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최선의 선택이 모여 오늘의 나를 이뤘다. 어떤 선택이 치가 떨리게 후회될 때마다 스스로에게 보내는 위로였다. 나는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했고,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렇게 두세 번 되뇌이다 보면 기분이 풀어지기도 하고 나아갈 용기를 얻기도 하지만 가끔은 눈물이 핑 돌기도 한다. 그 모든 나의 감정이 해답인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해답을 알고 있다. 성에 차지 않는 것뿐이다.
오늘도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을 위해 꽃다발을 고른다. 파스텔 톤을 좋아하며 장미는 아니고, 풍성한 꽃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가지고 생일을 맞이한 누군가가 받고선 기뻐할 꽃다발을 주문한다. 플로리스트가 샛노란 개나리 색 꽃다발을 추천한다. 방금 막 만들었고 봄에는 화사한 꽃다발이 반응 좋다고 한다. 받아본 적이 있어야알지. 회사 근처 꽃 가게에 종종 업무상 필요한 꽃다발을 주문하는데, 누가 누구에게 선물하는 것인지 용도를 묻는 대답에 맞춤한 꽃을 준비해 줘 애용하는 가게다. 완성된 꽃다발을 받아 들고 ‘어머, 나도 받고 싶다’ 하고 감탄하면 사장님이 말한다.
"내가 나한테 사주면 되죠!"
맞는 말이다. 치킨 한 마리 먹을 돈, 나한테 사줄 수 있다. 하지만 꽃다발을 받고 싶은 진짜 이유는 축하할 일이 있는 생을,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삶을 염원하는데 있다. 태어난 날 말고, 두 발로 묵묵히 견디며 내 손으로 일군 성취에 대한 축하는 아마도 ‘전 우주가 나를 축하하는 기분’ 일 것이다. 샛노란 꽃다발은 어찌 받는 사람의 취향이 아닐 것 같은데, 지난번 꽃다발은 하얗고 분홍이고 초록이었으니, 또 같은 꽃다발을 고르는 것보다 새로운 꽃다발을 선물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남의 꽃을 고를 때는 최선을 다한다. 남의 생에 축하를 보낼 때도 아끼지 않는다.
샛노랗고 큰 꽃다발에 파스텔 톤 꽃을 더해 받는 사람의 취향을 더하는 것으로 협의한다. 이제 봄이라 꽃 가격이 전보다 내려 더 크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여린 분홍의 꽃과 여린 녹색의 그린 소재가 오가고, 하얗고 꽃잎이 풍성한 꽃이 더해진다. 샛노란 꽃다발은 크고 적당히 노란 따뜻한 꽃다발이 되었다. 꽃다발에 맞게 케익은 망고 생크림으로 정한다. 노란 꽃다발과 노란 케익이 잘 어울린다. 남의 생에 축하를 보낼 때는 온 마음을 담는다. 그래야 내가 축하받을 때 떳떳할 수 있을 것 같다.
타인의 생에 축하를 보낼 때는 최고의 마음을 보낸다. 아, 나에게도 축하할 일이 생겼으면 좋겠어’ 하는 마음은 성숙하게 마음 한 구석에 넣어둔다. 이 원칙은 루앙프라방에서 완성되었다. 계획성이라고는 하나 없는 다섯 사람이 선택받지 못한 호스텔에서 묵게 되었던 때의 일이다.
‘no plan best plan’ ‘things gonna happen, it happen’ 계획성이라는 건 1도 없다. 짊어질 수 있는 만큼의 무게만 등에 진다. 두 개의 슬로건을 생각하면 못할 일이 없다. 그렇게 아무 계획이 없는 사람들이 툭툭 기사가 내려주는 호스텔 앞에서 만났다. 여행자 거리 가장 끝에 있는 작은 집, 마당에 티 테이블과 웰컴 바나나가 있는 조용한 호스텔이었다. 각자 여행 온 독일인 남녀, 태국인, 미국인 그리고 나.
이 작은 호스텔의 방이 꽉 들어찼다. 첫날이니 알아서 각자 시간을 보낸다. 일단 씻고 주변을 탐색해야 제대로 된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여행자 거리 끝에서 끝을 오가자, 진정한 여행자 룩이 완성되었다. 오늘은 이것만으로도 성공이다. 생면부지의 여행자들이 엄지 손가락을 쳐든다. 쿨 앤 나이스, 오늘 나의 OOTD. -라오스 전통의상 바지, 치앙마이 리넨 남방, 빠이 헤드밴드, 대한민국 뿔테 안경 & 하바이나스 플립플랍-
스스로에게 취해서 시장 끝에서 만난 미국인과 유토피아로 향했다. 독일인들과 태국인도 밤에 유토피아에 가겠다고 했으니, 거기서 만나도 좋겠다. 미국인은 원피스 한 점을 샀다며 보여준다. 그런데 살 때는 예뻤는데 몸에 대보니 어째 무늬가 좀 이상하다고 한다.
"사실대로 얘기해 줘" "쿨 앤 나이스!"
"거짓말하지 마, 내 가슴에 자이언트 캔달롭이 양쪽에 하나씩 달려 있잖아!"
니키는 유토피아에서 원피스를 갈아입을 마음이었는데, 그냥 지금 입은 스포츠웨어를 고수하겠다고 한다. 어차피 조명 따윈 없는 곳이라고 안심시켰다.
운 좋게 강변 뷰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리를 낚아챘다. 옆 자리엔 브라질에서 놀러 온 모델 같은 남자들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니키가 귀에 속삭였다.
"그 남방 당장 벗어"
아까 분명히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다니던 떡대 같은 남자들이 쿨 앤 나이스라고 했는데, 이것들이 날 속인 것인가?
옆 테이블의 남자들은 브라질 2군 축구 선수들이었다. 사실이 확인되지 않으니 유명 클럽의 선수라고 해도 뭐 할 말은 없다. 그냥 각자의 자리에 누워 조명 하나 없어 보이지 않는 강을 상상하며 이런저런 수다를 떠는데,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던 니키가 보이지 않는다. 수다, 춤, 칵테일 세 가지가 시간을 다 빼앗아 이미 밤 11시를 넘겼고, 브라질 남자와 눈이 맞은 니키를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그냥 나는 나대로 놀다가 돌아가면 되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니키는 분명히 이따 갈 때, 같이 돌아가자고 했는데, 한 시간을 훌쩍 넘어 마시던 음료의 얼음이 다 녹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낮에 만난 떡대들이 다가와 축구 선수와 나에게 물었다.
"여기서 툭툭 타고 10분쯤 가면 볼링클럽이 있데, 같이 가자!"
축구선수는 반색하며 나를 일으켰다. 니키를 두고 시내로 나가 볼링을 치고 도대체 몇 시에 호스텔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나는 볼링을 칠 줄 모른다. 여행 내내 나는 카드놀이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테이블을 꽁꽁 얼리기만 했다. 볼링장마저 얼려버릴 수는 없다.
"니키가 걱정돼서, 호스텔로 돌아가야겠어"
쿨 앤 나이스를 외친 녀석들이, 플레이어를 잃어 실망한다. 이것 봐, 골라도 잘못 골랐다고!
"호스텔이 어딘데?"
축구 선수가 자신의 친구들을 찾아 곧 따라가겠다며 떡대 무리들의 툭툭을 먼저 보냈다. 카드놀이도 할 줄 모르고 볼링도 칠 줄 모르는 계획성 1도 없는 나는 호스텔의 이름을 모른다.
"몰라"
축구 선수가 웃었다. 그리고 그는 침착하게 호스텔의 생김새나 거리 입구에 대해 물었다. 음 그러니까 길 끝에 있었고, 하얀 작은 호스텔이고, 앞마당에 나무가 있고, 바로 옆에 국숫집이 있고. 축구 선수가 여행자 거리로 길 안내를 한다.
"그러니까, 이길 끝에 있다는 말이지?"
맞는 것 같다. 축구 선수는 툭툭을 잡아 내가 혼자 탑승해도 부담스럽지 않도록 흥정까지 마쳐주었다. 툭툭에 오를 수 있게 손까지 잡아준다.
"정말 고마워!" "됐어! 언젠가 너도 길 잃은 브라질 사람을 만나면 나처럼 잘 대해줘! 또 봐!"
밤거리를 쏜살같이 달리는 툭툭 안에서 눈을 부릅뜨고 호스텔을 찾는다! 아! 여기다 여기! 툭툭이 호스텔을 지나치려 하자 어두운 호스텔 마당에서 니키가 뛰어나온다. "Hey!"
흥정한 값을 지불하고 내리자 니키는 미안한 마음을 잔뜩 담아 사과했다. "미안해! 브라질 남자가 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어째 분위기가 너무 이상해져 혼자 돌아오고 말았어! 그런데 와이파이를 켜자마자 글쎄.." 마당 티 테이블에서 다급하게 우릴 부른다.
"얼른 이리 와! 도와줘!"
독일인 여자가 테이블에 작은 초코 케익 조각을 올려두고 냅킨을 깔았다. 오늘이, 그러니까 12시를 지난 오늘이 태국인의 생일이라는 것이다. 여자는 깜짝 파티를 위해 유토피아에서 얼른 돌아와 케익을 사려했지만, 가게는 이미 영업을 종료한 시점이었고 딱 하나 남은 조각 케익을 건졌다는 것이다.
"성냥이 젖었는지 불이 안 붙어, 거의 올 때가 됐어"
두 사람의 플립플랍이 거리를 쓰는 소리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린다. 독일인 남자가 생일 주인공과 1,2분 내로 여기에 들이닥칠 것이란 신호였다.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한방에 초를 켠다. 독일인과 미국인이 안도했다.
마침내 호스텔 마당에 들어온 태국인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조용히 생일축하 노래를 부른다. 호스텔 주인 부부가 깨지 않게 속삭이듯 노래를 불렀다. 이름을 알지 못해도 어차피 제대로 들리지 않으니 다행이다.
빌리가 초를 후 불었다. 우리는 아주 조용한 박수를 치며 그를 돌아가며 안아 주었다. 불빛 하나 없는 호스텔에 초 하나가 꺼지니 모두 잠시 조금은 당황했지만 이내 어둠 속의 눈이 밝아져 서로를 볼 수 있었다. 생일 주인공은 모두가 이 작은 케익을 나눠 먹을 것을 권했다. 포크 하나로 너도 한 입, 너도 한 입. 아무도 위생 따위를 논하며 거절하지 않는 달콤한 밤이었다. 좁은 티 테이블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캄캄한 밤하늘 속 환한 별을 바라보던 다섯 사람의 하루에 평온이 내려앉았다. 조근조근 내일의 계획과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데 니키가 속삭였다.
"도착하자마자 와이파이가 작동되어 알았어! 나 장학금을 받게 되었어!"
치앙라이에서 그간 영어 교사 봉사활동을 인정받아 유명 의대 장학금을 거머쥐었다는 니키를 축하했다. 진심으로 그녀의 앞날을 축복했다. 새삼 유토피아에 날 버려두고 간 그녀가 달라 보이기도 했다.
"오늘 생일 주인공이 축하받을 수 있게, 너한테만 알려 주는 거야! 우리 가족 바로 다음으로!" "축하해, 정말 축하해! 너무 잘 됐다!" "자 모여봐!"
빌리가 핸드폰을 들고 우리를 모았다. 떡대 5인이 작은 티 테이블에 서로를 깔고 앉다시피 한 화면에 얼굴을 들이밀기 위해 발버둥 친다. 한 의자를 둘씩 나눠 앉은 바람에 삐걱삐걱 의자도 울었다. 내 엉덩이, 내 무릎, 오 마이갇! 퍽, 쉿! 퍽, 랭귀지!
까르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오직 호스텔 주인의 잠을 위해 참느라 뱃속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여러 장의 사진 중 그 어느 하나도 그 누구도 아름답지 않아 더더욱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내 생애 최악의 사진이야”
진지하게 실망한 독일인 남자가 낙담했다. 그 이후로 네다섯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어느 사진도 그 누구도 제대로 찍히지 않는 이상한 밤이었다. 어쩌면 그날의 우리가 너무 눈부셔서 사진이 그 빛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너희들이 어디에서든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디에서든 나란히 걸을 사람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불이 하나 없을 때 내가 또 불을 켜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가진 거 하나 없고 축하할 일도 딱히 없이 누군가의 손에 쥐어질 꽃다발을 고르는 9만 원의 나는 케익 한 입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던 1만 원씨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해 타인의 인생에 축하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