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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M삼min Apr 02. 2024

9만 원씨, -1만 원씨의 무한했던 공간을 회상하다.

No home, No job, No ticket, 선착장의 세 여자

 6천 원짜리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4천 원으로 하루 두 끼의 식사를 해결한 1만 원씨의 나는 두려울 게 없었다. 한 밤 중에 불빛 하나 없는 시골 산길에 내려준 툭툭이 떠나도, 나는 묵묵히 길을 걸았다. 그 길이 두렵지 않았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 틀 때까지 나는 홀로 어둠을 걸었다. 단 한 번도 두렵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1만 원씨는 어디에도 갈 수 있었고, 반드시 그렇게 했다.

 나는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두렵다. 길 위에서 나는 아무 계획 없이 나아갈 곳이 있었는데,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혼자가 된다는 것, 계획이 없다는 것, 어두운 길도 이제는 모두 다 두렵기만 하다. 길 위에 내려놓은 것은 푸트라 배낭인가, '나' 인가?


  미리 걱정하는 습관은 장이 꼬이는 듯한 통증을 상시 동반한다. 점심으로 먹은 집밥 같은 백반 정식도 어찌 뱃속에서 볼멘소리를 내며 정체하는 느낌이다. 9만 원 씨는 아침에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마땅히 부동산이 할 일까지 도맡아 했다. 건축물대장 확인. 위반건축물인 경우 보증보험 가입이 불가능하다. 연식이 오래된 건물을 고친 탓에 모든 게 의심스러워 결국 미리 제 눈으로 확인하고야 말았다. 그런데도 9만 원씨는 갈팡질팡 하고 있다.

 “길이 워낙 험해서 견적이 너무 높게 나오는데요?”

 이사 견적을 미리 알아보니, 이거 인편으로 짐을 옮겨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큰 몫을 하는 모양이다. 혼자 사는 여자는 이삿날 일어날 끔찍한 시나리오를 다양하게 뽑았다. 잠들지 못하는 마음은 어김없이 머리를 바쁘게 움직인다.

 “아씨, 이거 못해 먹겠네”
 “아휴, 이거 할 짓이 못되네”
 “이거, 안돼 안돼!”

 이삿짐을 옮기다 이런 아우성이 폭죽처럼 터져 나온다면 9만 원씨는 주저앉아 울음이라도 터트려야 하는 것인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위기 시나리오는 전반적으로 한도가 없으며 다채롭다. 이렇게 나는 매번 나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짜증 나게.

  42리터 푸트라 배낭 하나를 지고 겁도 계획도 없이 국경을 넘어 다닌 1만 원의 나를 떠올린다. 벌이가 하나 없는 마이너스 1만 원 씨의 나날이 있었다. 어둠이 깔린 시골 산길에 내려 터덜터덜 구글맵에 의지해 길을 걷던 나는 두려움이 없었다. 길을 잃어도 다시 걸으면 그만이었다. 좁은 길 낯선 자전거가 지나가면 어김없이 인사를 하던 1만 원씨의 어둠을 밝히는 자전거의 조명이 그저 고맙기만 했다. 낯선 길에서 만난 사람이 건네는 작은 옥수수를 맛있게 받아먹는 의심 없는 내가 있었다. 언제나 갈 곳이 있었고 언제나 두렵지 않았다. 42리터 푸트라 안에 담긴 짐으로 나는 혼자서 많은 것을 해결해 왔다.

 전기도 물도 끊긴 시골마을에 내린 날이면, 강가에서 목욕을 할 심산이었다. 어느 하루는 씻지 못하기도 하고 어느 하루는 먹지 못하기도 했다. 그 어떤 것도 나를 흔들어 놓지 못했다.

 1만 원씨가 9만 원씨를 비웃고 있다. 적게 가지고 가볍게 떠나 오래 걸어 다닌 1만 원씨에게 닭장 같은 방에 몸을 누이고 네모난 큐비클에 갇혀 갈 곳이 없는 9만 원씨는 부끄러운 사람이다.


 오후 1시 선착장의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더위는 통풍 하나 될 리 없는 비어 라오 티셔츠와 한 통속이 되어 데오도란트가 없는 나를 비웃었다.


 나는 미국을 싫어하진 않는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만난 미국인 무리는 여간 지겹기 짝이 없다. 미국인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미국 얘기를 나눈다.

“어디 출신이야?”

 “미시건”

 “나 거기 가 봤어”


라오스 구멍가게서 산 과자도 처음 본다는 듯 뚫어져라 보길래, 먹을 건지 권했더니 하는 대답도 참 지겹다.


 “어디서 샀어? 그거 미국 거야”

북조선 탄광에서도 여차하면 너네 나라 공산품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놀라지 말라구 Red neck!

 갓 대학을 졸업한 미국 사회 진출을 앞둔 애송이들이 미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만난 동양인 한국 여자는 낄 수 없으니, 저들끼리 미국 찬양을 하게 내버려 둔다. 65리터 가방을 바닥에 내려둔 여자가 지겹다는 듯 눈알을 굴리다 지겹다는 듯 하품을 쏘아붙인 나와 눈이 마주친다. 선착장의 배가 들어왔고 나는 미국인 무리를 먼저 보내서 여기서 자연스레 헤어지기로 한다. 암묵적이지만 모두가 원하는 바이다. 선착장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척 딴청을 떨어본다. 한두 자리가 남아 탑승을 강요하는 현지인 뱃사공의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는 듯 그저 웃었다. 배에 탑승했던 여자가 왜인지 내렸고 나와 65리터 배낭, 세 여자가 뙤약볕에 숨을 그늘 하나 없는 선착장에 남았다.

 “미국인들이란!”

65리터가 주머니에 넣어둔 반쯤 타다만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쏘 유얼 낫?”
 “예스. 아이 엠”

배에서 내린 여자는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왜 배에서 내렸냐고 묻자 말했다.

 “티켓을 잃어버렸어,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다음 배를 타려고”

No ticket은 더 이상 대화하기는 귀찮다는 듯 책장에 얼굴을 파묻었다. 담배 연기를 뻐끔대던 65리터 배낭이 여기저기 난 보조 주머니를 열었다 닫았다 무언가를 찾으며 말했다.

 “여기 내 전 생애가 담겨 있어, 생각해 본 적 있어? 인생을 짊어지고 사는 삶!”

No home이 딱히 깨끗해 보이지는 않는 양말을 찾아, 신발을 벗고 더욱 지저분해 보이는 양말을 갈아 신었다. 뭐라고 답은 해줘야 할 것 같은데, 그런 생을 감히 살아본 적도 없고, 아는 척할 수도 없어 느닷없고해성사를 해버린다.

 “No job이라 갈 곳이 없긴 해”
 No home, No job & No ticket. That’s us”

No ticket이 불쾌한지 눈썹을 씰룩이며 다시 독서에 몰두하는 척 한다. No home 혹은 No job 어떤 사람과도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진 않은 모양이다. 머리에 바구니를 이고 온 할머니가 바구니에서 유통기한이 언제인지 모를 팩에 담긴 주스 하나를 웃으며 내밀었다. 빨대를 꽂아 No home에게 권하자 한 모금 들이키고 No ticket에게도 권했다. 상황을 이미 다 훔쳐보았다는 것을 실토하듯  No ticket이 사양했다.

 “No ticket says no”

 반 이상 남아 돌아온 주스를 마셨다. 생수가 다 떨어져 갈증을 버텨온 터라 주스곽을 찌그러트리며 달게도 마셨다. 팩 주스를 비우자 왜인지 할머니는 기특하다는 듯 웃었다. No home은 다시 자신의 온 생을 뒤적여 바늘과 실을 찾아 양말인지 장갑인지 모를 무언가를 꿰매기 시작했다. No ticket은 이제 정말 독서에 집중하는 듯 사르륵 소리를 내며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통풍 하나 되지 않는 버건디 색 비어 라오 티셔츠를 비웃는 뙤약볕의 1시간 40분 남짓이 흐르자 다음 배를 저어 남우강을 건너오는 뱃사공이 보였다.

42리터 푸트라 배낭을 지고 일어나는데 No home은 움직이지 않았다.

 “안 가?”

 “NOPE”

 실과 바늘은 이미 한참 전에 다시 65리터의 생애 속에 잘 보관해 둔 것 같은데, No home은 선착장에 태평하게 앉아 있다. 내가 배를 타자 No ticket이 따라 탔고, 사공이 긴 장대로 강을 휘젓기 시작하자 선착장의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Have a good life, No job!”

안녕, No home.
언젠가 그 생을 잠시 내려두고 쉬고 싶을 때 짐을 맡아줄 사람이 되어볼게.

 1만 원의 내가 분명히 그런 다짐을 했던 것 같은데, 9만 원의 나는 작은 상자에 갇혀 매일 갈 곳은 있으나 스스로가 딱히 자랑스럽지는 않은 일상을 보내고 있다. 차라리 시간이 빨리 흘러가길 바라기도 하고, 어떤 날은 시간이 멈추다 못해 모든 것이 끝나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1인석의 큐비클 안에서 편의점 김밥을 꾸역꾸역 먹으며 하루에 두어 번 창 밖을 바라보는 9만 원의 나를 1만 원의 내가 비웃고 있다. 65리터 배낭에 담을 것 하나 없는 9만 원의 일상을 No home도 함께 비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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