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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별무리 찻집 3부

by 진하린


올란디르는 대화를 이어가며 과거 칼란을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올란디르의 긴 인생에서 칼란과의 시간은 찰나와도 같았다. 그러나 천 년을 살며 가장 인상 깊었고, 가장 많이 성장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지금 루시와 나누는 대화가 먼지 덮인 기억 속 그 시절을 되살려내고 있었다.



"과거 나에게 칼란이라는 인간 친우가 있었소."


올란디르는 루시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아마도 지금의 그대와 비슷한 나이였을 게요."

그리고 올란디르는 루시에게 그간의 일들을 차근차근 풀어놓기 시작했다.








육백 년 전 어느 날, 올란디르는 지긋지긋한 엘프 사회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가족도 벗들도 알 수 없게, 편지 하나만 남긴 채 그늘숲을 떠났다. 그는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돌았다. 하플링들의 동산, 드워프들의 광산, 인간 나라의 교역지까지.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을 만났다.


칼란을 만난 것은 엘프 사회를 떠난 지 십수 년째였다. 여행 중 흡혈귀의 권역이 된 마을을 발견했고, 동시에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권속이 된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그를 제압했고, 산제물 의식을 준비하는 동안 헛간에 처박아두었다. 그렇게 꼼짝없이 죽을 위기에 처한 그의 앞에 칼란과 동료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흡혈귀를 퇴치하고 마을을 구출한 올란디르는, 한동안 함께 모험하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새로 생긴 동료들과 함께 몇 년간 던전을 탐색하기도 하고, 도적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기도 했다. 칼란과 동료들은 놀라울 정도로 도전적인 사람들이었다. 매일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살았다. 올란디르가 경험했던 것과는 삶의 밀도가 달랐다.

엘프들처럼 느릿느릿하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 침잠하지 않고, 꾸준히 움직였다. 모험과 도전, 배움 모든 면모에 있어서 그들은 항상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올란디르는 그들의 생동감이 싫지 않았다.


그렇게 올란디르는 동료들과 친분을 쌓았고, 그중에서도 칼란과 아주 깊은 관계가 되었다. 서로가 술자리를 하며 각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올란디르는 칼란을 만나기 전에도 단명종들의 세계를 유랑했지만, 어쩌면 십수 년 만에 처음으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이다.




“엘프들은 지금 권태에 찌들어 있어. 어느 누구도 새로운 것을 탐구하려 하지 않는다네. 새로운 기술, 예술, 마법 등 어떤 것이 나와도 ‘이미 예전에도 있었던 것이고, 그저 모습만 바꿔 반복되는 것’이라며 탐구하려 하지도 않지. 하지만 분명 시대는 변화하고 있고 엘프들은 도태되고 있어.”

올란디르가 모닥불에 장작을 던져 넣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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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사실 내게 있어서는 딱히 그게 이상한 일인지 모르겠군 그래. 인간도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변한다네. 새로운 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여태껏 걸어온 노선에서만 걸으려 하지. 이미 기력은 쇠했고, 그 길 밖으로 나가면 어떤 일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거든.”

칼란은 모닥불 속 김을 내뿜는 장작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저 장작에서 김이 빠져나가는 것 보이나? 나무속에 있는 수분이 빠져나가는 것일세. 그전까지는 나무가 다 타지 않지만, 수분마저 모두 잃으면 결국 까맣게 탄 숯이 되지. 결국 사람은 물기 가득한 젊은 시절에 불 속에 뛰어들어서, 모두 타버리면 호기심도 총기도 기력도 잃는 걸세.”


올란디르는 장작에서 나오는 김이 모닥불의 불꽃을 받아 무지개가 피어나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인간도 늙으면 엘프처럼 권태에 찌들고 호기심이 사라진다라. 결국 기나긴 시간 속에 지치고, 두려움을 배우고, 기력을 잃으면 변화가 없어지고 시들어가며 죽는구나.


올란디르는 칼란과의 대화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수백 년이 지나도 칼란처럼 진지하게 자신의 통찰을 내어준 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지적인 모습과 엘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관점으로 인해 그들은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짧았다. 올란디르는 시간 개념이 다르다 보니 종종 ‘짧은’ 모험을 다녀왔는데, 돌아올 때마다 칼란의 모습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대여섯 번의 재회를 반복했을 즈음, 칼란은 늙고 병들어 있었다.

“내가 무심해서 미안하네 친구. 시간이란 정말이지 쏜살같이 빠르군.”

“무슨 섭섭한 소리를 하는가? 잊지 않고 항상 찾아와 주는 것만으로도 반갑지.”칼란은 잠시 마당을 뛰어다니는 손주들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시간은 곧 끝나게 될 걸세. 자네는 오래도록 살아가겠지만, 인간의 몸은 너무나도 빨리 늙는구만. 아직 우리가 나눌 이야기들이 많은데 말일세.”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을 부르는 손녀딸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자네의 남은 시간을 함께 해도 되겠나?”올란디르는 처음으로 벗이 된 인간에게 마지막 시간을 내어주고 싶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하겠네. 나에겐 가족이 있어. 마지막을 지켜줄 이들은 많다네.”그리고는 올란디르의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 “다만, 그저 오래도록 나를 기억해 주게, 벗이여. 그거면 충분하네.”


올란디르는 슬펐지만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단명종의 생애는 찰나와도 같다. 그들의 죽음에 일일이 슬퍼할 수는 없다. 그것이 엘프와 단명종들의 차이니까.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왔을 땐, 칼란의 자손들만이 올란디르를 맞이했다. 칼란의 묘비 앞에서 묵념을 하고, 술을 바친 뒤 그의 딸과 날이 새도록 옛날얘기를 했다. 칼란은 참 멋진 친우였다고, 그가 아버지였음에 자랑스러워하라는 격려를 하고는 올란디르는 자리를 떠났다.




“아마도 칼란은 나와의 대화가 길어지면, 젊은 날 자신이 했던 말처럼 권태에 찌든 노인의 모습이 나올까 경계했던 것일지도 모르오. 젊은 인간의 총기를 기대하던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을 테니. 일종의 배려였겠지요.”

올란디르는 감상에 젖는 듯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루시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 한 동안 말을 아꼈다. 루시도 그의 감정이 가라앉기를 차분히 기다리며 커피를 홀짝거렸다. 그가 왜 인간인 자신과 대화를 할 때, 큰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후로 수많은 단명종들과 교류했소. 때로는 우리와 앙숙으로 유명한 드워프들과도 교류했고, 오크들의 부락에 머문 적도 있었지. 하지만 나는 결국 칼란을 만나기 이전으로 돌아가긴 힘들었나 보오. 다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었지.”


칼란을 잃고 백여 년이 흐르는 동안 올란디르는 수많은 단명종들과 교류했다. 드워프들의 보석세공소에서 함께 일했고, 오크들의 부락에서 그들의 전쟁 춤을 배웠으며, 하플링의 토굴에서 함께 벌꿀주를 마시기도 했다. 하지만 그 누구와도 칼란과 같은 깊이의 관계를 맺지 못했다. 모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어차피 곧 떠날 존재들이니까.'

올란디르는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친절하되 깊이 들어가지 않고, 함께 하지만 정들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가 메리를 만났지.”






풀벌레 소리가 찌르르 찌르르 들려오던 가을의 초입, 올란디르는 서쪽 대륙 끝자락의 작은 섬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이미 며칠째였다. 특별히 할 일은 없었다. 그저 광장 근처를 오가며 마을 사람들의 분주한 일상을 구경하고, 가끔 여관을 방문한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였다.


그러던 중 주근깨 투성이의 처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마을 사람들의 허드렛 일을 도우며 근근이 살아간다고 했다.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설거지를 하거나, 아이를 돌보거나, 빨래를 널거나. 하지만 몸이 약해 보였다. 다른 처녀들이 하는 일의 절반만큼만 하고도 힘겨움에 신음하는 일이 잦았다.

그런데 묘했다.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 손은 느렸지만 머리는 빨랐다. 일을 하다가 중간중간 마을사람들이 봉착한 문제에 대한 해법을 금방 내놓고는 했다. 직접 몸을 써서 해결하지는 못할지라도,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 명석함이 돋보였다. 다만 이 작은 섬 마을에서 그런 재능은 끼니를 보장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관심을 갖던 중, 올란디르는 마을 광장에서 그녀를 다시 마주쳤다. 그녀는 엘프들의 무역상이 가져온 그림을 보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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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네... 기술은 완벽한데 왜 이렇게 알맹이가 없는 것 같지?"

올란디르는 귀가 솔깃했다. 엘프 예술의 본질을 단번에 짚어낸 한마디, 그 한마디가 부모를 여의고 배움이 짧은 어린 여인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일반적인 인간들이라면 엘프들의 완벽에 가까운 기교와 기품 있는 양식을 찬양하기 바빴을 텐데, 그녀는 권위에 아랑곳 않고 작품 그 자체를 읽고 있는 듯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올란디르가 다가가 물었다. 메리는 놀란 표정으로 엘프를 올려다보았다가, 이내 조곤조곤한 말투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 그림 속 인물들을 보면요. 서로 대화하는 게 아니라 마치 무대 위 배우처럼 관객을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어요.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각도로만 서 있죠. 저기 부엌 장면에서는 하인의 손에는 굳은살이 하나도 없고, 화로에는 그을음 자국도 없어요. 식탁 위 과일은 전부 싱싱한데, 다른 계절 과일들이 함께 있어서 이질감이 들어요. 그리고 일반 가정이라면 말린 과일이나 절인 채소가 있어야 자연스럽지 않나요? 게다가 저 화분의 꽃잎들을 보세요. 벌레 먹은 자국도, 시든 잎도 하나 없어요. 마치 자연이 아니라 보석 세공품 같아요."

올란디르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감탄했다. 메리는 단순히 까내리기 위해 비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지적한 것은 엘프 예술이 수백 년간 빠져 있던 함정 그 자체였다. 이상화된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다 보니, 정작 현실이 지닌 불완전함에서 나오는 매력을 외면하는 가식적인 예술이 되었다는 것 말이다.

엘프들은 이를 '세련됨'이라 불렀지만, 메리의 눈에는 그저 공허한 완벽함일 뿐이었다. 권위 있는 양식에 짓눌려 아무도 함부로 비판하지 못하는 영역을, 이 무명의 처녀는 주저 없이 파고들고 있었다. 게다가 타당한 근거와 함께.


그런 그녀에게 올란디르는 흥미가 생겼다. 이내 자주 교류하게 되었다. 그녀의 명석함이 아까웠던 올란디르는 글을 가르쳤고, 역사를 가르쳤으며, 세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메리는 기대 이상의 속도로 거의 모든 것을 빠르게 흡수했다.

올란디르는 어느새 메리에게 엘프 사회의 권태에 대해서까지 털어놓고 있었다. 수백 년을 살며 쌓인 무료함,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오는 공허함. 그것이 자신을 그늘숲에서 떠나게 만든 이유 등등. 그녀라면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외롭겠어요."
메리가 조용히 말했다.


“외롭다?”

"영원히 산다는 건 결국 영원히 외롭다는 뜻 아닌가요? 주변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는데, 당신만 남아서 그들을 기억해야 하잖아요. 그보다 더 외로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올란디르는 말문이 막혔다.

메리는 그를 '불멸의 엘프'로 보지 않았다. 권위 있는 장수 종족으로 우러러보지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올란디르라는 한 사람이 지닌 고독을 읽어냈다. 그리고 그 고독에 공감했다.

“엘프들이 자신들 외의 존재들을 외면하고 배척하는 것을 보고, 재수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그들은 잃는 고통을 두려워했던 것 같네요. 사랑하면 아프니까, 사랑하지 않으려면 밀어내야 했겠죠.”


그 순간, 올란디르는 깨달았다. 자신이 메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올란디르는 과거 칼란의 통찰력과 생명력에 감탄했고, 함께 세상을 논했었다. 그것만으로도 소중한 우정이었다. 하지만 메리는 그 이상이었다. 그녀는 올란디르의 내면 깊숙한 곳, 그가 수백 년간 숨겨왔던 상처와 외로움까지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외면하지 않았다.




"칼란과는 달랐소." 올란디르가 루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칼란은 나의 벗이었지만, 메리는... 나의 전부였지."

그들은 반세기를 함께했다. 올란디르는 메리의 명석함에 반했지만, 어느새 그녀의 사려 깊은 이해심에 자신을 내맡겼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던 고독을 자신보다 한참 어리고, 짧게 사는 인간으로부터 이해받았다. 메리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올란디르로부터 해소했고, 올란디르는 엘프사회와 단명종의 사회 양 쪽에서 이해받기 힘들었던 자신의 삶이 긍정됨을 느꼈다.

올란디르는 이 순간이 영원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시간은 잔인했다. 올란디르의 눈에는 메리가 어제와 똑같아 보였지만, 그녀의 신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볼에 있던 주근깨는 주름으로 뒤덮였고, 검은 머리에 은빛이 섞였으며, 허리는 굽기 시작했다. 과거 몸이 약했던 메리를 걱정했던 올란디르는 둘 사이에 자식을 두지 말자고 말했지만, 속절없는 시간 앞에서 무력하게 늙어가는 그녀를 보며 내심 그때, 메리의 의향대로 아이를 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마저 들었다.


“그대와 함께 영원히 살길 바랐소. 그러나 그대의 삶은 찰나와도 같군.”

올란디르는 힘겹게 쌕쌕거리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원에 대해 항상 이야기 나눴잖아요. 결국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라고. 나는 이제 사라지지만 언젠가 그대가 삶이라는 모험을 끝낼 때까지 나를 기억해 주면 그걸로 족하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메리는 단 한순간도 올란디르의, 엘프의 불멸성을 부러워한 적이 없었다. 그저 살아있는 순간순간에 충실하려 했고, 세월 앞에서 의연했다. 그래서 마지막 떠나는 길에서도 그녀는 흔들림 없이 편하게 눈을 감았다.


메리가 떠났을 때, 올란디르는 울었다. 평생에 그래본 적 없을 정도로 목놓아 울었다. 고아였지만 누구보다 영특했던 섬마을 소녀는 올란디르의 가슴에 가장 큰 흔적을 남겼다. 비록 올란디르 외에는 그녀를 기억하는 이도 없고, 자식도 없었지만, 브로치만은 세상에 남아 그녀를 떠올리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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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란디르는 메리를 묻고 나서도 그 무덤 앞에서 사흘 밤낮을 울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더 이상 잃고 싶지 않다.’





"그래서... 도망쳤소."

올란디르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오늘까지. 대략 백오십 년 동안 단명종을 피했소. 인간도, 드워프도, 하플링도... 누구도 만나지 않았지. 산장과 숲 속을 떠돌며, 그저 존재할 뿐이었소."

루시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올란디르의 손이 커피잔을 쥔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상실이 두려웠소. 다시 누군가를 만나면, 또 사랑하게 될 테고, 또 잃게 될 테니까. 그 고통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소."

"하지만..." 루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살아계셨잖아요."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올란디르가 쓴웃음을 지었다. "고통도 없었지만, 기쁨도 없었소. 권태만이 더 깊어졌을 뿐이지. 마치..."

"마치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던 거네요."

루시가 그의 말을 이었다. 올란디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칼란이 말했던 그 장작처럼. 수분이 빠져나가듯, 나라는 존재에서 생기가 조금씩 말라가고 있었지."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창밖의 별무리가 천천히 흐르는 소리만이 들렸다.


올란디르의 고백이 끝나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루시는 자신의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이미 식어버린 커피였지만, 그녀는 그것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저도..."

루시가 입을 열었다.

"저도 도망쳤어요.”


그녀는 자신의 금속 손을 들어 올렸다. 촛불에 반사되어 푸른빛이 맥박처럼 깜박였다.

"이 팔이 이렇게 된 게 3년 전이에요. 하지만... 사실 그전부터 저는 이미 부서지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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