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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별무리 찻집 5부

by 진하린


"살아있어서, 다행이에요."


루시의 한마디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찻집의 공기가 서서히 떨려왔다. 마치 꿈 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수탉의 울음소리처럼, 견고하던 공간이 알수없는 힘에 의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흐르던 은하수가 묽게 번졌고, 은은하던 조명은 수명을 다한 촛불처럼 위태롭게 깜박였다.

루시와 올란디르 둘 다 처음엔 당황하며 두리번 거렸지만, 이내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기적 같은 만남이 이제 끝을 고하고 있다는 것을.


"시간이... 다 된 모양이구려."


주변을 둘러보던 올란디르가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은 채 루시를 마주보았다. 루시의 표정에도 아쉬움과 당혹감이 스쳤다. 찻집은 둘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도 주지 않고, 빠르게 무너져갔다. 벌어진 균열 사이로 처음에 계단을 올랐을 때와 같은 짙은 안개가 새어들어왔다.

몰려드는 안개에 서로의 모습조차 흐릿해져가려던 찰나, 올란디르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품 안주머니로 향했다. 손끝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닿았다. 백년 넘도록 단 한 순간도 떼어놓지 않았던 메리의 브로치였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것은 그의 과거이자, 사랑이었고, 동시에 그를 백 오십 년간 고독 속에 가두어둔 '상실의 두려움' 그 자체였다.

이걸 건네줘도 되는 걸까? 이 마지막 기억마저 내 손을 떠나면, 나는 정말로 메리를 잊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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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눈앞의 루시는 문을 열고 들어와 올란디르의 기나긴 권태와 두려움을 무너뜨려준 존재였다.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그녀는 올란디르에게 '살아가야할 이유’를 다시 가르쳐주었다. 찰나의 망설임 끝에, 올란디르는 결심한 듯 손을 뻗었다.

"이걸 가져가시오!"

그가 브로치를 루시에게 던지듯 건넸다. 그것은 단순한 작별 선물이 아니었다.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아 닫아걸었던 마음의 빗장을, 이제는 풀겠다는 선언이었다.

루시 역시 목에 걸고 있던 줄을 거칠게 잡아 뜯었다.

"이거 받아요! 제가... 제가 거기 있었다는 증거예요!"

두 사람의 손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따뜻한 체온과 차가운 물성이 혼란스럽게 뒤섞인 순간,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

올란디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들숨과 함께 들어온 공기는 그윽한 커피 향이 아닌, 비릿하고 차가운 바다 내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절벽 끝에 서 있었다. 발아래로는 익숙한 파도가 바위를 때리고 있었고, 머리 위로는 찻집의 은하수 대신 창백한 낮달만이 떠 있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였다. 안개 계단도, 검은 문도, 신비로운 찻집도 흔적조차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꿈…이었나."

허탈함에 다리에 힘이 풀리려던 찰나, 손바닥에 닿는 이질적인 감촉이 그를 현실로 붙잡아 매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폈다. 그곳에는, 이 세계의 어떤 장인도 만들어낼 수 없는, 매끄럽고 단단한 사각의 판이 놓여 있었다.




마차는 덜컹거렸지만, 올란디르의 손은 그 진동보다 더 잘게 떨리며 이질적인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창밖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도 꿈결 같고 헤어나오기 힘든 순간이었다. 그는 단명종과 연을 맺으면 따라오는 상실의 고통을 피하고 싶어서 다시는 누군가를 마음에 들이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그래서 홀로 오랫동안 관찰자로 살아왔었다. 그러나 루시와 만난 그 찻집에서의 신비로운 일들, 다른 세상을 깨닫는 순간이 그의 다짐을 무너뜨리게 되었다.

그래서 루시와의 만남 이후 이 이야기를 가장 먼저 전해야겠다 떠올린 대상은 동족 엘프들이 아니었다. 대신 다양한 종족들이 오고 가는 접경지의 여관 '바람이 쉬어가는 집'을 생각했다. 몇 년 전 잠시 머물던 마을에서 들었던 장소였다. 올란디르는 품 안의 물건을 쥐었다.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닿기를.' 그는 이 여운을 어떻게든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3일 밤낮을 마차에 몸을 맡긴 채 이동했다.


여관의 간판이 바람에 삐걱거렸다. '바람이 쉬어가는 집'이라는 글자 아래에는 여러 언어로 된 안내문이 덧붙여져 있었다. 드워프어, 엘프어, 인간의 공용어, 심지어는 오크어까지. 한 눈에도 여러 종족을 환영하는 여관임을 알 수 있었다.


올란디르는 깊게 숨을 들이켜고 문고리를 잡았다. 손이 차가운 쇠를 움켜쥔 채 잠시 멈췄다.

문 너머로 새어 나오는 소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왁자지껄한 목소리들, 맥주 냄새, 다양한 종족들의 체취. 수백 년간 피해왔던 '삶의 소란함'이었다.


올란디르는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등의 혈관이 파르르 떨렸다.

루시와 그렇게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음에도, 이렇게 많은 단명종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공간은 여전히 낯설고 두려웠다.


올란디르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이젠 벗어나야 한다.' 그는 두려움을 벗고 새로운 교류를 이어나가야만 한다. 그것이 루시가 그에게 남긴 용기였다.


그는 문을 밀었다.




여관 안은 북적거리고 있었다. 올란디르는 소란스러운 테이블들을 지나쳐, 가장 안쪽의 바 테이블로 향했다. 바 안쪽에서 잔을 닦던 여관지기가 올란디르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젊지만 깊이 있는 눈을 가진 청년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묵으실 건가요, 아니면 술만?"

"무엇이든 좋으니... 정신이 좀 들 만한 걸 주시오. 독할수록 좋겠소."

올란디르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갈라져 있었다. 여관지기는 잠시 그의 창백한 안색을 살피더니, 독한 와인 대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잔을 내밀었다.

"긴장하신 것 같아 보여서요. 데운 꿀술입니다. 빈속에 독주보다는 이게 나을 겁니다."

올란디르는 멍하니 잔을 받아들었다. 추운 날씨가 아니었음에도, 그의 손끝은 멈추지 않고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기온 탓이 아니었다. 150년 만에 마주한 세상의 소란함, 그리고 잠시라도 신경을 끄면 사라질것만 같던 일주일 전의 경험이 그의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두 손으로 따뜻한 머그잔을 꽉 움켜쥐었다. 도기 너머로 전해지는 열기가, 잔뜩 굳어있던 손가락 마디마디를 강제로 이완시켰다.

"먼 길을 오신 것 같군요. 행색에 지친 기색이 역력합니다."

여관지기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올란디르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사흘 밤낮을 마차에 몸을 맡긴 채 달려왔지. 사실... 최근에 무슨 일을 겪고나서 일주일 동안 한숨도 자지 못했소."

"일주일 동안이나요?"

"눈을 감으면... 그 모든 게 꿈으로 변해버릴까 봐 두려웠거든."

올란디르는 꿀술을 한 모금 마셨다. 끈적하고 달콤한 열기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과부하가 걸려 비명을 지르던 머릿속을 조금이나마 차분하게 눌러주었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여관지기와 눈을 맞췄다.

"이곳이... 모험가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곳이라고 들었소. 사실이오?"


"맞습니다. 자랑도 하고, 회한도 풀고, 때로는 허풍도 섞어가며 쉬어가는 곳이죠."

여관지기는 하던 일을 멈추고 올란디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야기꾼을 알아보는 직감이 발동한 것이다.

"손님께서도... 두고 가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가 보군요."

올란디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술의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 떨림이 잦아들자, 그는 젖은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개로 된 계단, 검은 문, 그리고 별들이 강물처럼 흐르는 찻집에 대하여.


처음에는 여관지기만이 흥미로운 눈으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무르익고, 올란디르가 찻집에서 만난 여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하자, 주변의 공기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


"그 여인은... 팔이 기계로 되어 있었소."

올란디르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처음 봤을 때는 장갑을 낀 것처럼 보였지. 엘프 장인이 만든 갑주보다도 부드럽고 유연하게 움직였으니까. 손가락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웠소. 그런데..."


올란디르가 루시의 팔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자, 근처 테이블에서 맥주를 마시던 한 드워프 남성이 잔을 탁 내려놓았다. 그는 굵은 턱수염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올란디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기계와 금속에 대한 본능적인 관심이 그를 끌어당기는 듯했다. 이내 그를 따라 호기심 많은 하플링 땜장이도 슬금슬금 자리를 옮겼다.


"컵을 들어 올리는데, 손목이 한 바퀴 돌더군. 완전히. 마치 경첩이 달린 것처럼. 그리고 팔뚝을 따라 푸른 빛줄기가 흘렀소. 마법진 같기도 했고... 아니, 마법진은 아니었어. 마나의 흐름이 아니라, 뭔가 다른 힘이었지."

드워프 장인은 올란디르의 묘사를 듣다가 이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잠깐만, 노형. 손목이 한 바퀴 돈다고?"

그가 자신의 손목을 붙잡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의수의 손목을 그렇게 자유롭게 만들면, 관절이 불안정해서 힘을 못 받을텐데… 아니, 그보다 먼저. 노형이 말한 그 정교한 손놀림 말이오. 검지와 엄지만으로 컵을 쥐는 동작을, 의수로 구현하는 건 아직 불가능한 걸로 알고 있소. 붉은 산맥의 기술자들이 수십 년을 매달려도 실패한 기술이란 말이오."

그의 말투에는 무례함보다는, 장인으로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기술적 난제에 대한 의구심이 가득했다.


하플링 땜장이가 키득거리며 끼어들었다.

"내 왼팔도 그렇게 성능 좋은 의수 한 번 써보고 싶구먼. 혹시 너무 놀라서 기억에 과장이 조금 섞여 들어간 거 아니유? 꿈이랑 현실은 헷갈리기 쉽잖수."

주변의 다른 모험가들도 하나둘씩 흥미를 보이며 모여들었다. '믿기 힘들지만 흥미로운 허풍'을 즐기는 청중의 눈빛이었다. 올란디르는 그들의 의심을 탓하지 않았다. 자신조차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테니까.

그는 조용히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 나 또한 내 눈을 몇 번이고 의심했으니까. 내가 벌써 노망이 들었나 싶었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달그락. 경쾌하면서도 낯선 소리가 났다.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리도, 금화가 떨어지는 소리도 아니었다.

여관 안 소음이 물러가듯 잦아들었다. 그곳에는 손바닥만 한 투명한 판이 놓여 있었다. 수정처럼 맑았지만, 그 두께는 종이처럼 얇았고 표면은 물방울조차 미끄러질 듯 매끄러웠다.


"재질이... 유리인가?"

드워프 장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숙였다.

"아니, 유리는 이렇게 얇게 가공하면 깨질 텐데."

옆에서 하플링 땜장이가 거들었다.


올란디르는 말없이 검지 끝을 그 투명한 판의 표면에 갖다 대었다. 그 순간이었다.

지잉-.

아주 미세한, 귀보다는 뼈를 울리는 듯한 짧은 진동음이 났다. 투명했던 판이 물을 머금은 천처럼, 내부에서부터 은은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그 판의 표면 위로, 정교한 그림 하나가 떠올랐다. 아니, 그것은 그림이 아니었다.

판 속에 갇힌 루시의 얼굴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듯 찰랑거렸고, 푸른 눈동자가 깜빡이며 정면을 응시했다. 마치 거울 속에 갇힌 사람처럼, 혹은 아주 작은 창문 너머에 그녀가 실제로 서 있는 것처럼. 그림 아래에는 이 세계의 언어가 아닌 낯선 문자들이 선명한 붉은색으로 박혀 있었다.


"이...!"

하플링 땜장이가 숨을 헉 들이켰다. 마법사 차림의 손님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다가와 판 위에 손을 올려댔다가 화들짝 놀라며 중얼거렸다.

"마력이... 전혀 없어."

드워프 장인은 판의 모서리를 손톱으로 툭툭 두드려보며 고개를 저었다.

"수정도 아니고, 유리는 더더욱 아니야. 이런 재질은 처음 보는군."

올란디르는 그들의 경탄 어린 눈빛을 바라보았다. 루시가 이 물건을 건넬 때의 표정이 떠올랐다. '제가 거기 있었다는 증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것이 그녀의 신분증이라오."

올란디르가 조용히 말했다.

"그대들도 아다시피, 이런 건 우리 세상에 존재했던 적이 없지. 내가 보고 온 세상을 입증할 도구가 이것뿐이라는 게 아쉽지만…”


“그녀의 이름은 루시. 루시라고 했었소."

올란디르가 손을 떼자, 판 속의 빛은 다시 서서히 잦아들며 평범한 투명 판으로 돌아갔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가짜라고 웃어넘기기엔 그 물건은 너무나도 정교했다.




소란이 멎어든 이후, 선술집에 머물던 이들 대부분은 잠자리에 들러 올라갔다. 올란디르와 소수의 손님들만이 남은 술과 함께 밤의 끝자락을 잡고 있었다.


구석에 앉아 있던 한 엘프 음유시인이 조용히 말했다.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그렇소."

올란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왔소. 이 이야기를 풀어놓기 위해."

음유시인이 하프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찰나를 사는 이들의 불꽃은 참으로 뜨겁지요."

올란디르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낡은 로브를 걸친 음유시인의 눈은, 잠든 인간 모험가들에게 머물러 있었다. 올란디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래서 데일까 두려워 도망쳤었소."

"허나 그 온기 없이 영원을 견디기엔, 우리의 밤은 너무 춥지 않습니까."

음유시인이 빙그레 웃었다. 더 이상 말은 없었다.



여관지기는 그 둘의 대화를 지켜보며 홀을 정리하다가 문득 생각난 질문을 올란디르에게 던졌다.

“오늘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굳이 이 곳까지 오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러자 올란디르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모험가들이 이야기를 풀어놓는 장소라고 알고 왔소만.”

그러자 여관지기가 살짝 당황해하면서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만… 이야기를 전하는 방법은 많았을 텐데요. 근처 마을에서도, 혹은 기록으로 남기셔도. 꼭 여기까지 오셔야 했던 이유가 있으십니까?”

그러자 올란디르가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말을 받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오. 그저..."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잊고 싶지 않았소. 근처 마을에서 떠들거나, 혼자 책을 쓰는 것만으로는, 그리고 내 손에 쥐어진 이 물건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소."

올란디르는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신분증을 만지작거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서는 말이오."

그는 신분증을 품 속에 넣었다.

“진지하게 들어줄 사람 앞에서 말로 풀어놓으면...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을 것 같았소. 메리와의 추억처럼."

여관지기는 올란디르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그는 바 아래에서 낡은 가죽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깃펜을 들었다.

"제가... 기록해도 될까요? 이 이야기를."

올란디르는 미소 지었다.

"그러시오. 그렇게 하면... 더 오래 남을 테니."


올란디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여관에 들어올 때의 떨림이나, 수백 년간 그를 짓누르던 권태의 그림자가 없었다.

"2층 방 하나 빌리겠소."

"네, 물론입니다."

여관지기가 열쇠를 건넸다. 올란디르는 은화 몇 닢을 카운터에 올려두고 계단을 향했다. 그의 뒷모습이 2층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여관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날 밤, 올란디르는 여관 2층 방에서 잠을 청했다.

침대의 왼편 창밖으로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여느때와 같이 평범한 별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올란디르는 가슴에서 신분증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신분증 위에서 루시가 미소 짓고 있었다. 그는 그 미소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루시는 이제 자신의 길을 찾았을까.'

올란디르는 신분증을 베개 옆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삶의 도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답을 찾았기를.'

그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계속 생각이 났다. 별무리 찻집이. 창밖의 성운이. 그 신비로운 공간이.


'다시 그 찻집에 갈 수 있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별무리 찻집에서의 기억은 강렬했고, 올란디르는 그 찰나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른 세상의 존재와 의견을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의 즐거움이 상실의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음을 느꼈다.

그는 침대에서 상체를 세워 기댄채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창 밖의 별들을 헤아리며 그 어딘가에 있을 별무리 찻집을 눈으로 찾는 시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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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능동적으로 찾아야 한다.'

내일 아침, 올란디르는 여관을 떠날 것이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단서를 찾을 것이다. 마흔아홉 칸의 계단. 안개로 만들어진 계단.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 이런 것들에 대한 기록이 어딘가 있을 것이다. 고대의 문헌에, 마법사 탑의 서고에, 드워프들의 전설에.


올란디르는 천 년을 살았고, 인내심이 있다. 시간도 있다. 그리고 이제는 목표가 있다.

'다시 그 찻집에 가기 위해. 미지의 존재를 만나기 위해.’






1층에서는 여관지기가 수첩을 펼치고 쓰기 시작했다.

여관지기는 멍한 표정으로 올란디르가 사라진 계단을 응시했다. 며칠 전, 검성 카맥이 다녀갔을 때 느꼈던 뜨거운 불꽃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깊고 서늘한 우주가 가슴 한구석에 똬리를 튼 것만 같았다. '나는 고작 백 년도 못 사는 인간인데…’ 천 년을 산 엘프조차 세상이 좁다며 저리도 눈을 반짝이는데, 나는 이 좁은 여관 카운터 안에서 반복되는 일상에 만족하며 살고 있었구나.


그는 행주를 내려놓고, 여관 구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까 올란디르와 대화를 나누던 엘프 음유시인이 술에 취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하프를 껴안은 채 세상모르고 자는 그 얼굴은 자유로워 보였다. 평소라면 다가가서 깨우거나, 2층 방으로 안내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관지기는 그저 가만히, 아주 오랫동안 그를 지켜보았다. 저 음유시인은 내일이면 하프 하나를 짊어지고 또 어디론가 떠날 것이다. 발길 닿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그는 깃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수첩 위로 잉크가 번져나갔다.

안개로 만들어진 계단. 마흔아홉 칸. 검은 문. 별들이 강물처럼 흐르는 찻집.

여관지기는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기록했다. 그리고 문득, 펜을 멈추고 2층을 올려다보았다. 저 위 어둠 속 방에서, 천 년을 산 엘프가 새로운 여행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여기, 카운터 안에서 그 꿈을 기록하고 있다.


적막 속에서, 그의 마음속 어딘가에 무언가가 차오르고 있었다. 오래 묵은 술병 속 압력이 코르크를 조금씩 밀어올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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