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란디르는 마지막 마흔아홉 번째 계단을 내려섰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세상의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파도가 절벽을 때리는 둔탁한 소리, 바람이 풀잎을 훑는 속삭임, 바다오리와 갈매기들의 날카로운 울음. 분명 익숙한 소리들이었다. 며칠 전까지 매일 듣던 소리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있어 이 모든 것이 너무 생경하게 느껴졌다. 익숙한 초록빛도 새소리도 파도소리도 전부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낯설었다. 올란디르는 귀를 막고 싶었다. 지긋지긋할 만큼 익숙한 이 소리들이 머릿속으로 파고들어, 방금 전까지 있었던 세상의 기억을 지워버릴 것만 같았다.
'아직... 그곳에 있는 것 같아.'
그는 자신의 손을 들어 햇빛에 비춰보았다. 분명 그의 손이었다. 엘프 특유의 투명하고 창백한 피부, 그 사이로 비치는 푸르스름한 핏줄, 가늘고 긴 손가락과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금반지까지. 그와 천 년을 함께한, 익숙한 손.
그는 손바닥을 뒤집어 보았다. 손금 하나하나가 또렷했다. 이 손으로 활시위를 당겼고, 책장을 넘겼고, 마법을 부렸다. 천 년의 기억이 이 안에 머물러있었다.
그리고 그 손이 방금 전까지 만지고 느꼈던 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가 맞잡았던 루시의 손. 그 손에서 느껴지던 금속성의 질감과 마치 노움 장인의 의수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던 기계관절. 그리고 그 기계손으로 건네주었던 따뜻한 차가 담긴 유리잔과 순백의 종이로 만들어진 냅킨까지.
그 낯선 감촉들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평생 본 적 없던 새로운 세상의 흔적이 아직 씻겨나가지 않고 그의 영혼 구석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듯만 했다.
올란디르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저곳에 남기고 온 기억들이 선명해졌다.
서서히 바람이 멈췄다. 파도 소리가 사라졌다. 갈매기의 울음이 멀어졌다.
꿈을 꾸듯, 그는 그곳에서의 순간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튤립이 아침 햇살에 기지개를 켜고, 데이지가 저녁 이슬에 잠드는 계절의 어느 날
올란디르는 명상을 위해 산장을 나섰다.
그림스펠 지역의 서쪽 절벽 끝, 세상의 가장자리라 불리는 그 깎아지른 절벽.
그는 이곳에 지어진 산장에서 아흐레째 머물며 명상을 하고 있었다. 천 년을 넘게 살다 보니, 가끔은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수많은 기억이 범람하곤 했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 차분히 정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날은 지난 며칠과는 사뭇 달랐다.
산장에서 북서쪽으로 1리쯤 걸어가면 있는 가장 높은 절벽에서 해안을 내려다보며 명상을 하려던 올란디르는 안개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보통 바다에서 밀려오는 해무는 아침 햇살에 희미해졌다가, 바람이 바뀌면 다시 절벽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날의 안개는 그가 절벽 끝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점점 짙게 모여들었던 것이다.
의지가 있는 듯, 절벽 아래에서부터 뭉게뭉게 피어올라 올란디르의 시야를 삼켰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안개는 바람결을 거슬러 길처럼 좁혀왔다.
그리고 절벽 끝에서, 안개가 하나로 합쳐졌다.
올란디르는 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안개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은빛 실로 짠 베일처럼, 별빛을 머금은 물결처럼 일렁였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응고되며 계단의 형태를 갖추었다.
올란디르는 숨을 멈췄다. 천 년을 넘게 살며, 마법사 탑의 공중계단이라던가, 골드드래곤의 둥지를 둘러싼 황금빛 광륜처럼 신기한 광경을 수도 없이 봐왔지만, 안개로 이루어진 계단은 또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적어도 그가 아는 마법 지식에서는 이렇게 광범위한 지역의 구름을 끌어모아 굳히는 기술은 없었으니.
그는 계단을 아래에서 위까지 천천히 눈으로 따라 올라갔다. 하나, 둘, 셋... 마흔여덟, 마흔아홉. 마지막 계단 위로는 여전히 안개가 희미하게 머물러 있어,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없었다.
왜 지금 이 계단이 생긴 것인지, 왜 하필 마흔아홉 칸인지 등에 대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올란디르는 직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초대장이라는 것을.
두려움과 호기심 사이에서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수백 년간의 권태에 찌들어 살던 그에겐 생존본능보다는 호기심이 더 컸고, 마치 그를 기다렸다는 듯이 적재적소에 바로 눈앞에 나타나버린 계단을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이 세계에서 자신을 마지막으로 목격해 줄 누군가를 찾는 듯 두어 번 두리번거리더니, 조심스레 첫 번째 계단에 왼발을 올렸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계단.
계단의 감촉은 의외로 단단했다. 밟을 때마다 '퉁' 거리는 소리가 반향음처럼 퍼져나갔다. 그리고 오른발까지 계단에 올리는 순간 안개가 다시 움직였다.
아직 계단이 되지 못한 안개들이 사방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올란디르를 감싸듯, 세상과 그를 단절시키려는 듯 천천히 그의 주변을 채워나갔다.
바람 소리가 멀어졌다. 파도 소리가 희미해졌다. 새들의 지저귐이 사라졌다.
세상이 조용해졌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이제 들리는 것은 자신의 심장 소리와 호흡뿐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방금 전까지 보였던 절벽의 풍경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안개 너머로 희미한 윤곽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올란디르는 계속 올라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를 때마다 안개는 더욱 짙어졌고, 그는 원래 세계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 느낌... 예전에도 있었지.'
육백 년 전, 그가 엘프 사회를 등졌을 때도 이랬다.
형식과 예법에 얽매인 긴 생의 반복.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궁전의 정원. 기술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영혼이 없는 그림들. 천 년을 갈고닦은 그들의 예술은 기술적으로 찬란했지만, 정작 살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인간, 드워프, 오크 같은 단명종들을 ‘하등하다’고 말했다. 기품도 없고, 서두르느라 실수투성이인 존재들이라고.
하지만 올란디르에게는 껍데기만 남은 엘프들이야말로 더 하등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떠났다. 엘프들의 세계에서.
그리고 칼란을 만났다.
계단을 오를수록 안개는 더욱 몰려들었다. 이제 올란디르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절벽도, 바다도, 하늘도 사라졌다. 그가 올라온 계단조차 안개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칼란. 엘프사회를 등진 후 함께 모험했던 인간 모험가. 십여 년을 함께 모험했고, 이후 반세기를 친구로서 함께했다.
수백 년 동안 그를 짓눌렀던 권태가, 칼란과 함께하며 한 겹 한 겹 떨어져 나갔다. 던전을 탐험하고, 괴물과 싸우고, 흡혈귀의 권역이 된 마을을 구하고. 매 순간이 위험했지만, 그래서 살아있음을 느꼈다. 두려움과 설렘. 올란디르는 태어난지 사백 년 만에 처음으로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인간은 짧게 산다.
칼란도 그랬다. 지금으로부터 오백하고도 사십년 전 어느 날, 그는 늙었고, 병들었고, 죽었다. 올란디르는 그의 무덤 앞에 섰다.
'엘프는 인간보다 오래 살지. 그러니 슬퍼하지 마라. 받아들여라.'
어릴 적부터 그렇게 배웠다. 그래서 울지 않았다.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올란디르는 계속 올랐다.
‘칼란의 삶은 짧았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내게 깊은 시간을 주었지.’
그래서 멈추지 않았다. 칼란이 떠난 후에도 다른 인간들을 만났다. 모험가들, 상인들, 학자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시고, 세상을 함께 걸었다.
권태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살아있다는 느낌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메리를 만났다.
왕국 외곽의 섬 마을 출신이라 성도 없었지만 본질을 보는 눈을 가진 명석한 여인. 엘프 사회에서는 글도 읽을 줄 모르던 그녀를 봤다면 천박하다고 했겠지. 허나 올란디르가 보기에는 어떤 멍청한 꼰대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었다. 아니,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었다.
‘이 그림…, 너무 기술에만 집착한 거 같네요. 제가 보기에는 영혼이 없는 것 같아요.' 그녀는 단번에 엘프 예술의 공허함을 꿰뚫어 봤다. 일반적인 인간들이었다면, 엘프들의 완벽에 가까운 기술과 기품있는 양식이라면서 올려치기 바빴을 테지만, 그녀 스스로의 기준이 명확했기에 명성따위에 주관이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올란디르가 본 누구보다도 배움이 빠르고 사고방식이 유연했다.
생각이 깊으면서도 형식에 얽메이지 않는 그녀의 매력에 빠진 올란디르는 그녀와 깊은 관계가 되었다. 비록 그 세월 또한 촛불처럼 짧았지만, 그래서 더 뜨거웠다.
하지만 메리도 떠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올란디르도 알았다. 이제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안개가 조금 옅어지는 것 같았다. 아니, 달라지고 있었다. 더 이상 절벽의 해무가 아니었다.
올란디르는 계속 올랐다.
인간들의 수명은 짧고,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빠르게 사라졌다.
그는 서쪽 대륙에 방문할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칼란의 무덤을 방문했다. 백 년이 넘는 세월동안 꾸준히.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올란디르를 서서히 잊어갔다. '누구신지요?’ 그들에게 칼란은 그저 역사 속 조상일 뿐이었고, 조상님의 벗을 기억하는 이들은 없었다. 올란디르는 '그저 오랜 친구였다'고 말하고는 다시는 묘소에 가지 않았다.
메리는 천출이라 가문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의지로 아이도 두지 않았다. 그녀를 기억하는 건 이제 올란디르뿐이다. 그가 간직한 브로치와 함께.
공유할 사람이 없는 기억은 흐릿해진다. 아침 햇살에 흩어지는 안개처럼.
'그래서 백오십 년 동안... 도망쳤지.'
인간들을 피했다. 상실이 두려워서. 단명종과의 교류를 끊은지 오래였다. 엘프들의 세계로 돌아갔지만, 그곳도 여전히 공허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그리고 권태가 다시 찾아왔다.
마흔아홉 번째.
올란디르는 마지막 계단에 발을 올렸다.
이 계단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하필 그가 기억을 정리할 때 나타나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롯이 혼자만 남았을 때, 남겨야할 추억과 지워야할 기억들을 분류할 때, 다른 세계로 가는 계단이 있다는게 반가웠다. 비록 이것이 올란디르를 속이는 눈속임일 뿐이고, 그가 이대로 추락해서 죽는다고 해도 끔찍할정도로 긴 권태를 끝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안개가 걷혔다.
그리고 그곳에... 문이 있었다.
흑요석의 질감을 떠올리게 하는 매끈한 검은색의 문. 마치 밤하늘 그 자체를 도려내어 세운 듯한 문이었다.
그리고 그 어두운 문 깊숙한 곳에서 희미한 빛 알갱이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득히 먼 곳에서 흐느끼듯 조용하게 떨리는 별빛들....
마치 문 너머의 세계가 이미 비쳐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신비로운 표면을 가로지르는 장식은 올란디르가 평생 본 적 없는 독특한 양식이었다. 황금빛 금속이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문을 제도하듯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 문의 거의 모든 장식은 직선이었다. 냉정할 정도로 곧고 정확한 직선들이 서로 교차하며 계단식으로 쌓여 올라가고, 지그재그로 꺾이고, 부채꼴로 펼쳐지며 대칭을 이루었다. 장식은 화려했지만 기계적으로 절제되어 있었다. 마치 수학적 아름다움을 금속으로 구현해 낸 것 같았다.
자연의 유기적인 곡선을 모방하는 엘프들의 양식이나, 서사적인 장엄함을 뽐내는 인간의 양식과도 달랐다. 그나마 드워프들의 룬 문자에서 보이는 곧고 직선적인 느낌이 비슷하달까.
올란디르는 넋을 놓고 그 장식을 눈으로 좇았다. 그 패턴이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려고도 해 보았지만 이내 포기하고 문양의 흐름을 따라 문의 손잡이를 찾게 되었다.
문 중앙에는 문의 장식과 같은 황금빛 금속으로 만들어진 손잡이가 있었다. 동그란 반구형으로 파여있는 공간에 금속 막대가 가로로 빗장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올란디르는 그곳에 손을 뻗어 감싸 쥐었다.
손잡이는 차가운 금속임에도 불구하고 따뜻했다. 마치 누군가 방금 전에 잡았던 것처럼 은은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 생각이 들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호기심을 좇아 어른들이 금지한 숲으로 내달리던 어린 소년처럼.
올란디르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손잡이를 천천히 돌렸다.
드르륵, 찰칵.
수직으로 회전한 손잡이를 기준으로 문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주변을 감싼 안개가 사라지고, 문에서 새어 나온 강렬한 빛이 올란디르를 감쌌다. 그 빛에 잡아당겨지듯 올란디르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 너머의 세상은 어둡고 고요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감도는 넓은 공간이었다.
올란디르는 이 장소를 돌아보며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탁자와 의자들, 한쪽의 긴 카운터, 벽에 걸린 액자들, 선반 위의 찻잔들. 엘프들이 향유하는 느긋한 담소의 공간인 찻집과 닮아있었다.
50개는 족히 넘어 보이는 탁자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고, 각 자리 사이를 칸막이가 나눠 손님들에게 적당한 거리감을 제공하고 있었다. 카운터 위로는 커다란 금속 기계가 뜨거운 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기계에서 올란디르가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묘한 향이 퍼져 나왔다. 고소하면서도 쌉쌀한, 이국적인 냄새. 카운터 뒤편 선반에는 낯선 형태의 찻잔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천장에는 샹들리에 대신 천체 모양이 느릿하게 돌고 있었고, 주황빛 간접조명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문에서 봤던 그 어두운 재질의 벽에 대부분 삼켜지는 듯했다. 마치 '손님들에게 필요한 만큼만' 밝히겠다는 듯이.
그렇게 찻집 내부를 천천히 훑어보던 올란디르의 시선은 이 찻집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에서 고정되었다.
창틀 없이 완전히 뚫린 거대한 유리. 그 너머로... 별들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명한 창문 너머로 보랏빛과 분홍빛이 섞인 거대한 은하수가 강물처럼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 사이로 은색 별가루들이 먼지처럼 떠다니고 있었고, 사이사이 나선형의 독특한 빛무리가 회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거대한 천체가 있었다.
끊임없이 요동치는 노란빛의 구체. 표면에서는 불길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솟구치고 휘몰아쳤다. 올란디르는 숨을 멈췄다. 저것이... 태양일까? 그의 세계에서는 그저 밝디 밝은 원반에 불과했던 그것의 본모습이, 저토록 격렬하고 장엄한 것이었단 말인가?
천 년 동안 수도 없이 올려다보았지만, 너무나 멀어 감히 닿을 생각조차 못 했던 그곳. 지금 그 풍경이 올란디르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황홀하고, 장엄하고, 웅장했다. 그는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넋을 놓고 서 있던 올란디르에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오셨나요?
올란디르는 깜짝 놀라 그쪽을 돌아봤다.
거기에는 독특한 차림새의 한 여인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