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침대차도 타 본 여자야
아빠도 힘들어 해 그만둔 열차를
딸이 또 타네..
이제 우리집 3대가 이어서
철도에 다니는구만..
내가 코레일관광개발 승무원으로 입사하기로 한 날, 엄마와 아빠는 놀람 반 걱정 반 섞인 얼굴로 저렇게 얘기하셨다.
외할아버지가 철도청에 다니셨고 아빠가 철도청에 다녔으며 내가 현재 KTX 승무원이니 말이다. 외가로 시작해 딸인 나로 끝나, 완벽한 3대는 아니더라도 나름 3대이지 않나. 생전에 아빠를 유독 아끼셨던 고모할아버지도 철도청에 한평생 다니시고 퇴직하셨다.
아빠는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에 입사하여 군대까지 다녀와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부산으로 내려왔다.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지금보다 열악했을 근무환경을 생각하면 백번 이해되지만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아빠가 철도청에 다니는게 백번 나았다는게 가족들의 생각이다. 역시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군. 아빠는 손이 새까매지도록 표에 구멍을 뚫었다는데 나는 손목이 나가도록 PDA를 들고 승차권 확인을 하고 있다니.
이상하게도 나는 아기 때 기억이 남아 있는데 우리 가족은 기차를 꽤 많이 탔었다. 통일호 비둘기호 뭐 이런 것들을 타고 여기저기 많이 놀러다녔다. 항상 멀미날 것 같은 오징어같은 이상한 냄새가 났고 어두침침했으며 씨끄럽기는 또 얼마나 씨끄러웠는지. 엄마는 항상 귤과 계란, 바나나우유, 진미오징어를 샀고, 난 항상 거의 못먹고 기차에서 내렸다. 멀미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구경하기도 힘든 침대차도 있었는데 나는 꼭 엄마랑 2층에 있는 걸 좋아했다. 부산에서 청량리까지 밤새 달리던 열차 안에서 내가 혹여나 멀미를 할까 잠을 못 잘까 엄마는 계속 나의 상태를 봐가며 선잠을 잤다. 그 때의 엄마의 숨결이라던지 손길이라던지 모든게 생생하다.
새마을호는 당시 최고급차여서 몇 번 못 타봤다. 지금은 아주 질리게 타고 있지만. 무궁화호도 나름 괜찮았는데 명절타임엔 좌석 통로까지 사람들이 앉아있어 지나가지도 못했다.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갈 정도였으니 난민열차나 다름 없었다. 자리가 없으니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몸을 우겨넣었다. 나는 항상 할머니와 통로에 앉아 긴 시간을 사람구경하며 보냈다. 진짜 닭도 타고 개도 타고 그랬었다. 그래도 난 버스보단 기차가 좋았다. 멀미를 덜 했기 때문이다.
기차에서 잠깐 내려 우동이나 국수를 후루룩 마시듯 먹고 다시 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엄마는 영등포역에서 아련하게 옛날 얘기를 했다. 너무 뜨거우면 빨리 못먹으니까 뜨뜻미지근하게 담아 주었겠지. 서대전역 국수 얘기를 중년 아저씨 고객들에게 하도 많이 들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다. 근데 나도 한 번 해보고 싶다. 그러다 기차 놓치고 막 그런 낭만적인 여행, 해보고 싶다. 물론 기차를 놓치면 그때부터는 낭만이 아니라 다큐로 장르가 바뀌겠지만.
일로써 기차를 타는거라 낭만따윈 없지만 가끔 아빠 생각도 하고 그런다. 영주가는 ITX새마을을 탈 때면 엄마 아빠 연애할 때 아빠가 근무했던, 둘이 처음 만나 연애를 시작했던 역도 지나치니 뭔가 마음이 이상해진다.
나도 기차타면서 연애하고 있으니까 평행이론인건가. 하여간 나란 여자, 이렇게 의미부여하는거 좋아한다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