건넨 쿠폰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부담 없이 커피 한 잔을 나누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다.

다시 한번, 그 따뜻한 마음을 전해준 친구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한 번은 별다방 앱에 등록해야만 사용할 수 있는 쿠폰을 받게 되었다.

휴대폰에 앱을 설치하고 쿠폰을 등록한 뒤, 매장에 가서 ‘Order(주문)(주1)’ 탭을 눌러 음료를 주문했다.

음료가 준비되면, 주문자의 닉네임이 컵에 적히거나 직원이 직접 불러준다.


“루나 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월급날언제님, 카페라테 준비됐어요.”

“단짠단짠님~”

“오늘만버텨님~”


그 모습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나는 닉네임을 뭐라고 할까?”

잠깐의 생각 끝에 나는 ‘상상’이라는 단어를 입력했다.


“상상님, 음료 준비됐습니다.”


그 순간, 내 귀에 그 이름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짧고 선명한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외국에서도 발음하기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닉네임을 서둘러 사용한 곳은 브런치스토리였다.

혹시 이미 같은 필명을 쓰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검색해 보니, 다행히 없었다.

나는 ‘상상’이라는 이름으로 작가 등록을 마쳤다.


‘상상’이라는 단어는 내게 언제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시간이 많았던 그때, 나는 참 많은 상상을 했다.

부잣집 딸이 되는 상상, 세계적인 팝가수가 되어 그래미상을 받는 상상, 대통령이 되는 상상, 한국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되는 상상…

끝이 없었다.

아쉽게도 우리 집엔 책이 많지 않았다.

책이 더 있었다면, 내 상상도 더 멀리 날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움베르트 에코의 반서재

움베르토 에코는 3만 권의 장서를 자랑하는 큰 서재를 갖고 있다


3.jpg 옴베르토 에코의 서재 (출처 : KBS '스타연예' )



그는 방문자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고 한다.

첫 번째 부류인 대부분의 방문자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와, 시뇨레 에코 박사님! 정말 대단한 서재군요. 그런데 이 중에서 몇 권이나 읽으셨나요?”

두 번째 부류는 매우 적은데, 개인 서재란 혼자 우쭐하는 장식물이 아니라 연구를 위한 도구임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읽은 책 보다 읽지 않은 책이 무엇인가에 더 관심을 보인다.

이미 읽은 책은 아직 읽지 않은 책 보다 한참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중략) 진정 알면 알수록 읽지 않은 책이 줄줄이 늘어나는 법이다. 읽지 않은 책이 늘어선 대열, 이것을 반서재라 부르기로 하자.

에코의 반서재에 주목하라. 아직 읽지 않은 책에 주목하고 자신의 지식을 대단한 자산이나 소유물 혹은 자존심 향상을 위한 도구로 여기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블랙 스완』에서 에코의 반서재 개념을 인용하며,

우리가 쌓은 지식보다 아직 배우지 못한 것, 경험하지 못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하지 못한 일, 배우지 못한 것을 담은 ‘반(反)이력서’를 써보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제안한다.


어쩌면 상상이란 바로 그 반이력서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아직 배우지 않은 것,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을 미리 마음속에서 펼쳐보는 일.

그것이 상상의 본질 아닐까.


서재에 대한 생각을 거꾸로 뒤집어 본 것처럼,

현존 지식도 뒤집어 보고,

보편적인 관점도 뒤집어서 상상을 하는 것이다.


책이 많지 않았던 어린 시절, 나는 부족함 속에서 세상을 배웠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상상’으로 채웠다.


지금은 책을 읽으며 상상하고, 상상하며 다시 쓰는 삶을 산다.


(주1) 이 기능은 매장에서 줄을 서지 않고, 앱으로 미리 주문·결제한 뒤 지정한 매장에서 바로 받아볼 수 있는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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