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을 하고 임신출산육아 클럽(동아리)에 가입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모르는 사람과 금세 친근해질 때
초록빛으로 만연함 봄, 파트너와 결혼반지를 맞추기로 했다. 사당역에서 음식점 골목을 지나 아기자기한 길을 걸으면 반지를 제작하는 디자인 숍이 나온다. 나와 비슷한 나이로 추정되는 긴 파마머리의 사장님이 반갑게 맞이했다. 어떤 디자인을 원하는지 자분자분 대화하며 신중하게 고르고 사이즈를 쟀다. 반지가 만들어지기까지 한 달이 걸린다고 했다. 그렇게 한 달, 초여름 무더운 날씨에 반지를 찾으러 갔다. 옷이 얇아진 데다 전보다 배가 나와서 임산부인 게 티가 났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긴 파마머리의 사장님은 인사하다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어머 임신하셨어요? 지난번에 오셨을 땐 몰랐어요." 뭔가를 들킨 것처럼 쑥스럽게 "아, 맞아요"하자 몸은 괜찮은지 묻더니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몸이 퉁퉁 부어서 액세서리를 전혀 못 했어요. 입덧이 심해서 얼마나 힘들던지. 그에 비해 고객님은 살도 안 찌고 좋겠어요." 겪지 않아도 알겠어서 “아고 힘드셨겠어요" 대답이 절로 나왔다. 곧이어 그녀는 반짝이며 물었다. "성별은 뭐예요?" 역시나 싶어 웃으면서 "딸이래요" 했다. "저는 아들인데.. 많이 놀아줘야 해서 체력이 달려요." 끄덕끄덕. 만나본 적 없는 아이가 지금쯤 뭐 하고 있을지 생각했다.
반지 사장님과 이런 대화를 하게 될 줄 몰랐다. 사장과 손님으로 깍듯했던 관계가 허물어지고 금방 친근해진다. 아이가 있는 사람들은 임산부를 만나면 그리 반가운 모양이다. 몇 개월인지, 성별이 뭔지, 입덧은 없는지, 몸은 괜찮은지 묻는다. 자연스레 이어지는 상대의 경험을 듣는 건 재미있다. 같은 경험을 이렇게나 다르게 겪는구나 신기하면서 묘한 유대감, 동질감이 형성된다. "너도 임신(출산육아) 클럽에 가입했구나!" 하는 것만 같다.
#무조건적인 선물을 받을 때
클럽 회원들에게 무조건적인 선물을 많이 받는다. 그녀들은 단도직입적으로 "필요한 거 없냐"부터 묻는다. 뭐가 필요한지 조차 모르겠어서 "없어, 괜찮아" 둘러 말한다. 일단 출산 준비물품 리스트라고 적힌 엑셀파일을 받았다. 한참 들여다보면서 이것저것 사긴 산다. 가제수건이 이렇게나 필요한가? 역류방지쿠션은 어떨 때 쓰는 거지? 필요하다니까 사두자, 뭐라도 유용하겠지. 그럼에도 미처 챙기지 못한 것들은 사촌언니, 오래된 친구, 직장 동료들, 엄마 친구 그리고 파트너 가족과 지인에게 젖병소독기, 수유쿠션, 유모차 시트, 타이니모빌 등을 한 보따리 받았다. 물건들도 열렬하게 환영의 분위기를 풍긴다. "우리 클럽에 잘 왔어!! 걱정 마, 나는 어흥이에게 정말 필요한 거야!!"
누군가 사용했던 것들을 정리하다 보면 그 아이의 체온이 전해져서 몽글몽글 따끈하다. 자주 가는 한의원 선생님은 임신 사실을 더 널리 알려서 많이 받으라고 했다. 어차피 아이가 크면 주변에 나누면 된다고. 아이만 새 거(?) 면 됐지, 중고로 키우는 거라면서. 덕분에 당근마켓 앱을 수시로 들락날락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클럽의 신규회원을 위해 깨끗하게 사용해야겠다.
#축하인사는 덤. 덤 치고는 어마어마한 마음들.
임신했다고 말하면 상대는 놀랐는지 잠시 숨을 '헉' 들이마시고 있는 힘껏 내뱉으면서 "정말 축하해(요)!!!" 외친다. 생각할 틈도 없이 축하라는 녀석이 나에게 와락 안기는 느낌이다. 살면서 축하받은 적이 많지 않다. 학교를 졸업하거나 생일에 으레 인사받는 경우였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더더욱 축하를 하고 받기가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초반엔 사람들의 축하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어려웠다. 와락 안긴 축하에 몸이 굳었다고 할까.
게다가 어흥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나는 임신하기 전까지 "요즘 같은 시대에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어" 공공연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전염병과 기후 위기, 전쟁의 위험, 부동산 문제를 비롯해 먹고살기 팍팍해진 시대에 아이라니. 애가 무슨 죄야 싶었다.
한 번은 돌이 지난 아이가 있는 직장 동료가 앞으로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거라고 축하하자 지나가는 말로 속마음을 말했다. "진짜.. 축하받을 일인 거죠?"라고. 동료는 괜찮다는 듯, 본인도 거쳐간 마음이라는 듯 공감의 표정을 지었다. "그럼요, 정말 축하할 일인걸요. 천국과 지옥을 오가긴 하지만 아이 낳기 전에는 알 수 없는 행복이 있어요." 행복보다 천국과 지옥이란 단어를 곱씹으며 침을 꼴깍 삼켰다.
사람들의 정성 어린 축하를 온몸으로 받은 다음에야 인정하게 됐다. 이런 시대일지라도 그와 별개로 생명을 품고 있는 자체로 축하받을 일이라는 걸. 새로운 녀석의 등장과 더불어 새로운 존재가 되는 나를 향한 축하였다. 존재만으로 응원받고 축하받으면서 열 달이 훌쩍 흘렀다.
임신출산육아 클럽은 여느 동아리와 다르다. 우리는 친밀한 사이는 아니지만 멀리서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임산부 배지를 달고 있거나 막달에 숨이 차서 천천히 움직이거나 유모차에 자그마한 녀석을 태우고 힘차게 걷는 사람들에게 눈길이 간다.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에너지를 전한다. '곧 출산인가 봐요. 순산하세요!', '육아 클럽에 막 진입했군요. 치열한 전투 중이겠어요.'하고. 무수한 사람들의 눈빛은 축하를 포함해 당분간 고생하겠다는 딱함이라는 걸 아이를 출산하고 뒤늦게 알았다.
후아, 출산예정일이 도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