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을 쥐어뜯는 드워프가 다녀간지도 일주일째다.
접경지에 위치한 ‘바람이 쉬어가는 집’이라는 여관은 이름과는 달리 바람 잘 날이 없는 곳이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각기 다른 종족의 손님들이 방문하다 보니, 하루가 멀다 하고 가게가 난장판이 되곤 한다. 그 난장판이라는 것도, 적당히 취객들이 싸우는 수준에서 끝나는가 하면, 때로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폭력 사태로 번지기도 한다.
보통 이런 소란은 각 종족 간의 뿌리 깊은 증오가 촉매제가 된다.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드워프와 엘프는 서로를 ‘땅딸보’와 ‘귀쟁이’라 모욕하며 술잔을 던지는 것이 예삿일이고, 오크를 발견한 인간들은 경기를 일으키며 무기에 손을 올리곤 한다.
그뿐이랴? 평소에는 보기 힘든 다크엘프라도 나타나면, 엘프들은 거의 기절할 듯한 표정을 짓는다. 드워프와의 사이가 그저 성향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이라면, 다크엘프와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깊은 앙금이 남은 증오에 가깝다. 수백 년을 우습게 넘기는 엘프의 수명을 생각하면 그 '역사'란 그들 입장에선 어제처럼 생생한 기억일 테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대체 이 여관의 몇 대째 주인이 지은 이름인지는 몰라도, 그가 바라던 평화는 이곳에 늘 머무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최근 일주일간 여관은 적당히 심심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수염을 쥐어뜯던 드워프가 다녀간 뒤로 이렇다 할 소동이 없었던 것이다.
여관지기는 이 평화를 만끽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글을 마음껏 쓸 수 있었다. 마침 얼마 전 방문했던 드워프의 이야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였다. 드워프가 자기 목숨보다 수염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굳이 같은 드워프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종족이 아는 사실이다. 그런 드워프가 스스로 수염을 훼손했다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고, 그 이유가 다름 아닌 '인간' 입양아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가슴이 저릿하기까지 했다. 여관지기 본인도 부모의 얼굴을 모르는 고아였고, 여관주인에게 거둬져 자랐기에 더더욱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이다.
오전 내내 손님의 방해 없이 글에 몰두하던 여관지기는 잠시 손에 들린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똑같은 햇살, 똑같은 바람, 똑같은 하루. 어떤 이들은 이런 반복을 지루하다 할지 모르지만, 그에게 이 평범함은 축복이었다. 그는 이 평화가 오래 지속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장난의 신은 여관지기가 심심해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 같다. 결국 이 적막한 평화는 더 오래가지 못했다. 여관의 문짝이 부서지듯이 열리며 한여름 오후의 햇빛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비집고 들어왔다. 헝겊마냥 너덜너덜해진 행색의 어떤 비쩍마른 검사와 함께.
문으로 들어선 것은 허리춤에 붉은 루비로 장식된 고급스러운 레이피어를 찬 장발의 사내였다. 그의 무기는 화려했지만, 그를 감싼 모든 것은 처참했다. 그 극명한 대비가 마치 마차 사고라도 당한 귀족처럼 보여 기묘한 이질감을 자아냈다.
그가 착용하고 있는 더블릿은 본래 웬만한 베기 공격은 막아낼 수 있도록 여러 겹의 천을 촘촘히 누벼만든 것이었으나, 지금은 셀 수 없는 칼자국에 의해 거의 넝마처럼 헤져있었고, 올이 헤져 구멍이 뚫린 바지 너머로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있었다. 심지어는 광대뼈와 이마에까지 칼자국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것은 마치 갑옷의 여백이 부족해서 맨살 위에 이야기를 새긴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동굴처럼 퀭하게 패인 눈은 높은 콧대와 대조를 이루며 해골의 눈구멍을 연상시켰다. 원래도 늘씬한 체형이었겠지만, 남루한 행색과 앙상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치 무덤에서 막 걸어 나온 시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는 그였지만, 신기하게도 그는 아직도 몸에 힘이 남아보였다. 묘한 희열과 함께 입꼬리가 살짝 달싹거리기도 했다. 분명히 누가봐도 지쳐 스러지기 일보 직전의 모습임에도 그러한 광기가 은은하게 눈에서 드러나는 것을 보면, 혹시 어딘가 머리를 심하게 다친 것은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는 여관 내 손님들을 둘러보지도 않은채 뚜벅뚜벅 바 테이블을 향해 직진해서 걸어갔다. 그의 모습을 보며 몇몇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엘프 음유시인은 자신이 제대로 본 것이 맞는지,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인간 모험가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물어봤고, 그 테이블에 있던 모험가들은 이미 얼이 빠진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저 사람 설마…?”
“쉿, 조용히 해.”
맞은편에 앉아있던 인간 모험가가 손짓으로 그의 말을 막았다.
“저 레이피어 보이지? 루비가 박힌…”
“신살검?”
엘프가 거의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되묻자, 인간 모험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별명이 있었지. 한동안 이름을 날렸는데… 요즘은 통 소식이 없더라고.”
그 사이, 몇몇 모험가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바 테이블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탁자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그들의 수군거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너덜너덜한 행색과 달리 당당한 목소리로 주문했다.
“여기 제일 비싼 음식으로. 오늘은 먹고 죽을 생각이오.”
도대체 무슨일일까? 여관지기는 매우 궁금해하면서도 꾹 참고 주방에 들러 주문을 넣고, 다시 돌아와 맥주를 준비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으신 겁니까? 몰골이 말이 아니군요.”
여관지기는 방금 따른 맥주를 건내면서, 방금 주방에 들렀을 때 챙겨온 부드러운 치즈와 견과류도 함께 건내주었다. 그의 피골상접한 몰골을 보니, 일단 뭐라도 먹여야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아주 기쁘고, 동시에 끔찍한 일을 겪었지.”
검사, 카맥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검사는 충분히 목을 축인다음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여관지기에 질문했다.
“당신은 완벽한 절망이라는 선물을 받아본 적이 있으시오?”
여관지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절망이… 어째서 선물이 되죠?”
카맥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 하지만, 당신은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지루하지는 않으시오? 같은 손님, 같은 맥주, 같은 이야기들….”
“그게 제 일이니까요.”
카맥은 잠시 말을 멈추고 여관지기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칼날 위를 아슬아슬하게 타고 다니던 그의 삶에 있어서, ‘일이니까’라는 그 당연한 한마디는 그 어떤 검격보다도 예측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 대답에 카맥은 흥미롭다는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럽구려.”
그는 잠시 숨을 들이키더니, 한숨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어릴적부터 만족하는 법을 몰랐소. 검을 잡은지도 스무 해, 처음엔 매일이 새로웠지. 새로운 기술, 새로운 상대, 새로운 깨달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카맥은 잠시 말을 멈추고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다시 대답을 이어나갔다.
“마치 이미 다 아는 책을 또 읽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소. 상대의 검이 어디로 향할지, 내가 어떻게 막고 찔러야 하는지. 모든 게 뻔했지. 승부조차 시작하기도 전에 끝나 있었소.”
어느 순간 모두의 귀가 카맥의 말을 한 자라도 더 담으려고 하고 있었기에, 여관은 쥐죽은듯 조용해졌고, 그래서 카맥의 말은 훨씬 또렷하게 들렸다. 오로지 주방의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카맥은 자신의 레이피어를 검집채로 손에 들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 루비 말이오….”
그가 왼손 검지로 손잡이의 폼멜 부분에 있는 루비를 가리켰다.
“과거에 내가 구해줬던 상인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그는 저주받은 물건이라며 다른 보석을 가져가라고 말하곤 했지. 이 루비는 피를 불러들인다나?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게 마음에 들었소. 위험한 싸움에 많이 휘말릴 수록, 나는 더 검술을 연마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는 아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 루비를 응시했다. 촛불이 그 표면에서 춤췄다. 붉은 빛이 점점 깊어지며, 마치 그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했다.
“그래. 그날 내가 그 던전에서 본 것은…”
그의 시선이 루비의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촛불에 흔들리던 붉은빛은 어느새 기억 속 거대한 골렘의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골렘의 눈이 타올랐다.
침묵한 사유의 갱도, 가장 깊은 방. 카맥은 숨을 멈췄다.
평범한 사람 크기의 석상. 장식도, 문양도 없었다. 그저 돌로 깎은 검사의 형상. 하지만 그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적의 가득한 붉은 빛은 카맥의 심장을 겨냥하는 것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움직인다.'
골렘이 아무 장식 없는 평범한 검을 뽑았다. 느릿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 자세에서는 정교함이 느껴졌다.
첫 검격이 날아왔다.
'빠르다!'
아니, 빠른 게 아니었다. 정확했다. 너무나 정확해서 피할 곳이 없었다. 카맥의 레이피어가 간신히 막아냈다. 충격이 팔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이건...'
두 번째, 세 번째. 골렘의 검은 물 흐르듯 이어졌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완벽한 직선, 완벽한 곡선, 완벽한 타이밍.
카맥은 깨달았다. 이것은 사람의 기술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정제된 검술 그 자체였다. 어떤 감정도 섞이지 않은...
'아름답다.'
그가 처음으로 밀렸다. 한 걸음, 두 걸음. 방의 출구로부터 점점 멀어진 그는 어느새, 방의 중앙까지 밀려있었다.
스무 번째 합을 겨루며, 카맥은 오랜만에 두려움을 느꼈다. 아니,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쁨?'
미친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이 뜨거운 무언가를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에서 땀이 났다. 다리가 떨렸다.
언제 마지막으로 이런 느낌을 받아봤던가?
'검성.'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불렀다. 당대 최고의 검사. 누구도 그의 검을 막을 수 없었다.
처음엔 좋았다. 매일이 도전이었고, 매일이 성장이었다. 검을 잡은 손에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하지만 정상에 오른 후는 달랐다.
"이게 끝인가?"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었다. 모든 대결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있었다. 어떠한 인간 검객도 그가 계산하는 경우의 수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선대 검성마저 극복한 그에게 있어서 가르침을 줄만한 존재는 더 이상 남지 않았다.
검을 사랑했던 그에게, 그것은 가장 잔혹한 저주였다.
그래서 도망쳤다. 부도, 명예도 버리고. 죽음이 도사리는 던전으로. 혹시나 그곳에서는 자신을 넘어설 무언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골렘의 검이 그의 뺨을 스쳤다.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진득하게 흘러나왔다.
카맥이 웃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뺨의 상처가 더욱 벌어졌지만, 그는 고통보다도 환희를 먼저 느꼈다.
“그래, 이거야.”
이 절망적인 상황. 이 압도적인 열세. 이 완벽한 적.
“이것이 내가 찾던 거였어.”
그의 목소리에는 마침내 길을 찾은 자의 성취감과, 동시에 그 끝이 죽음일지라도 상관없다는 광기가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