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화) 별무리 찻집 2부

by 진하린
올란디르에게 말을 건 사람은 인간 여성이었다.


그녀의 복장은 올란디르가 천 년 동안 겪은 어떤 문화권에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한 것이었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선명한 노란색 외투는 천이라고 하기엔 직조의 흔적이 없었고, 마치 얇은 가죽을 펴놓은 것 같으면서도 훨씬 매끄럽고 가벼워 보였다. 형태는 여행자들이 입는 긴 외투와 비슷했지만, 그보다 더 활동적이고 유연한 느낌이 들었다.

그 안쪽으로는 몸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는 검은 옷이 목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마치 비단처럼 매끈하면고 광택이 있었지만, 일반적인 비단천과는 달랐다. 마치 드워프 장인들이 만드는 사슬갑옷처럼 유연하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신비한 재질이었다. 그 표면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고 문양 틈새로 빛이 흐르고 있어, 마치 마법진을 몸에 두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금속과 투명한 재질이 섞인 의수가 가장 눈에 띄었다. 하플링 장인들의 정교한 기계장치보다도 더 정밀해 보이는 관절들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있는 손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손목 안쪽으로는 푸른 빛이 맥박처럼 깜박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짧게 자른 은색이었고, 푸른 눈은... 올란디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양쪽 눈의 빛이 미묘하게 달랐던 것이다. 한쪽은 생명체의 눈이 가진 따뜻한 깊이가 있었지만, 다른 쪽은 마치 보석처럼 차갑고 균일한 빛을 내고 있었다.


7F1EC304-6964-44C7-84B2-B00C41FAEF5E.png


"안녕하세요? 이 곳에는 처음이신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밝고 경쾌했다. 올란디르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소이다."

순간, 두 사람 모두 멈칫했다.

올란디르는 분명 엘프어로 말했다. 하지만 귓가에 들려온 것은 자신의 목소리이면서도 동시에... 다른 언어처럼 느껴졌다. 마치 두 개의 소리가 겹쳐진 것 같은 묘한 감각이었다.

루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제 말이 들렸나요?"

"들렸소. 그런데..."

"이상하죠? 방금 당신의 말은 처음 들어보는 운율인데,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네요."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동시에 주변을 둘러봤다.

올란디르는 처음 들어왔을 때 놀라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다른 '손님들'을 다시 관찰했다. 한쪽 테이블에는 검은 안개처럼 형체가 흐릿한 존재가 제복 같은 것을 입고 앉아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올란디르는 숨을 죽였다. 문어처럼 촉수가 달린 머리에 박쥐 날개를 가진 생명체가 무언가를 홀짝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공간 자체가 뭔가를 해주는 것 같아요." 루시가 조용히 말했다. “사실 이 곳의 손님으로 보이는 모두들 서로가 다르게 생겼음에도 대화를 이어나가는 걸 보면요.”

"신기한 마법이구려." 올란디르가 중얼거렸다.

"마법…?” 루시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당신은 정말...?"

그녀는 올란디르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금발의 긴 머리, 뾰족한 귀, 투명하리만치 창백한 피부. 그리고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깊은 눈동자.

"엘프... 진짜 엘프세요?"

루시의 목소리가 떨렸다. 흥분과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렇소. 서쪽 대륙 끝, 그늘 숲의 올란디르라고 하오."

"세상에..." 루시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제가... 제가 진짜 엘프를 보고 있는 거예요? 반지의 제왕에서나 나올 법한..."

"반지의 제왕?"

"아, 제 세계의 유명한 이야기예요. 거기 나오는 엘프가 바로 당신처럼... 금발에 뾰족한 귀, 활을 잘 쓰고, 엄청 오래 살고..."

루시는 말을 멈추고 올란디르를 다시 찬찬히 바라봤다. 마치 꿈이 아닌지 확인하듯이.

"정말 신기해요. 제 세계에선 엘프는 그냥 상상 속 존재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엘프의 뾰족귀 분장을 하고 '코스프레'를 하기도 하고... 아, 코스프레는 가상의 인물을 흉내 내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엘프가 눈앞에 있다니…”


올란디르는 그녀의 흥분한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래전 칼란이 처음 엘프를 만났을 때도 이랬었다.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쉬지 않고 질문했지.

"그런데 어머, 내 정신 좀 봐…. 제가 너무 실례했네요!" 루시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듯 말했다. "여기 서 계시게 해서 죄송해요. 앉으시죠?"

그녀는 가까운 테이블을 가리켰다. 거대한 별의 바다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창가 쪽 자리였다.

올란디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따라갔다. 테이블 사이를 지나가며, 그는 다시 한번 이 공간의 이질적인 손님들을 관찰했다. 한 테이블에서는 수정처럼 투명한 존재가 끓어오르듯 부글거리는 빛을 마시고 있었고, 다른 테이블에서는 여섯 개의 눈을 가진 곤충 형태의 생명체가 발톱으로 리듬에 맞춰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착석하자마자 루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저는 루시, 루시 키리노예요."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 동작을 한 것은 금속으로 된 오른손이었는데, 살아있는 손처럼 자연스러워서 올란디르는 잠시 그것이 의수라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

"만나서 반갑소, 루시." 올란디르가 정중하게 답했다. "그런데... 상상 속 존재라는 게 무슨 뜻이오? 나는 기나긴 세월 동안 여러 대륙을 여행했지만, 엘프는 어디에나 있었고 인간과의 교류도 잦았소이다."

"그게..." 루시는 잠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 세계에는 엘프가 없어요. 드워프도 오크도 없고, 오로지 인간만 있죠. 저희들에게 있어 엘프는 작가들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종족이에요. 소설이나 영화에만 나오는..."

"영화?"

"아, 음... 움직이는 그림이라고 할까요? 이야기를 영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올란디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되는 듯 안 되는 듯한 표정이었다.

"흥미롭군. 그렇다면 당신의 세계에서는 내가 환상 속 존재였단 말이오? 그런데 하긴, 나 또한 인간을 제법 봐 왔지만, 당신 같은 복식을 갖춘 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소. 그저 문화권이 다른 것만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구석이 있군.”


올란디르의 시선이 루시의 의수로 향했다.

"특히... 저 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해 물어봐도 되겠소?"

루시는 자신의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들을 물결치듯 구부렸다 펴며 보여주었다.

"이건 의수예요. 제 진짜 팔은... 사고로 잃었거든요."

그녀의 표정이 순간 굳었지만, 곧 다시 밝아졌다.

"하지만 과학기술 덕분에 이렇게 새 팔을 얻었어요. 진짜 팔처럼 느낌도 있고, 힘도 조절할 수 있죠. 심지어..."

루시는 손목을 축으로 손을 360도 회전시켜 보였다.

"이런 것도 가능해요. 진짜 팔로는 할 수 없는 일이죠."

올란디르는 감탄하며 말했다.

"놀랍구려. 나는 처음에 어떤 대마법사의 작품인 줄 알았소. 하플링들이 만드는 기계장치 중에서도 저토록 정교한 건 본 적이 없소이다.”

"마법사요?" 루시가 웃었다. “하하, 마법이라면 조금 더 낭만있었겠지만, 이건 과학기술의 산물이에요. 우리 세계에는 마법이 없거든요. 대신 과학기술이 발달했죠. 이 의수도 전자회로와 인공근육으로 만들어진 거죠."

"전자회로? 인공근육?"

"음... 설명하기 어렵네요. 물질과 에너지의 법칙을 이용한 거예요. 과학자라는 사람들이 이런 기술들을 연구하고, 저는 그 결과물을 사용할 뿐이죠.”

올란디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당신의 세계에서는 마법 대신 그 '과학'이라는 것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해내는 것이로군."



97B8F158-9A6D-4A5C-A787-70F8C2B3F2E9.png


"맞아요. 그리고..." 루시의 눈이 다시 반짝였다. “혹시 올란디르씨는 마법을 쓸 줄 아세요? 진짜 마법을?"

올란디르는 그녀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며 옛 기억들이 떠올랐다. 칼란도, 메리도 그랬었다. 인간들은 항상 새로운 것에 목말라 했다. 엘프들처럼 '이미 다 아는 것'이라며 무심히 지나치지 않았다.

"마법이 전공은 아니지만," 올란디르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가벼운 장난 정도는 부릴 수 있지."

그는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손가락 사이로 미세한 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 빛은 점차 형태를 갖추며 작은 나비로 변했다. 오로라처럼 초록색과 파란색, 분홍색이 어우러진 날개를 가진, 유령처럼 투명한 나비.

나비는 올란디르의 손바닥에서 날아올라 테이블 위를 맴돌았다. 날갯짓할 때마다 빛의 가루가 흩날리며 허공에 흔적을 남겼다.

"와..."

루시는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녀의 왼손이 천천히 올라가 나비를 향했다. 나비는 그녀의 손가락 끝에 사뿐히 앉았다. 루시는 숨도 쉬지 않고 그 나비를 바라봤다. 나비의 날개가 천천히 접혔다 펼쳐지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비쳤다. 그러다 나비는 작은 불꽃이 되어 반짝이며 사라졌다.

"믿을 수가 없어요..." 루시가 중얼거렸다. "진짜... 진짜 마법이었어요."

그녀는 올란디르를 바라봤다. 약간이지만 눈가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올란디르는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의 초급 마법에도 눈에 띄는 감정적 동요를 보이는 루시를 보며, 확실히 그녀가 자기 세계의 사람이 아님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우리 세계에서는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결국 기계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거든요. 하지만 지금 당신은... 그냥 손짓만으로..."

"마법도 나름의 원리가 있소." 올란디르가 부드럽게 말했다. "다만 당신의 과학과는 다른 원리일 뿐이지."

"그래도..." 루시가 미소 지었다. "너무 낭만적이네요. 현실에서 이런걸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그녀는 잠시 나비가 앉았던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가, ‘아차’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얘기하는게 반가워 깜빡했네요. 차라도 한 잔 드리고 싶어요. 여기 온 지 일주일 됐는데, 당신이 제대로 대화할 수 있는 첫 번째 사람이거든요."

"일주일이나?"

"네. 저기 있는 손님들 보이시죠?"

루시는 주변을 조심스럽게 가리켰다.

"저 안개 같은 분은 눈빛으로 소통하는 것 같고, 저기 촉수 생명체는... 너무 소름 끼쳐서 가까이 가지도 못했어요. 이 공간이 언어를 번역해 주긴 하는데, 저희처럼 음성 언어가 통하는 종족이 아니면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더라고요."

"그랬군." 올란디르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당신을 만났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익숙한 생김새에, 말도 통하고..." 루시가 활짝 웃었다. "비록 엘프긴 하지만, 제게는 거의 인간이나 다름없어 보여요."

"나도 마찬가지요." 올란디르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나도 한 때 인간 벗이 있었으니.”

"그럼 여기서 기다리세요. 금방 올게요!"




루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올란디르는 그녀가 커다란 금속 기계를 조작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기계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낯선 향기가 퍼졌다. 고소하면서도 씁쓸한, 이국적인 냄새.

잠시 후 루시가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여기요. 이건 커피예요. 제 세계에서는 아주 흔한 음료인데, 여기서도 만들 수 있더라고요."

‘고맙소’ 올란디르는 찻잔을 받아들며 말했다. 잔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가 좋았다. 그는 잔을 코 가까이 가져가 향을 맡았다.

“우리 세계에선 맡아본 적 없는 향이군. 그러나 매력있소.”

“네, 향이 참 좋죠? 뜨거우니 조심히 드세요.”

올란디르는 한 모금 마셨다. 코로 스미는 고소한 풍미와 함께 쓴맛이 혀를 감쌌다가 목으로 넘어갔다. 엘프들의 차와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강렬하구려."

"그죠? 처음에는 쓰지만, 익숙해지면 중독성이 있어요."

루시도 자신의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창밖의 별무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여기 처음 왔을 때는 너무 무서웠어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제가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미쳐버린 건 아닌지..."

"나도 마찬가지였소." 올란디르가 말했다. "저 안개 계단을 올라올 때는 혹시 내가 떨어져 죽는 건 아닐까 생각했지."

"안개 계단이요?"

"절벽 끝에서 갑자기 안개가 계단을 만들었소. 마흔아홉 개의 계단을."

"저도 비슷했어요. 제 연구실 벽에서 갑자기 문이 나타났거든요. 아르데코 양식의 검은 문이요. 별이 박힌..."

“아르데코가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검고 별이 박힌 느낌이라면, 아마도 똑같은 문을 말하는 것 같구려. 마지막 계단 끝에 그 문이 있었지."

둘은 서로 다른 세계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하지만 같은 문을 통해 이곳에 온 것이다.


E9106C1C-126C-4C63-8CCB-DE767B8E125C.png


"이 공간은 대체 어디일까요? 루시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제 머릿속 인공지능 단말기로 검색을 해봤더니, 이 곳은 제가 사는 은하단의 중심부래요. 참고로 은하라는 건 저기 별들 사이에서 나선형으로 도는 천체인데, 그 안에 수없이 많은 별들이 모여 있죠."

루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밖을 응시했다.

"저희 세계 사람들은 아무리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고 기술을 발전시켜도 우리가 사는 은하 하나조차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런데 저는... 그냥 문 하나를 통과했을 뿐인데, 어떤 인류도 도착한 적 없는 곳에 와 있네요."

그녀는 올란디르를 마주보았다.

"마치 누군가 이걸 원한 것 같지 않아요? 우리처럼 서로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걸요."

올란디르는 루시의 한쪽 눈을 바라보았다. 조리개처럼 회전하는 형상이 보였고, 거기서 푸른 빛이 아른아른 퍼져나왔다. 마치 그녀가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것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세계가 교차하는 교류의 장을..." 올란디르가 천천히 말했다. "누군가 원했던 것일지도 모르겠군."

"그래서 저기 있는 다양한 존재들이 이곳에 모일 수 있는 거겠죠. 각자 자기 세계에서 이 문을 통해서요."

올란디르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흐르는 은하수, 반짝이는 모래알 같은 별들, 그리고 저 거대한 태양.

"장엄하구려."

그가 중얼거렸다.

"땅 위에서 올려다보던 밤하늘을 빼닮았소.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 세상을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루시도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광활한 우주를 보고 있자니, 문득 자신이 살던 세계가 떠올랐다.

"저도 그래요."

루시가 조용히 말했다.

"이런 풍경을 보고 있으면... 제가 얼마나 좁은 세상에서 살았는지 느껴져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마치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이어갔다.

"지구라는 조그마한 행성 안에서도 티끌만 한 저라는 존재가, 그저 빌딩 숲 사이 어떤 연구실에서 죽어라 일만 하고 있었다는 게... 참 하찮게 느껴진달까.”

올란디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는 그가 '빌딩 숲'을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짐작했는지, 설명을 덧붙였다.

"아, 빌딩 숲이라는 건..." 루시가 덧붙였다. "콘크리트와 금속으로 만들어진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도시예요. 창문을 열어도 보이는 건 다른 건물뿐이죠. 하늘도 건물들이 다 가려버려서 조각조각 난 모습만 보이고요."

올란디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의 말에서 묘한 공허함이 느껴졌다.

"올란디르씨는 그늘 숲에서 오셨다고 했었죠?” 루시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소. 대륙 서쪽 끝, 안개가 자주 끼는 깊은 숲이오. 수백 년 묵은 나무들이 하늘을 가릴 만큼 빽빽하게 자라있지."

"숲..." 루시의 눈이 반짝였다. "진짜 숲에서 사셨군요. 제가 알기로 엘프는 그렇게 자연과 함께 사는 평화롭고 고귀한 종족이라고 들었어요. 긴 세월을 누리면서..."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말하면, 저는 그런 삶을 오랫동안 동경해왔거든요. 자연과 함께 사는 삶을요.



루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네오도쿄에서 태어났어요. 과학이 발달한 도시였죠. 하지만 그만큼 대가도 컸어요. 환경은 파괴됐고, 녹지는 거의 사라졌죠." 그 말을 하면서 그녀는 손에 어떤 네모난 단말기를 꺼내들고는, 네오도쿄라는 곳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치 마법사들의 연구서에서나 보던 움직이는 그림처럼 보였으나, 훨씬 정교하고 사실적인 모습이었다.

"거기서는 사람이 그 자체로 존중받지 못해요.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만이 가치의 기준이었죠. 저도 그저 거대한 회사의 작은 톱니바퀴였을 뿐이에요."

루시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그런 삭막한 도시에서, 남아 있는 숲과 자연을 볼 때마다 항상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숲 속의 생명체들은 그저 살아만 있어도 저렇게 아름다운데, 왜 우리는 조금이라도 쉬려 하면 가치를 잃고 사라지는 각박한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요."

올란디르는 찻잔을 내려다보며 잠시 침묵했다. 그의 손가락이 잔의 테두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동경하던 그 삶은..." 그가 천천히 말했다. "사실 사라졌을지도 모르오.”

"네?" 루시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물론 엘프들도 저마다 다른 문화권에 속해있소. 내가 모든 엘프를 대변할 수는 없지. 하지만 내 알기로 대다수의 엘프들은... 숲처럼 평화로운 종족이라기보다는 권태에 찌들고 쓸데없이 예민한 자들이지."

올란디르의 목소리에는 쓴웃음이 섞여 있었다.

"사람의 본질을 보지 않고, 귀함과 천함을 출신 성분으로 나누오. 어느샌가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아버린, 고리타분한 종족이 되었소.” 그는 안타까움과 분노 사이의 감정을 느끼듯 목소리를 무겁게 깔며 말했다.

"숲 속의 모든 존재는 태어나고, 자라고, 죽소. 그리고 썩어서 다시 흙이 되지. 순환하는 거요."

찻잔 속 커피에 비친 얼굴을 보던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엘프는 오래 살아요. 늙지도 않소. 그런데 그게 오히려 독이 됐소. 변화가 없으니, 생각도 멈췄소. 그렇게 속부터 병들었소."


56443AF3-C836-49CB-94F5-2037404CB371.png


루시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게….”

올란디르는 그녀를 힐긋 올려다보았다.

“이상하지 않소? 당신이 동경하던 내 사회도, 모습만 다를 뿐 속은 똑같다는게.”

"네." 루시는 자신의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렇네요. 완전 반대되는 이야기 같은데, 어쩜 이렇게 비슷한지….”

"제 세계에서는 인간이 도구화되었어요. 사람들은 더 이상 삶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요. 눈에 보이는 수치로 능력을 평가받고 줄을 세워요. 그 줄에 서 있는 인간들은 다른 인간을 짓밟고 한 칸이라도 더 앞으로 가기 위해 경쟁하죠.”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출신 성분이라고 하셨죠? 우리도 비슷해요. 어느 기업에 속해있는지,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부모가 누구인지... 그런 것들이 사람의 가치를 정해요.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꿈을 꾸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올란디르는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저는..." 루시가 계속 말했다. "올란디르씨에 비하면 갓난아기에 불과하겠지만, 이미 권태를 느끼고 있어요. 오로지 생존만을 위해 살다보니, 꿈은 사라지고 매일매일이 똑같아요. 연구실에 가서, 정해진 일을 하고, 돌아오고, 자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죠.”

"천 년을 산다고 다르지 않소." 올란디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히려 더 오래 살수록, 그 권태는 더 깊어지지."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왔지만, 같은 고통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루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올란디르씨는 엘프 사회를 떠나신 건가요?"

"육백 년 전에." 올란디르가 대답했다. "형식과 예법에 얽매인 긴 생의 반복을 견딜 수 없었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궁전의 정원, 기술적으로는 완벽하지만 혼이 없는 예술들..."

"혼이 없다..."

"그들의 예술은 천 년을 갈고닦아서 기술적으로 찬란하오. 하지만 정작 살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

루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쪽은 반대예요. 너무 빨라서 죽어버렸죠.”

“빨라서?”

"네. 우리 사회에서는 모든 게 너무 빠르고, 너무 자극적이에요. 며칠동안 책을 읽거나,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사람은 사라졌어요. 고작 1분에서 30초짜리 영상들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사람들은 그걸 미친 듯이 소비해요. 손가락 한 번 튕기면 다음 자극, 또 튕기면 또 다음 자극..."

루시는 자신의 왼손으로 허공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했다.

"천천히 생각할 시간 따위는 없어요. 깊이 느낄 여유도 없고요. 그냥 순간적인 재미, 순간적인 흥분, 순간적인 분노... 말초신경만 계속 자극하다가 끝나버려요. 느린 호흡으로 얻을 수 있는 본질 같은 건 아무도 찾지 않아요. 너무 느리고 지루하니까요."

"그렇군..." 올란디르는 루시가 표현하는 용어들을 온전히 알진 못했지만 그녀가 느끼는 감정만큼은 똑똑히 이해할 수 있었다. "흥미롭구려. 우리는 정반대인데 같은 곳에 도착했소."

"무슨 뜻이에요?"

"엘프들은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일상의 소소한 자극을 하찮은 것으로 치부해버렸소. 슬픔도, 기쁨도, 분노도... 모든 감정이 '지나가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그래서 자극을 느끼지 못하게 된 거요."

올란디르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네는 여유 없는 삶에 떠밀리다보니 너무 강한 자극에 중독되어서, 섬세한 감정을 느낄 수 없게 된 것 같소. 결국..."

"본질을 잃어버린 건 똑같네요." 루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소." 올란디르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엘프사회를 떠났고, 인간들과 함께 모험을 했소. 단명종이라 불리는 그들이지만, 매 순간을 가치있게 살아갔지.”

루시는 조용히 자신의 커피를 마셨다.

"부럽네요. 저는 떠날 용기가 없었어요. 그냥... 그냥 매일을 견뎌내고 있었죠."

"하지만 당신은 지금 여기 있지 않소?" 올란디르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 문을 열고 들어온 것 자체가 용기 아니었겠소?"

루시는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저도... 뭔가 새로운 것을 찾고 있었나 봐요."

"우리 모두 그렇소." 올란디르가 말했다. "권태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 본질을 찾으려는 갈망... 그것이 우리를 이곳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르지."

두 사람은 다시 창밖의 별무리를 바라봤다. 천천히 흐르는 은하수, 그 장엄한 광경 앞에서 그들의 고민은 작아 보였지만, 동시에 더욱 선명해졌다.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05화2화) 별무리 찻집 1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