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한 달 살기 03 : 세고비아
다음날 마드리드의 두 번째 근교 도시 세고비아로 향했다. 세고비아는 버스를 타고 2시간 정도 걸리는 곳으로 마드리드 북서쪽에 위치한 도시이다. 과거 로마의 식민지여서 그 흔적을 지금도 찾아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로마의 수도교와 알카사르를 보기 위해 마드리드를 방문하는 관광객이라면 꼭 들리는 도시이기도 했다.
버스에서 내려 큰길을 따라 걸었다. 멀리에서도 보이는 로마 시대의 수도교는 놀라웠다. 로마시대 당시 물을 흘려보내어 도시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도교는 1990년대까지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버텨왔지만 최근에는 조금씩 붕괴의 징조를 보이며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2천 년을 버티며 제 기능을 해온 놀라운 건축물이었다.
붐비는 광장을 조금만 벗어나 걸으면 세고비아의 랜드마크인 알카사르를 볼 수 있다. 알카사르는 14세기에 세워진 성으로 백설공주에 나오는 성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멀리서 보이는 성은 딱 봐도 백설공주가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마치 동화책에서 빠져나온 듯 한 모습에 홀린 듯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옛 가구는 물론 그 당시의 갑옷과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어 볼거리가 가득했다.
전날 방문한 톨레도의 북적이던 거리와는 달리 1월 1일의 세고비아는 조용하고 한산했다. 성을 구경한 후 동네를 거닐었다. 혼자 하는 여행은 자유롭지만 외로움과 함께 했다. 특히 도시를 조금 벗어나면 더 크게 다가왔다. 대화할 사람도 공유할 것도 없는 나는 혼자 길을 걸으며 천천히 아름다운 것들을 온전히 보고 눈에 담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가끔씩 외로움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혼자 있을 때의 적막이 싫어 텔레비전을 틀어 놓아야만 안심이 되는 나였기에 외로움은 없애야 할 감정이었다. 가끔씩 찾아오는 외로움에 나는 몸서리치곤 했다. 막연히 오는 외로운 감정이 싫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나 외로움이 느껴질 때면 이를 벗어나기 위해 친구에게 연락하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랐었다. 아무리 이야기하고 내뱉어도 위로는 그때뿐, 모든 것을 털어놓을 때는 잠시 마음이 괜찮아졌지만 곧 공허함과 함께 고통과 슬픔을 내포하는 외로움이 다시 차올랐다.
나이가 들고 성숙해지면 이 외로움도 자연히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30살, 스페인 세고비아에서 이것은 나의 큰 착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행을 시작한 지 이틀 만에 외로웠다.
'역시 혼자 여행하면 외로워진다니까..'
혼잣말을 하며 조용한 거리를 막연히 걸었다. 지도도 보지 않고 발길 닿는 데로 이동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런저런 잡생각들이 사라지고 머리가 맑아졌다.
'외로움도 별거 아니네?'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았던 이 외로움도 몇 시간 가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행복함, 슬픔, 외로움 이 모든 감정들은 영원하지 않으며, 이렇게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성숙해져서 외로움과 같은 감정을 겪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짐으로써 이 모든 감정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스페인을 여행하는 동안 혼자 있는 이 시간을 온몸으로 받아보기로 했다. 여행 동안 비행기와 기차를 타는 일, 길을 걷고 식사를 하는 일. 이 여행의 모든 과정들이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었다. 혼자 하는 시간은 어떤 시간보다 천천히 흘러갔고 시간의 공백에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한동안 외로움을 마주하다 보니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나의 지질한 모습이라든지 과거 부끄러웠던 행동들이 생각나기도 했으며 지나간 날들을 반성하고 앞날을 다짐했다. 그리고 이 순간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나자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끔은 이렇게 외로워질 필요가 있다. 혼자 하는 여행에서 나의 동행은 외로움이었다. 여행 내내 함께한 외로움은 바쁘게 살아가는 동안 놓친 것들과 가장 소중한 '나'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