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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별무리 찻집 4부

by 진하린
“제가 도망친 얘기를 하기 전에 재미있는 거 하나 알려드릴까요?”


루시는 식어버린 커피잔 위에 놓인 은색 스푼을 들어 창밖을 가리켰다. 스푼이 가리키는 곳에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의 덩어리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것이 ‘별’의 본 모습이라 했던가.

“저기 저 수많은 별 대부분은 수천만 년에서 수억 살 정도 되었대요. 별이 탄생하고 저렇게 이글이글 타오르는 모습을 갖추기까지의 과정을 과학자들이 계산해 냈거든요.”

내내 차분하던 올란디르의 눈이 커졌다. 천 년을 살아온 그에게도 억 단위의 시간은 낯선 개념이었다. “수억이라…. 상상이 안 가는 규모로군.”


루시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저도 그저 과학자들이 연구한 내용을 들어서 알 뿐, 감히 짐작도 못 할 시간이죠.”

그녀는 시선을 돌려 올란디르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저 별들은 과연 권태를 느낄까요? 누가 봐도 지나치게 긴 수명을 갖고 있잖아요. 천 년을 산 올란디르 씨도 권태에 찌들었다고 하셨는데… 저 영원히 불타는 별들은 오죽할까요.”

올란디르는 그녀의 부드럽게 받아내며 말했다. “별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의식이 있다면 필시 권태를 느끼겠지. 당신처럼 30년을 살고도 느끼니까 말이오.”


“맞아요. 사실 그 말을 하고 싶었어요.”

루시는 씁쓸한 표정으로 스푼을 내려놓았다. “저는 고작 30년밖에 안 살았는데도 대체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인생은 왜 이리도 긴지. 이딴 식으로 쳇바퀴 돌듯 매일매일 똑같이 굴러갈 거면, 그저 ‘기능’하기 위해 존재하기만 할 거면….”

그녀의 시선이 다시 창밖의 무심한 별들에게 머물렀다.

“그저 하늘에 떠있기만 하는 저 별들처럼, 아무 감정도 없었으면 평온했을텐데.”








루시는 원래 꿈이 많은 소녀였다.

그녀가 <스타워즈>라는 고전 영화를 처음 본 건 아홉 살 때였다. 루시의 시대에서 그 영화는 이미 백 년도 더 된 유물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낭만은 여전히 유효했다. 타투인 행성에서 반중력 포드레이서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할 때, 어린 루시의 가슴 속에서도 엔진이 켜졌다. 빛으로 이루어진 검이 웅웅거리며 부딪칠 때, 그녀는 과학이 만들어낼 수 있는 마법 같은 미래를 꿈꿨다.

'나도 저런 걸 만들 거야.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가슴 뛰게 하는 기술을.'

그녀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지식을 흡수했다. 머릿속은 언제나 공상과학과 판타지 세계로 가득 차 있었다. 상상력은 그녀의 유일한 날개였고, 그녀는 그 날개로 어디든 날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날개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른이 되어 마주한 '네오도쿄'는 영화 속 모험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곳은 거대한 회로 기판이었고, 인간은 그 기판 위를 흐르는 전류, 혹은 낡으면 교체되는 저항 부품에 불과했다. 꿈은 생존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무가치한 사치였다. 경쟁 사회에서 몽상가는 도태 1순위였다. 그녀는 살기 위해 스스로 날개를 꺾고 상상력을 거세했다. 오직 효율과 성과만을 머릿속에 채워 넣었다.

덕분에 그녀는 ‘성공’했다. 친구들을 짓밟고, 감정을 죽이며, 누구보다 빠르게 성과를 내는 유능한 회사원이 되었다. 높은 연봉을 주는 거대 기업에 입사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그 회사는 그녀에게 돈을 주는 대신, 삶의 나머지를 모두 압류해갔다.


“매일 야근이 이어졌어요. 제가 온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은 잠들기 전 고작 두 시간뿐이었죠. 눈을 뜨면 다시 회사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으로 돌아가야 했고요.” 루시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갈라졌다. “무한한 경쟁, 1분 1초도 낭비해선 안 되는 효율성. 회사는 쥐어짜 낼 수 있는 한계까지 인간을 착취했어요. 뒤처지면 바로 폐기 처분되는 세상이니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서버실 점검을 하던 그녀 위로, 고정 장치가 헐거워진 거대한 서버 랙이 덮쳤다. 엄청난 무게가 그녀의 오른팔을 짓이겼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기절했던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하얀 병실 천장을 보고 있었다.







“눈을 뜨고 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뭔지 아세요?” 루시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아, 출근해야 하는데 늦잠 잔 거 아니야?’였어요. 팔이 없어진 채 병실에 누워있는 와중에도, 제가 부품으로서의 기능을 못 하고 있을까 봐, 그래서 버려질까 봐 전전긍긍했던 거죠.”

올란디르는 찻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비참하고 어두웠던 심연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회사 법무팀 직원이 찾아왔어요. 그리고 제 팔에 대한 ‘회사의 결정’을 통보받았죠.” 루시는 떨리는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팔, 차가운 금속 의수를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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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의사가 말하길, 사고 직후 바로 이송해서 긴급 수술을 했다면 제 팔을 살릴 수 있었대요. 신경이 좀 손상되긴 했어도, 2년 정도 꾸준히 재활하면 본래의 감각을 찾을 수 있었다고요.”

그녀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회사는 신고를 늦게 했어요. ‘보안 절차상 외부 인력 진입 승인’이 필요하다는 핑계였지만, 사실은 그사이에 사고 현장을 수습하고 계산기를 두드리느라, 제 팔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을 고의로 흘려보낸 거죠.”

루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배어 나올 듯했다. “복잡한 신경 재건 수술과 긴 재활 치료를 지원하는 것보다, 그냥 팔을 잘라내고 최신형 기계 팔을 달아주는 게 회사 입장에서는 ‘더 저렴하고 효율적’이었던 거예요.”

“저렴하다….” 올란디르가 탄식처럼 내뱉었다.

“네. 비용 절감이죠. 게다가 기계 팔을 달면 재활 기간도 필요 없으니 바로 업무에 복귀할 수 있잖아요? 그들은 저에게 퇴원 즉시 복귀하라는 서한을 보냈어요. 위로의 말 한마디 없이, 병원비와 의수 비용을 대줬으니 할 도리는 다했다는 듯이요.”


루시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매끄러운 금속 손등 위로 흘러내렸다.

“그때 문득, 아주 옛날에 봤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더라고요.”

“영화 말이오?”

“네. <스타워즈: 로그 원>이라는 영화였어요. 거기서 주인공과 동료들은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다 전멸해요. 그들의 희생 덕분에 세상은 구원받았지만… 정작 그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죠.”

루시의 목소리에 깊은 허무가 서렸다. “어릴 땐 그 희생이 숭고해 보였는데, 병상에 누워 제 잘린 팔을 보니 생각이 바뀌더군요. ‘아, 나는 주인공이 아니구나.’ 그저 잊혀질 엑스트라 중 하나구나.”

그녀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영웅은 고사하고, 적어도 인간 대우는 받을 줄 알았는데…. 제 착각이었어요.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희생해도, 그들에겐 그저 고장 나면 갈아 끼우는 부품일 뿐이었으니까요.”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 때부터 저는 그저 살아있는 시체가 되어버렸어요.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오로지 노동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삶. 누군가가 나를 인간으로서 대해주길 포기한 삶이었죠.”

긴 침묵이 흘렀다. 거대한 은하수가 흐르는 창가, 두 이방인은 서로 다른 세계의 비극을 공유하며 앉아 있었다.


올란디르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의 길고 하얀 손가락이 루시의 차가운 금속 의수 위에 얹어졌다. 루시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루시.” 올란디르의 목소리는 낮지만,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대는 자신을 부품이라고 했소?”

“네… 사실이니까요.” 루시는 풀 죽은 목소리로 반응했다.

“아니오.” 올란디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동자가 루시의 푸른 눈, 그리고 기계로 된 의안을 깊이 응시했다.

“기계는 아파하지 않소. 부품은 자신이 대체되는 것에 대해 분노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소. 당연히 꿈도 꾸지 않지.“

그는 루시의 의수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오직 살아있는 영혼만이 고통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법이오.”

“이 팔은 그대가 부품이라는 증거가 아니라, 그 모진 고통을 견뎌내고 살아남았다는 훈장이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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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란디르가 창밖의 별들을 가리켰다.

“보시오. 권태에 찌든 늙은 엘프와, 삶에 지친 인간 아가씨가, 시공을 넘어서 이 신비로운 찻집에 마주 앉아 있소. 우리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 고통을 견디고 살아있지 않았다면, 결코 보지 못했을 풍경이지.”







올란디르는 잠시 찻잔을 내려놓고, 문득 생각난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대의 세계에 있다는 그 이야기 말이오. ‘반지의 제왕’이라고 했나? 그중에서도 아라곤과 아르웬의 이야기가 꽤 흥미롭더군.”

루시가 젖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 엘프가 인간을 위해 불멸의 삶을 포기하는 이야기요?”

“그렇소.” 올란디르의 눈빛이 잠시 먼 과거를 향했다. “사실 나도 한때는 그 아르웬처럼, 내 긴 수명을 줄여서라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떠날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지. 사랑하는 이들이 흙으로 돌아갈 때 나도 함께 눈 감을 수 있다면, 이 지독한 상실의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말이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야기와 달랐고, 나는 남겨졌소.”

“엘프들의 사회로 돌아가자니 끔찍한 권태와 허례허식이 싫었고, 단명종들과의 연을 이어가자니 상실이 너무 아팠소. 그래서 그저 숨만 쉬는 유령처럼 150년을 홀로 보냈지. 누구와도 깊은 연을 맺지 않고.”

올란디르는 다시 루시를 똑바로 응시했다. 차분했던 그의 눈에 장난기가 깃들었다. “헌데 참 묘하지 않소? 내가 그렇게 비겁하게 150년을 도망친 덕분에, 기어이 살아남아 이곳에 오게 되었고, 당신을 만났으니 말이오.”


그가 몸을 살짝 앞으로 숙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솔직히 말해보시오. 당신은 분명 꿈속에서라도 나 같은 ‘진짜 엘프’와 만나기를 고대하지 않았소?”


그러자 루시가 눈물을 미처 닦아내지도 못한 채, “푸흡” 하고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들어온 엘프의 능청스러운 농담이 그녀의 긴장을 단번에 무너뜨렸다.


“네, 맞네요. 정말 그래요.” 루시는 코를 훌쩍이며 웃었다. “제 세상에선 인간은 정말 고독한 존재거든요. 엘프뿐만 아니라 오크도, 드워프도 아무도 없으니까요. 인간과 말이 통하는 다른 지성체 자체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외계인을 찾거나, 판타지 소설을 쓰면서 외로움을 달랬나 봐요.”

올란디르는 따스한 미소를 띠며 루시에게 손을 뻗었다. 루시 또한 망설임 없이 자신의 차가운 기계 손으로 올란디르의 따뜻한 손을 맞잡았다. 서로 다른 온도가 맞닿아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그대와 나는 만났소.”

올란디르는 맞잡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며 말했다. “덕분에 나는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사람들이 나고 자란 땅을 벗어나, 천구에 새겨진 저 별들을 마주하는 신비로운 이야기를 들었소.”

“별들의 수명까지 헤아릴 수 있고, 용이 없어도 강철 날개로 하늘을 날 수 있는 세상이라니…. 내 천 년을 살며 들어본 어떤 음유시인의 노래보다도 흥미로웠소.”

그는 루시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마지막 확신을 심어주었다.

“결국,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았기에 이 모든 기적을 겪을 수 있었던 거요. 상실은 아프지만, 살아있음은 여전히… 꽤 괜찮은 일이구려.”


루시의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네."
"살아있어서, 다행이에요.”



상상도 못 했던 시간에 상상도 못한 방법으로 방문하게 된 이 장소. 그곳에는 천 년을 앓아온 늙은 엘프도, 부품으로 전락했던 상처 입은 인간도 없었다.

그저 각자의 세계가 짊어지게 한 고독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서로의 어깨를 빌려 숨을 고르는 두 '생존자'가 있을 뿐.


창밖에는 여전히 거대한 은하수가 무심히 흐르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이제 그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도 더 이상 작아지지 않았다.

식어버린 커피의 마지막 한 모금은 쓰지 않았다. 그 끝맛에는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담담한 용기가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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