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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수염을 쥐어뜯는 드워프

by 진하린
여관의 간판을 보며 드워프는 생각했다.


'지상의 등불들이 또 늘어났군. 조잡하긴 하지만... 나름 인상적이야.'

평생을 광부로 살아온 그는 몇 년 마다 올라오는 지상의 풍경을 볼 때마다 새삼 놀라곤 했다. 지난번 올라왔을 때보다 확실히 등불의 개수가 늘어났다. 어떤 집은 창문마다 서로 다른 밝기의 촛불을, 어떤 집은 기름등을, 또 어떤 곳은 마법석 램프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드워프의 눈에는 제각각인 광원들이 만들어내는 불규칙한 빛의 패턴이 다소 무질서해 보였지만, 그 무질서함 속에서도 인간들의 끈질긴 생명력이 느껴졌다. 몇십 년 전만 해도 이 거리 끝자락은 그저 어둠뿐이었는데, 이제는 조잡하나마 불빛이 닿고 있었다. ‘인간들의 삶이 빠르긴 하구나.' 드워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2층짜리 여관의 정문 위에 설치 된 ’바람이 쉬어가는 집'이라는 간판 아래에는 여러 언어로 된 안내문이 덧붙여져 있었다. 드워프어, 엘프어, 인간의 공용어, 심지어는 오크어까지. 접경지의 여관 겸 선술집답게 모든 종족을 환영한다는 뜻이리라.


드워프는 여관의 문을 열었다. 이미 늦은 시각이라 다들 거나하게 취해있었고, 몇몇은 잠을자러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구석 테이블에서 함께 술을 마시는 엘프와 드워프였다. 천년 앙숙이라는 두 종족이 한 테이블에서 진지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광경은, 오직 이런 접경지에서나 볼 수 있는 진풍경이었다.


드워프는 술을 주문하기 위해 여관지기가 있는 바 테이블쪽으로 향했다. 그는 이동하면서 여관의 내부를 무심하게 스윽 둘러보았다. 벽에 걸린 낡은 검과 방패들, 누군가의 초상화, 그리고 각 테이블마다 다른 종족들이 섞여 앉아있는 모습.

한쪽에서는 하프를 든 음유시인이 은은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주사위 게임에 열중한 용병들이 있었다. 이내 의자에 다다른 드워프는 소인족 전용 의자를 끌어당긴 후 사다리를 타는듯한 능숙한 손동작으로 의자를 등반했다.






여관지기는 젊은 인간 남성이었다.

갈색 머리카락과 약간의 소년미가 깃든 평범한 얼굴. 그래서 여관의 주인보다는 대리인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나마 그의 외견에서 특기할거라고는 왼손 검지손가락에 굳은살이 배겨있다는 사실과, 안경을 쓰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앳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의외로 덩치가 꽤 크다는 점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이 여관을 거쳐간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어온 자의 특유의 깊이가 있었다.


"인간들 맥주… 맛좀 보고싶군"

드워프는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말하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관지기는 손을 멈추고 드워프를 내려다봤다. 보통 드워프들이 인간의 맥주를 주문할 때면 '거 얼마나 대단한 걸 만들었는지 맛이나 보자'는 식의 도전적인 어조였는데, 이 손님은 달랐다.

“어딘가…. 다르시네요. 다른 드워프분들과는.”

드워프는 여관지기를 올려다보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오해야."

여관지기는 그 대답을 듣는둥 마는둥 몸을 돌려 맥주통에서 맥주를 따랐다. 두꺼운 나무잔에 시원한 맥주가 차올랐고, 거품이 살짝 넘쳐 흘렀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슬쩍 드워프의 표정을 살폈다. 오랜 경험이 여관지기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 손님은 무언가 무거운 것을 품고 있다고.


드워프는 여관지기가 건네는 맥주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한 동안 마시지 않고 거의 노려보다시피 했다. 마치 맥주에 비친 자기 얼굴과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관지기는 바쁜 와중에도 그 광경이 너무 신기해서 곁눈질로 계속 지켜보았으나,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드워프는 그저 계속 잔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맥주잔에 비친 드워프의 모습에는 자랑스러운 수염이 있었다. 백년 넘게 기른, 드워프의 자부심. 하지만 오늘따라 왠지 그 수염이 낯설게 느껴진다.


드워프는 이내 눈을 질끈 감더니, 맥주를 한숨에 들이켰다. 마치 자신과 눈싸움하던 상대를 단숨에 마셔 없애버리겠다는 기세로 마셔버렸다. 그렇게 한 잔의 맥주는 금방 비워졌다. 그리고 드워프는 탁자위에 '탕'소리나게 맥주잔을 내려놓음으로써, '한 잔 더 줘!'라는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능숙한 여관지기는 그 잔을 받아들고 다시 맥주를 채웠다. 그리고 다시 드워프 앞으로 내밀었다.

"맛은 어떠세요?"

드워프는 스스로의 자존심과 싸우는 중인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했다.

"제법이군."

그 대답을 듣고 여관지기는 싱긋 웃고는 다시 자기 할 일을 하러 떠났다. 하지만 그의 귀는 여전히 드워프 쪽을 향하고 있었다.


드워프는 두 번째 잔까지 단숨에 비워버리고는 잠시 상념에 빠졌다. 취기가 아주 약간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올라오는 감정이 따로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한 테이블에서는 인간 아이가 엘프 여성의 무릎에 앉아 졸고 있었다. 종족을 넘어선 가족의 모습이었다. 그 광경이 그의 가슴을 찔렀다.

추억, 아픔, 연민, 후회… 그 여러가지 감정들이 드워프의 속을 헤집어놓는듯 했다. 그리고 저놈의 여관지기가 자꾸 눈에 거슬렸다. 자꾸 누군가가 생각났다.


'그 어린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맥주를 마시던 드워프 남성은 내리깐 자신의 시선에 자신의 콧수염이 거뭇하게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백 년이 넘는 세월동안 보아온 수염. 자부심. 가장 친숙한 존재…

하지만 지금 그에게 있어 이 수염은 굉장히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있어선 안 될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수 년 전 도시의 확장을 위한 굴착 작업을 하다가 이어진 새로운 동굴에서 홀로 비를 피하고 있는 어린 인간을 발견했고, 오갈 데 없는 그 아이를 입양한 것이다.

부하 광부들은 그의 선택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아무리 정성들여 키워봤자 인간은 드워프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할 거라고, 누군가가 유기한 아이일 뿐 우리가 그 아이를 무시해도 딱히 죄를 짓는건 아니라고, 아니 애초에 종족이 다른데 그렇게 연민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반대의 말들이 빗발쳤다.


그러나 그는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연민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슨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 부하들의 말을 무시하고 인간 아이를 슬하에 두는 선택을 했다.

그는 이왕 거두게 된 이상 아들을 멋지게 키워내고 싶었다. 비록 진짜 드워프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위를 누림으로써 다른이들의 차별을 벗어나게 하고팠다. 인간이지만 드워프식 교육을 받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 아무도 무시하지 못할 거라며, 권력과 명성만 있다면 누가 뭐라한들 당당할 수 있다며, 후계자 수업을 하며 들들 볶았다.


아들은 혹독한 생활중에도 아버지에게 대들지 않고 성실하게 가르침을 받았다. 허나 인간의 몸이 나약해서일까? 아니면 아버지의 기대감이 지나치게 강해서였을까? 도저히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부상을 입고, 병에 걸렸으며, 정신적으로도 주눅들게 되었다.

그런 꼴을 본 아버지는 나약한 아들의 모습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는 이 가혹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할 거라고, 남들 다 하는 일을 왜 너만 따라가지 못하냐고 질책하고 다그쳤다. 비록 다그친 이후에는 마음이 약해져 다독여도 보고 사과도 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교육 방침은 끝내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은 예전부터 한계에 달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점점 초췌해지다가 말을 잃고, 생기를 잃고, 스스로 삶을 내려놓았다.




"또 한 잔 드릴까요?"

어느새 다가온 여관지기의 목소리에 드워프는 고개를 들었다. 여관지기의 눈에는 이해와 연민이 담겨 있었다. 마치 그의 이야기를 이미 다 들은 것처럼.

"아니... 됐네."

맥주 때문일까? 아니면 자기 아들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여관 주인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엘프의 무릎 위에서 자고 있던 꼬마 인간 때문? 이유가 무엇이든 드워프 남성의 마음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자, 평생 느껴보지 못한 크기의 감정이 홍수처럼 밀려와 이성의 댐을 무너뜨리는 것을 느꼈다.



죄책감.


태산같은 무게의 죄책감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마음을 짓이겼다.

슬픔을 참느라 입술을 달싹이고, 입꼬리와 함께 수염이 꿈틀거렸다. 꿈틀거리는 수염은 자신의 목을 옥죄는 죄책감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수염이 자란 지도 백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처음 자라날 때 말고는 의식한 적 없는 콧수염이 도대체 왜 이리도 잘 느껴지는건지...


그는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을 느낀다.


까슬까슬한 니트를 처음 입었을때처럼, 숨 쉬는 순간 하나하나가 거슬리고 신경쓰인다.


선술집의 다른 손님들은 각자의 대화에 빠져 있었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주사위를 던지며 환호했다. 하지만 드워프에게는 그 모든 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손가락은 어느새 수염을 향하고있었고, 이 생경하고 불결하고 더러운 느낌을 벗어던지고 싶은 마음과 함께 그 불쾌한 잡초들을 모조리 뽑아버리기 시작한다.


부욱 부욱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턱에 뿌리내린 수염들은 하나 둘 술집의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관지기를 포함해 주변에 있던 다른 이들은, 갑작스러운 소란에 놀랐다.

엘프와 술을 마시던 드워프가 경악하며 일어섰다. "형제여, 무슨 짓을...!" 하지만 엘프가 그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크 용병들도 시끄럽게 떠들던 것을 멈추고 침묵했다.


드워프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생각하는 자부심의 상징인 수염을 뜯어내는 드워프를 보며 아연실색하는 표정을 짓는 이도 있었다. 몇 몇은 말리려고 다가왔지만, 서럽게 울며 수염을 뜯어내는 이의 얼굴을 보고는 손을 거둔다. 영문을 몰라도 그가 지금 스스로를 학대해야만 이 고통이 풀린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드워프는 고통과 감정의 격류 때문에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슬픔과 회한이 그를 괴롭힌다. 이 여관의 간판을 보는 순간부터가 문제였다. 아들이 그리워서 인간이 운영하는 선술집에 왔는데, 젊은 인간 청년을 보니 아들이 자꾸 생각난다. 그립고 화나고 안타까워서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다. 자신의 무자비함이 떠오른다.

아들을 끝내 죽음으로 내몰았던 자신의 한심함을 비난하고 싶어진다….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시간이 지났다. 그는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떨어진 수염과 살점들을 응시한다. 주변 사람들은 몰려들어 걱정하는 행동을 하지만, 눈물이 앞을 가렸는지, 흐릿해져 분간이 가질 않는다.


아프다.


답답하다.


공허하다.


아들이 너무 그립다.


내 체면, 내 수염, 이 의미없는 것들에 신경쓰느라 정작 곁에 있는 아들을 내버렸다.



나같은 쓰레기 아빠가 또 어디있겠는가?


드워프 사회에선 수염이 없는건 덕망이 없다는 얘기.

그래. 나는 덕이 부족한 사람인걸.






선술집은 한동안 정적에 휩싸였다. 음유시인의 하프 소리도 멈췄고, 주사위 굴리는 소리도 사라졌다. 모두가 한 드워프의 고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관지기는 조용히 다가와 깨끗한 수건을 건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습니까? 여기는... 그런 곳입니다."

드워프는 피가 섞인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여관지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관지기는 그날 밤 드워프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광산에서 발견한 인간 아이, 드워프로 키우려 했던 무모한 시도, 그리고 결국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새벽이 되어 드워프가 비틀거리며 2층으로 올라가고,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 자리를 뜨자, 여관지기는 카운터 아래에서 낡은 가죽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깃펜에 잉크를 묻혀 쓰기 시작했다.


'일곱 번째 이야기. 수염을 쥐어뜯는 드워프.'


그는 잠시 펜을 멈추고 생각했다. 오늘 들은 이야기는 특별했다. 거짓도, 과장도, 허세도 없었다. 오직 날것의 슬픔과 후회만이 있었다.

'바람이 쉬어가는 집'은 그런 곳이었다. 모험가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곳. 때로는 거짓말로, 때로는 과장으로, 그리고 아주 가끔은 오늘처럼 순수한 진실로.


여관지기는 수첩에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그는 자부심을 버리고 진실을 택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였으므로.'



동이 트기 시작했다. 곧 새로운 손님들이 올 것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여관지기는 수첩을 덮고 일어섰다. 잔을 닦으며, 그는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궁금해했다.


이곳은 바람이 쉬어가는 집. 이야기가 머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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