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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간의 스페인, 그 안의 나

스페인 한 달 살기 01 : 시작

by 이지

스물두 살의 첫 유럽 배낭여행 이후 홍콩과 태국, 대만, 오스트리아, 크로아티아까지 다양한 도시들을 여행했다. 여행을 거듭할수록 느낀 것은 여러 도시를 바쁘게 스쳐 지나가는 것보다 한 도시에서 천천히 머무는 것이 진짜 여행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좁은 골목길을 걷고 마트에서 장을 보며 카페에 앉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그 일상적인 풍경 속에서 오히려 낯설고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 도시의 계절, 거리의 공기, 사람들의 문화와 음식 속에 스며들며 살아가는 그 모든 순간이 오감을 자극했다. 그렇게 여행은 늘 나를 다른 삶으로 이끈 특별한 경험이 되었다.


크로아티아 여행을 다녀온 지 1년이 흘렀고, 나는 어느덧 서른한 살이 되었다. 먹고살기 위해 많은 땀과 노력을 쏟아야 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매일 밤을 새우며 아르바이트를 했고, 계약직이라는 불안정한 신분 속에서 사회의 쓴맛을 배웠다. 하루 14시간씩 책상에 앉아,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끼며 오직 공부에만 몰두했다. 그 치열했던 시간 끝에, 마침내 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했다.

공부만으로 채워졌던 1년이 지나고 나는 나 자신에게 작은 보상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맞이한 겨울방학, 남은 연가를 모두 끌어모아 33일간의 스페인 여행을 계획했다. 오랜만에, 나만을 위한 시간이 찾아왔다.


베이징을 경유해 마드리드로 입국하고, 바르셀로나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정의 항공권을 예매했다. 여행 동선을 짜고, 그에 맞춰 기차 티켓도 미리 준비했다. 스페인은 우리나라와 달리 기차표를 일찍 예매하면 훨씬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어 계획적으로 움직이면 여행 예산에 도움이 되었다. 스페인 바로 옆에 위치한 작은 나라, 포르투갈에도 일주일 정도 머물 계획이었다. 늘 하던 대로 여행 준비는 차근차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방학을 약 일주일 앞둔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정리한 뒤 자리에 앉았다.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 거렸고, 얼굴에는 열기가 올라 도저히 업무를 계속할 수 없는 상태였다.

선배 교사들은 늘 말했다.

"학기 말쯤 되면 꼭 아파. 안 아픈 게 이상한 거야."

한 학기 내내 아이들을 쫓아다니며 챙기느라 기운이 빠졌고 방학할 때쯤이면 긴장이 풀려 이곳저곳이 아파왔다. 조퇴 후 병원으로 향했다.

집 근처에 위치한 작은 내과, 몸이 아플 때면 종종 찾던 익숙한 곳이었다. 병원 안은 조용했고, 환자는 나뿐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의사가 흰 가운을 입고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며 무심하게 물었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열이 나고, 몸살 기운이 있어요."

의사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타자 소리를 이어가며 말했다.

"약 처방해 드릴 테니, 먹고 푹 쉬세요."


약을 먹고 난 뒤, 커튼을 닫고 보일러를 조금 높였다. 이불속에 몸을 묻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눈을 떴을 땐 이미 밤이었다. 커튼 사이로 가로등의 노란빛이 어슴푸레 흘러들었고, 방 안은 싸늘하게 조용했다. 해가 환히 떠 있을 때 잠들었기에, 갑작스레 어두워진 방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마에 손을 얹어보니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티셔츠는 흠뻑 젖어 있었다. 몸은 축축하고 머릿속은 쿵쾅쿵쾅, 망치로 두들기는 듯한 통증이 퍼졌다. 그냥 감기라고 넘길 수 없는 기운. 직감적으로 ‘이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틀거리며 옷을 갈아입고 택시를 불렀다. 4층 계단을 간신히 내려와 택시에 몸을 싣고 응급실로 향했다. 겨울밤 도로 위를 달리는 차창 밖으로, 노란 불빛들이 뿌옇게 번져 있었다. 나의 스페인 여행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한 편의 이야기처럼 전개되고 있었다.


응급실 간호사가 체온계를 귀에 갖다 댄 뒤, 조심스레 긴 면봉을 꺼냈다. 코 깊숙이 찔러 넣는 그 순간, 눈물이 찔끔 날 만큼 따끔한 통증이 번졌다.

"독감이에요. 마스크 쓰고 계세요."

인생 처음 앓는 독감이었다. 방학을 불과 나흘 앞두고 더는 학교에 나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마스크를 단단히 쓰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나는 아이들에게 "방학 잘 보내"라는 말을 건넸다. 나는 빈 책상 사이로 걸어가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긴 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음 날이면 스페인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런데 아직 캐리어는 바닥에 펼쳐진 채였다.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목까지 차오르던 그 순간에도, 마음 한편에선 여전히 여행을 향한 설렘이 꿈틀대고 있었다.


몸이 아팠던 탓에 짐을 싸지 못했고,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여행을 취소해야 할까 고민도 했지만, 6개월간 준비한 여행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결국 다음 날 새벽, 마지막 남은 타미플루를 챙겨 먹고 캐리어를 챙겨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베이징 공항의 경유 승객을 위한 라운지에서 6시간을 기다렸다. 라운지 한쪽에는 간단한 과자와 빵,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고, 샤워실도 있어 몸을 씻을 수 있었다. 나처럼 경유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함께 소파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친 후,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라운지를 나섰다. 나와 같은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우르르 짐을 챙겨 탑승구로 향했다. 스페인까지는 약 12시간 정도의 비행시간이었고, 그 시간 동안 나는 대부분 잠을 잤다. 비행 내내 먹고 자며 조금씩 컨디션을 회복했다.

새벽 6시, 마드리드 국제공항은 한산했다. 시내로 들어가는 열차를 기다리며 공항 안의 작은 카페에 앉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열차를 타고 미리 예약한 작은 호텔에 도착해, 캐리어 짐을 풀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한 달간 혼자 여행을 떠나는 일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독감으로 몸이 무겁고 피로가 가득했기에, 긴 여행이 더 막막하게 느껴졌다.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을까?', '긴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끊임없이 머리를 맴돌았다. 하지만 나는 여행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저 부딪혀 보기로 했다. 어떤 만남과 장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걱정보다는 설렘이 더 큰 마음으로 나는 결국 여행을 선택했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작은 호텔방에서 스페인 한 달 살기를 시작했다.

침대 옆 작은 창문 사이로 스페인의 겨울 햇살이 들어왔다. 나의 여행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마드리드 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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