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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Dec 17. 2023

어차피 내려올 산에 왜 올라가냐면

일글러, 한 주간 잘 지냈나요? 저는 요즘 왜 이렇게 졸린지 모르겠어요. 지난 일요일에는 아침 일찍 등산 갔다가 밤까지 내리 잠만 잤지 뭐예요.


일글러는 등산 좋아해요? 저는 산에 가는 걸 무척 좋아해요. 험준한 산을 정복하고 다니는 등산가가 아닌, 17년 동안 오로지 뒷동산만 정복한 프로 산책가(?) 수준이지만 아무리 피곤하고 졸려도 거의 매주 산에 오르고 있죠.


누군가는 '어차피 내려올 산을 왜 올라가는지 모르겠다'라고 하더군요. 어차피 똥으로 쌀 거 왜 밥을 먹냐고 질문하는 것과 비슷한 흥미로운 질문이죠? 그래서 오늘은 어차피 내려올 산을 왜 매주 올라가는지 이야기해 보려고 해요.


해질녘 산꼭대기에서


어차피 내려올 산에 왜 올라가냐면


매주 똑같은 산, 똑같은 코스를 걷는 제 모습이 누군가에겐 지루하게 비칠지도 모르겠지만, 의외로 큰 변화가 없는 환경에서 걷는 일은 영감을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요. 여행과 같이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자극을 느낄 수 있는 곳에서 걸을 때 '반짝이는 영감'을 얻는 반면, 익숙한 환경에서 걸을 때는 '숙성된 영감'을 얻거든요.


누구나 '생각'을 하며 살지만 그 생각의 깊이는 사람마다 다르죠. 저는 그 깊이의 차이가 '걷기'에서 비롯된다고 믿어요.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수많은 생각들이 떠오르기만 하고 도저히 풀어낼 여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에겐 '걷는 여유'를 만드는 일이 중요한 것 같아요. 엉켜 있던 실타래가 풀리듯, 땅에 한 발씩 발을 디딜 때마다 꼬여있던 생각들이 풀리면서 비로소 자기만의 답을 얻게 되니까요.


"니체는 자기가 쓴 책 속의 거의 모든 생각이 걷는 중에 떠올랐다고 고백했고, 리베카 솔닛은 걷기라는 행위가 인간에게 갖는 의미를 책으로 엮기도 했다. 그들은 걸으며 생각하고 걸으며 치유하고 걸으며 가능성을 얻었다. - 히조, <하지 않는 삶> 중에서"


그런데 왜 평지가 아닌 산에 오르냐고요? 과학적으로 설명은 불가하지만 저는 평지보다는 오르막이 주는 약간의 고통이 저를 더 깊이 생각하도록 채찍질해주는 것 같아요. 마치 난이도가 낮은 문제집만 풀 때는 몰랐던 내 실력을, 난이도가 높은 문제집을 풀 때 비로소 알게 되듯이 말이에요. 각자의 문제가 다르고 각자의 인생이 다르듯, 자기에게 맞는 오르막을 선택하면 되겠지요.


아마도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날까지 저는 계속해서 산길을 걸을 거예요. 어차피 내려올 산에 오르면서 그렇게 조금씩 저만의 숙성된 답을 찾아갑니다.


어차피 또 올라갈 산을 왜 내려가냐면


산에 오르는 것만큼이나 산에서 내려가는 것도 힘들어요. 넘어지지 않으려 허리나 무릎에 힘을 꽉 주게 되거든요. 어느 정도 험준한 곳을 지나 다시 평평한 길을 만났을 때, 팽팽했던 저의 고민도 탁-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렇게 나름의 답을 얻은 뒤 산에서 내려와 저는 글을 씁니다. 바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어렵게 얻은 영감을 기록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남겨놓지 않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테니까요.


기록을 하면서 저는 또다시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생각'이라는 걸 하는 시간은 등산을 할 때, 그리고 글을 쓸 때뿐이겠네요. 아마도 다음 주가 되면 저는 또 새로운 문제를 안고 산에 오르겠지요. 어쩌면 평생 풀지 못할 문제를 매주 조금씩 나누어 가지고 올라갈지도 모르고요. 그곳에서 얻은 생각들을 이렇게 차곡차곡 글로 써 내려가는 것. 그것이 제겐 일상이자 임무이자 행복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누군가 만약 어차피 내려올 산을 왜 오르냐고 묻는다면, 어차피 또 올라갈 산을 왜 내려오냐고 묻는다면 제 답은, 이 글이 되겠네요.


일글레 발행인 유수진 드림



이 콘텐츠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레터, '일글레' 입니다. 일글레 구독 하시면 매주 수요일마다 이메일로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일글레는 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9년차 회사원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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