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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Dec 17. 2023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하루

지난 한 주도 잘 지냈나요? 저는 이제 대상포진이 다 나았어요! 회복에 큰 도움을 주신 사골 끓여준 엄마와 진심 어린 걱정을 담아 답장을 보내주신 일글러님, 그리고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감사드립니다. 


갑자기 웬 미술관이냐고요? 사실 몸도 몸이지만 그동안 마음도 많이 지쳐 있었던 것 같아요. 지하철만 타면 우울해지는 '지하철 우울증'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믿었던 인간관계 속에서 저도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몸은 약 먹고 푹 쉬었더니 나아졌지만, 지친 마음은 약이나 푹 쉬는 것만으로는 회복이 안 되더라고요. 다행스럽게도 이럴 때 필요한 저만의 휴식법이 하나 있어요. 그건 바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기'입니다.


평일 낮 한가로운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앞에서


당신에게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은 무엇인가요?


오랜만에 얻은 평일 낮의 휴가.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을 누릴 방법을 고민하다가 생각난 것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기'였어요. '정처가 없다'곤 하나 동서남북 정도의 방향은 있어야 하기에, 내비게이션에 찍을 어딘가가 필요했어요. 일단 제가 운전을 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어야 했고, 사람이 많지 않은 곳이어야 했는데 과천 미술관 정도가 제격이었죠. 그러니까 저에게 미술관은 작품을 보러 가기 위한 곳이라기보다는 떠돌아다니기 위한 목적지였던 거죠.


몸이 아플 때는 집에서 푹 쉬는 게 최고이지만, 몸이 허락해 준다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마음 휴식이 아닐까 생각해요. 특히 매일 8시간 넘게 사무실에서 생활하는 직장인이라면 더욱더요. 미술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배가 고파지면 혼밥 하기에 좋은 곳을 찾아 밥을 먹고, 당이 떨어질라치면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어가 그 카페에서만 파는 시그니처 라떼를 마셨어요.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 진짜 행복하다"


열심히 일하는 일상이 없었다면 이 시간이 온전한 휴식이 되지는 못했을 거예요. 특히 일을 하지 않는 공백기를 많이 겪어본 저로서는 그 점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죠. 미술의 '미'자도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미술관은 취업준비생 시절에 종종 찾은 곳이기도 했어요. 현실과 차단된 미술관 안에 있으면 '평생 백수로 살면 어쩌나'하는 불안감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죠. 미술관 안에 있는 내가 왠지 조금 우아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사람이 아닌 그림과 대화를 나누는 느낌도 좋았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미술관 주변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 보면 하루가 훌쩍 흘러 있는 게 좋았어요. 그 시절에 표값과 밥값이 넉넉했더라면 더 많이 떠돌아다닐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며칠 전, 제가 팔로우를 하고 있는 한 사업가가 SNS에 이런 글을 남겼어요. '오랜만에 일을 안 하고 쉬려는데 유튜브 보는 것 말고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요. 여러 나라에 출장을 다니고, 화려한 인맥을 갖고 계신 분도 저와 같은 고민을 한다는 게 신기하더군요. 그에게 직접 전하진 못했지만,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기를 추천해드렸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났어요. 내비게이션에 미술관을 찍든, 영화관을 찍든, 아울렛을 찍든 어디로 향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목적지를 향해 가다 딴길로 새어보기도 하고, 목적지를 지나 흘러 가보는 하루. 우리에게는 때때로 그런 규칙 없는 하루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오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어요. 내일부터 다시 규칙적인 하루를 살아갈 힘이 생겼달까요. 만약 일글러에게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시간과 여유가 생긴다면 무엇을 하시겠어요? 당장 가고 싶은 장소나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일단 내비게이션에 미술관을 찍고 출발해봐요. 


일글레 발행인 유수진 드림



이 콘텐츠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레터, '일글레' 입니다. 일글레 구독 하시면 매주 수요일마다 이메일로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일글레는 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9년차 회사원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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