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등급 에어컨으로 여름 나기

여름아 부탁해

by 후니언니

서울 끝자락, 볕 잘 드는 남향 빌라 5층.

이곳에는 여름만 되면 무협지처럼 땀을 흘리는 네 가족이 산다.


매년 우리 집 여름 생존 키워드는 단 하나.

‘참는다.’


에어컨 없이, 냉방기기 없이. 오로지 의지로 여름을 난다.

물론 에어컨은 있다. 천장에 딱 하나, 이사 올 때부터 천장에 붙어 있던 5등급 정속형 에어컨. 우리는 에어컨이라 쓰고, 전기세 귀신이라 부른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면 우리 집 에어컨 리모컨은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에 봉인된다. 거의 비상용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각자 알아서, 각각의 방식으로 여름을 버틴다.


아빠의 여름 필수템은 물에 흠뻑 적신 수건이다. 집안에서는 목에, 외출할 땐 팔목에. 축축한 수건과 함께 밥도 먹고, 택배도 받고, 집안일까지 해치운다. 엄마는 더위를 안 탄다는 자기 암시로 여름을 견딘다.

“벌써 그렇게 더워하면 어떻게 사니?” 하며 선풍기 위에 수건을 얹는다.

“모터를 식혀줘야 고장도 안 나고, 시원하지.”


동생에게 여름은 자기 암시의 계절이다.

“여긴 남극이다… 나는 얼음이다…”

도를 닦는 기분으로 버티다가, 결국 에어컨 빵빵한 카페나 시원한 공간으로 피신. 여름만 되면 같은 집에 살아도 마주치기 힘든 이유다. 나는 주로 ‘찬물 샤워’파다. 눈 뜨자마자 찬물 샤워로 정신을 깨우고, 수시로 탈의하며 멘탈까지 꽁꽁 얼려버린다.


우리 집 강아지 꿍이는 이 집에서 유일하게 에어컨 없는 삶에 진심으로 분노하는 존재다. 털을 입고 태어난 죄(?)로 얼린 수건을 이불 삼아 덮고, 냉스카프로 무장한다. 진지하게, 여름을 위한 전투복이다.




<오후 8시에 시작되는 에어컨 타임>

밤이 되면 진짜 서사가 시작된다. 오후 8시, 온 가족이 모이면 5등급 에어컨을 켤 권한이 내게 주어진다.

'삐-' 소리와 함께 모두가 정적에 빠진다. 함께 모여 저녁을 먹는 이 시간은 우리 가족에게 허락된 유일한 호사다. 그런데 사실… 별로 시원하지는 않다. 처음 켤 때만 18도로, 이후 설정 온도는 늘 25도. 23도는 사치, 24도는 반항, 25도는 타협이다. 그리고 밤 12시가 되면 자동 종료. 냉기가 사라지기 전, 얼음의 시간이 시작된다.


잠들기 전엔 냉동실에서 꽝꽝 얼린 생수병과 아이스팩을 꺼낸다. 수건으로 감싼 생수병은 목에, 아이스팩은 다리 사이에 끼운다. 자다가 더우면 한번 뒤집는다. 이것이 우리 집의 열대야 숙면 공식이다.




<진정한 여름의 맛>


예전엔 선풍기 하나로 여름이 지나갔다. 덥긴 해도 “그래도 여름이니까” 하며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덥고, 또 덥고, 계속 덥다. 이제는 '에어컨 있는 집'이 아니라 '방마다 에어컨 있는 집'이 부럽다. 그리고 여름만 되면 빠지지 않는 위로 '그래도 추운 것보단 더운 게 낫지!' 우리 집도 그렇게 생각하며 버텼다. 하지만… 이제 진심으로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요즘 진지하게 생각 중이다.

‘에어컨 적금이라도 하나 들어야 하나?’




올여름도 에어컨 대신 웃음. 전기세 대신 가족.

그리고 얼음물, 아주 많이.


덥지만, 시원하다.

힘들지만, 웃기다.


우리 가족의 여름은 그런 맛이다.

올여름도 우리는 그 오묘한 맛을 꾹 참고,

천천히 씹어 넘기겠지?


어쩌면 그래서 더 오래, 더 깊이 기억에 남는

여름이 될지도 모르겠다.


모두 올여름 무사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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