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한 달 살기 02 : 톨레도
스페인의 수도인 마드리드는 볼거리가 정말 많은 곳이다. 고야, 피카소 등 유명한 작가의 그림이 가득한 미술관은 물론이고, 마드리드 근교에 볼거리가 많은 도시가 많았기에 마드리드 일정은 10일로 여유롭게 잡았다. 한 달 살기 여행 콘셉트에 맞게 여유롭게 움직이며 한 곳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톨레도
마드리드행 비행기에서 때마다 나오는 기내식을 챙겨 먹고 잠을 푹 자고 나니,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호텔 앞 작은 식당에서 아침을 간단히 해결한 뒤, 톨레도로 향했다. 마드리드 남서쪽에 위치한 이 도시는 기차로 약 1시간 거리.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는 가까운 여행지였다.
기차 안에서 스페인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도착했다. 기차역을 나서자 높은 언덕 위로 올려다보이는 고즈넉한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카메라를 들고 앞서 걷는 관광객들을 따라가기만 하면 길은 자연스럽게 열렸다. 다리를 건너니 톨레도로 오르는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따라 한 걸음씩 오르자, 마침내 톨레도 마을 입구에 닿았다. 구시가지 성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신시가지와 주변의 풍경은 그 어떤 그림보다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감탄도 잠시, 추운 날씨 탓에 맨손으로 들고 있던 스마트폰 때문에 손끝이 점점 얼어왔다. 손이 새빨개지고 감각이 둔해질 즈음 따뜻한 공간이 간절해졌다. 마침 눈에 띈 예쁜 간판의 카페.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메뉴판에는 먹음직스러운 추로스와 핫초코 사진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달콤한 추로스 한 입과 핫초코를 마시자마자 입 안 가득 따뜻한 향이 퍼졌고, 몸도 마음도 녹아내렸다.
간식을 먹고 나니 슬슬 출출해졌다. 고민할 것도 없이 카페 바로 옆에 보이던 아담한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해산물 빠에야 하나를 주문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해물 볶음밥쯤 되는 요리였는데, 가격은 12유로(약 15,000원)로 다소 비쌌지만 제법 입맛에 잘 맞았다. 여기에 샹그리아 한 잔을 곁들이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샹그리아는 와인에 과일과 소다수를 섞어 만든 스페인의 전통 음료이다. 얼음을 넣어 시원하게 마시면, 특유의 상큼한 향과 맛이 어느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해산물 요리는 물론이고, 육류와 함께 해도 손색이 없다. 그날 이후로 스페인 여행 내내 나는 샹그리아를 즐겨 마셨다.
스페인에서의 첫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따뜻한 음식과 샹그리아로 속을 채운 뒤, 다시 길을 나섰다. 톨레도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12월 31일 올해의 마지막 날을 즐기려는 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있었다.
골목골목 얽혀 있는 좁은 길들을 걷다 보면, 마치 중세 시대의 어느 도시를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풍스러운 건물들 사이를 거닐며,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연말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나 역시 자연스럽게 그들 틈에 섞여 마을을 구경했다.
광장에는 사람들의 함성과 음악 소리로 가득했다. 퍼레이드가 한창이었고, 나는 정신없이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며 구경하느라 바빴다. 흥겨운 축제의 한 장면 속에서, 나도 그 일부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마드리드
톨레도 당일치기 여행을 마친 뒤, 다시 마드리도로 돌아왔다. 솔 광장은 올해의 마지막 날을 축하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활기찬 인파 속에 섞여 걷다가, 문득 서른 살의 마지막 날을 나만의 방식으로 기념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구글맵을 열어 솔 광장 근처의 분위기 좋은 근사한 레스토랑을 찾았다. 창가 자리에 앉아, 리뷰에서 추천하는 메뉴와 샹그리아를 주문했다. 어두운 실내에는 노란 조명이 아늑하게 테이블을 비추고 있었고, 창밖 거리는 반짝이는 조명으로 가득했다. 식사를 하며 창밖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간이 제법 운치 있었다.
12월 31일. 세상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스페인 여행이 막 시작되는 날이기도 했다. 20대의 끝자락에서, 스무 살 무렵 가졌던 자유로움과 순수함이 30대의 시작과 함께 사라질 것만 같아 두려웠다. 재미있는 일도, 새로운 일도 이제 없을 거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대신 어른이라면 자연스럽게 갖춰야 할 책임감과 성숙함이 나에게 자연히 찾아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른의 마지막 날, 이곳에서 먹는 음식과 처음 마셔보는 샹그리아. 그리고 오늘 본 톨레도의 풍경은 모두 내게 '처음'이었다. 반짝이는 거리와 따뜻한 조명 속에서 나는 새삼 깨달았다. 아직도 나를 설레게 할 것들은 세상에 충분히 많다는 것을 말이다.
30대가 된다고 해서 내가 하루아침에 달라지진 않았다. 오히려 아직 경험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년이 지나고 또 10년이 지나더라도 나를 설레게 하는 것들은 어디에나 있을 것이었다. 내 나이에 걸맞은 삶이 찾아오면, 그때는 그 삶을 온전히 즐겨보기로 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새로운 것들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야말로 진짜 성숙이 아닐까. 그리고 이 여행이 끝날 즈음이면,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지고 성숙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