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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골렘과 검사 3부

by 진하린



이묵의 검술은 항상 반 보씩만 앞서나갔다.


상대의 실력과는 무관하게, 오늘 막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든, 한 왕국의 검술교관을 맡은 실력자든, 누굴 상대로도 결코 압도하는 양상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그만이 짜 놓은 각본대로, 천천히 옥죄어오는 올가미에 상대를 밀어 넣고, 조급함을 느낀 상대가 실수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묵 검술의 본질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검사들은 이묵의 검을 기묘하다고 표현했고, 늪을 보듯 두려워했다.


카맥이 이묵과 결투를 했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 나왔다. 카맥은 이묵과의 탐색전에서 기묘함을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이묵의 칼은 치명상을 노리는 것보다는 항상 약간의 이득만을 취하려는듯 방어적이고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카맥은 자신이 밀리는지 앞서는지 계산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의 카맥에게 있어 검술의 수싸움이란 결정적인 한방을 위한 포석에 불과했고, 이런 자잘한 이득까지 계산에 넣어볼 일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식의 합 교환이 이뤄지면 이뤄질수록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반 보 차이가 점점 따라갈 수 없는 거리로 멀어지는 느낌이 든 것이다. 자잘한 상처가 시야를 가리고, 숨을 가쁘게 만들었으며, 반응을 느리게 했다. 눈에 띄게 반응이 느려진 자신을 보며 서서히 공포심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수 싸움을 하면 절대 이길 수 없다.'


카맥은 상대방의 빈틈이 노출되면, 바로 상대방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표범같은 검술을 구사했지만, 이묵은 마치 거북이같은 느낌이었다. 단단한 등껍질 안에서 빈틈을 보이지 않은채로 상대가 지치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여간 막막한 것이 아니었다.

카맥이 단순히 빠르게 달려든다고 해서, 날카롭게 빈틈을 노린다고해서 이 방어를 뚫어낼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이 이어졌다.


카맥은 이 절대방어를 무너뜨릴 수가 무엇인지 해답을 내야만 했다.






카맥이 잠시 말을 멈추고 꿀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의 눈빛은 그때의 전투를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듯 했다. 여관지기는 바테이블을 치우는 것도 잊고 그저 멍하니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오늘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일지에 하나 더 추가될 것 같았다.


"그래서," 한 모험가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떻게 이묵을 이기신 겁니까?"

카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야성적이면서도 어딘지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소.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그를 절대 이길 수 없었거든.”

청중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가 설명을 이어갔다.








마흔 일곱 번째 합.

골렘의 검을 어렵게 막아내며 카맥은 자꾸 방법을 생각해내려 했다. 수싸움으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이야 한참 전에 깨달았지만, 해답을 내리는데는 시간이 걸렸다. 언제 자신을 끝내려 한다는 것까지도 계산을 마쳤으나, 손을 쓸 방도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카맥의 가슴 속에서는 초조함보다 오히려 환희가 차올랐다.

'이것이다. 내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싸움! 이묵 그대도 내게 이랬었지….’



그는 이묵과의 결투에서 자신이 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이묵의 계산적이고 정확한 공격은 골렘의 검술처럼 결코 빈틈을 내어주려 하지 않았다. '안 맞고 찌른다'는 검술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교과서처럼 지키면서도 상대방을 말려죽이는 이 교활한 검술을 돌파하려면, 어떻게든 방심을 유도해야만 했다. 그저 자신이 잘하는것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영역에 다다르는 것이다.


‘그렇게 이득만 보는 싸움을 하고 싶으면, 내 크게 한 턱 쏘겠소.'


카맥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이묵에게 큰 이득을 내어줬다. 이묵이 가벼운 생체기를 낼 생각으로 뻗은 칼에 일부러 크게 맞아준 거였다. 이묵은 예상 이상의 소득을 얻었지만, 그 때부터 그의 계산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눈에 띄게 당황한 이묵은 결정타를 내야할지, 아니면 하던대로 이득을 쌓아나가야할지 고민하는듯, 눈썹을 크게 꿈틀거렸다.

카맥이 일부러 맞아준 곳은 분명 큰 상처가 났지만, 이묵이 끝낼 요량으로 달려들었을 때, 반격이 불가능 할 정도의 치명상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찰나의 순간 이묵이 했던 번민을 카맥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예순 세 번째 합.

계산착오를 일으킨다는 것은 상대방이 생각하고 있는 영역을 아득히 벗어나야한다. 그리고 보통 그런 상황은 내가 '잘' 했을 때보다는, '잘못'했을 때 벌어진다. '대체 왜 그런 짓을'이라는 생각을 품게 만들어야한다.


카맥은 웃었다. 피가 흐르는 상처투성이 몸으로,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도 그는 웃고 있었다.






"그는 내가 미친놈이라고 생각했겠지요."

카맥이 청중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청중들 중 몇몇은 방금 전의 이야기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카맥과 눈이 마주치자 놀라서 움찔했다.

한 드워프 상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음... 확실히 상식적이지 않은 판단이긴 하지."

카맥은 그 말을 듣고는 쾌활하게 웃으며 꿀주 잔을 들어 올렸다. "그렇소. 확실히 미친놈이지."

카맥이 스스럼없이 인정했다. 그의 표정에서는 묘하게 부끄러워하는듯 싶으면서도 자랑스러워하는 분위기가 풍겼다.

"하지만 그런 광기가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소."

그는 꿀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말을 이었다. 여관 안이 조용해지면서 모든 이의 시선이 카맥에게 집중되었다.


“제정신으로는 목숨을 건 싸움이라는 것을 계속 해나가는 것은 어렵지. 부와 명예 모두를 다 얻었는데 굳이 더 위험한 싸움을 하려는 이는, 나 정도의 수준에 다다른 이들 사이에도 거의 없었소. 그래서 그들의 칼은 무뎌지고, 이름난 이들 중 전성기의 실력을 유지하는 자는 많지 않았지.”

그의 목소리에는 알고싶지 않은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허탈감이 섞여 있었다. 끊임없이 성장을 갈망하는 그에게 있어, 정점을 찍고난 후 성장동력을 잃어버린 이들이 어떻게 보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나는 그들을 보며, ‘과연 그들은 검이 재미있었을까?’하는 생각을 했다오. 그들에겐 검이 목적이 아니라 그저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부와 명예라는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그저 별볼일 없는 노인이 되어 사라져가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던 걸까?”

카맥이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그들처럼 성장의 기쁨을 포기하고 안온하게 시들어가고 싶지 않았소. 누군가에게는 성취겠지만, 내게 있어서 유일한 성취는 내 실력이 어제보다 더 나아지는 거였거든."






카맥은 웃으면서 생각했다. 이묵조차도 카맥의 돌발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바둑처럼 완벽하게 수싸움을 이어간다 한들, 검술은 찰나의 방심이 결과를 결정짓는 죽음의 춤이다. 그리고 상대를 방심하게 만드는 창의적인 검술에 있어서는 카맥은 누구보다 자신있었다.



75수.

카맥은 이미 어깨의 관절부 근처를 2번 찔렸고, 팔꿈치의 인대에도 상처를 입었다.


76수.

카맥의 눈두덩이 위는 아까 스쳐지나간 칼 때문에 출혈을 일으키고, 왼쪽 눈의 시야를 빼앗겨 거리감각이 둔해져 버렸다.



77수.

카맥의 왼쪽 허벅지는 잦은 파상공세로 인해 근섬유가 찢어지고, 원하는만큼의 각력이 나오지 않을만큼 약해져있었다.

아마도 78수를 맞기 전에 원하는 곳으로 회피하는 동작을 수행해내지 못할 것이다.

카맥의 모든 행동은 골렘의 계산하에 있었다.


카맥은 온 몸이 묶인채로 78수에 심장을 겨냥당할 것이다.

하지만 카맥은 미소 지었다.



78수.

카맥은 하면 안될 짓을 했다.

아마도 검술 교습을 받는 중이었다면 목검으로 뒷목을 맞았겠지.

이미 검술의 정점에 오른 그이지만, 그가 생각해도 지금 이 동작은 비효율적인 동작이었다.


칼을 사용하는 싸움은 찰나를 공략당하면 패배이기 때문에 몸을 돌리는 행위는 위험하다. 회전격을 사용하는 것은 중갑옷을 입고서 도끼창을 휘두를 때나 할만한 행동이다. 비무장 상태에서 이렇게 스스로의 빈틈을 내어주고, 원심력을 실어 담기도 힘든 레이피어로 회전찌르기를 한다는 것은 결코 권장할만한 행동은 아니다.


하지만, 카맥은 이미 검술의 신에게 한 번 선보인 적이 있었다. 상대를 당황시키고 계산을 무너뜨리는 변칙적인 행동이 불러오는 결과를. 미친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창의적인 한 수를.


그는 그 동안 검격에 힘을 실어주던 왼쪽 허벅지를 포기하고, 오른다리를 축으로삼아 몸을 반시계 방향으로 한바퀴 팽 돌렸다. 오른손에 들린 레이피어는 몸으로 가려진 사각을 통해 골렘의 중심에 있는 빨간 핵을 향해 매섭게 날아들었다.

그 동안 모든 공격을 막아내며 카맥에게 절망감을 주던 골렘도 그 공격만큼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 확실해졌다. 골렘은 카맥에게 치명타를 날리려던 마지막 일격의 궤도를 미처 틀지 못한채 그대로 내질렀다.


하지만 카맥이 몸을 틀면서 골렘이 최초에 겨냥했던 심장의 위치는 바뀌었고, 골렘의 칼은 카맥의 갈비뼈에 걸려 몸통을 훑고 지나갈 뿐이었다.




‘콰직’

78번째 합.


인간 최고의 검사는 검술 그 자체인 골렘의 핵을 꿰뚫었다.









"그 싸움은 내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소."


카맥은 그동안 열심히 떠드느라 무시했던 통증이 뒤늦게 찾아온 듯, 검격을 맞은 갈비뼈 부근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묵을 넘어섰을 때 느꼈던 감각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했소이다. 그때는 바로 깨닫지 못했던 것을 이번 대결을 통해서야 제대로 인지하게 된 것이오."

카맥은 이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결심한 내용은 기필코 내뱉어야겠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깨달았소이다. 내게 가르침을 준 이 골렘이라는 스승을... 재현해내고 싶다고. 그저 대결에만 관심 있었던 나에게 진정한 성장의 기쁨을 준 이 피조물을 말이오."

그는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복잡한 도식과 계산식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내 수준에 맞춰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조력자가 있다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뻗어나갈 수 있을 것이오." 카맥의 눈이 반짝였다. "이 즐거움을, 환희를 다른 이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소이다."

여관은 이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검성으로 유명했던 그가 스스로 유파를 창시하는 것도 아니고, 검술 교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직접 골렘을 만든다니…. 이전까지 다른 검사들과는 확연히 다른 선택이었다.


"왜 그런 짓을..." 한 모험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의 명성을 유지하면서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일이 많을진데, 굳이 아무도 관심가진 적 없는 영역에 도전한다는 것이 의아했으리라.

"음? 당연히 재미있기 때문이오." 카맥이 도리어 왜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검술을 배울 기회가 더 많아진다면, 나 역시 더 재능있고 강한 상대를 만날 수 있지 않겠소?"

정말이지 카맥다운 대답이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끝없이 성장하길 바라는 그저 검에 미친 천재. 이제는 스스로를 뛰어넘을 방법을 찾다 못해, 남들에게 기회를 선사하면서까지 자신의 상대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그저 재미있다는 이유만으로.


카맥이 일어섰다. 창밖에서는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자, 이제 올라가서 쉬어야겠소. 내일은 할 일이 많거든. 최고의 마법사들을 찾아야 하고, 드워프 장인들도 만나야 하오."

그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향해 걸어가다 멈춰 서서 뒤돌아봤다.

"혹시 이 중에 이런 일에 관심 있는 자가 있다면, 왕도에 있는 내 저택으로 찾아오시오."


그가 올라가고, 여관 안은 한동안 웅성거렸다. 전설적인 인물이 이 여관에 들러서 전설 그 자체를 본인 입으로 이야기했던지라 그 희열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그의 다음 행보마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것이었으니,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안줏거리는 없었다.

드워프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골렘 제작에 대한 기술적 가능성을 논했고, 모험가들은 흥분한 목소리로 자신들이 알고 있던 카맥의 다른 일화들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여관지기만은 마치 못 박힌 듯, 카맥이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재미있으니까'라는 그 짧은 한마디가, 그의 평온하던 가슴 한복판에 뜨거운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여관지기는 지금까지 평화로운 삶에 만족하며 살아왔다. 주어진 것을 불평 없이 누리며 사는 것, 그것이 삶의 전부라 믿었다. 재미, 희열, 환희 같은 단어는 그에게 너무도 낯설었다. 성취를 위한 몸부림 따위, 단 한 번도 욕망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기어코 깨부수고 인생의 다음 장을 준비하는 저 사내를 보며, 경외를 넘어선 어떤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다. 결코 만족하지 않는 한 영혼의 불꽃에, 자신의 미지근한 영혼이 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지금까지 뭘 하며 살았던 걸까?' 그 생각은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되어 그의 심장을 긁어내렸다.

여태껏 그의 삶은 그저, 남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적는 필사에 불과했다. 자신의 색깔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기록의 나열일 뿐이었다. 천천히 카운터로 돌아온 여관지기는 낡은 가죽 표지의 일지를 꺼냈다. 수년간의 시간이 먼지처럼 쌓인 그것은, 그의 삶이 얼마나 지루했는지를 증명하는 유물에 불과했다.


여관지기는 펜을 들었다가, 이내 멈췄다. 카맥이 말한 그 환희를, 자신도 느껴보고 싶었다. 그는 낡은 일지를 옆으로 밀어내고, 새로운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평소와는 전혀 다른 첫 문장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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