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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은 Feb 07. 2023

07. 성별이 뭐길래

"성별이 뭐예요?" 임신을 하고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다. 친구며 동료, 친척들, 가게 주인, 심지어 모르는 할머니가 아들이냐 딸이냐 물었다. 사실 나도 임신한 친구에게 많이 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 친구에겐 왠지 아들이 어울려서 아들일 거라 추측하며 친구들과 내기를 하기도 했다. 내가 임신하고 친구들 모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 추론하면서 열을 올렸다. 친구들 중에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 자부하는 친구가 눈을 반짝였다. "재은이는 아들일 것 같아. 딱 느낌이 그래." 다들 그런 것 같다고 했다. 나도 "그런가"하면서 사람 좋게 웃었다.


내가 다니는 산부인과는 원칙상 32주 전에 성별을 언급하지 않는다. 무어라도 좋다며 웃어넘겼지만 가끔은 궁금증을 참지 못해 인터넷을 검색했다. 태명이 '어흥'인 데다가 친구들 얘기를 듣고 보니 아들 같았다. 강아지가 나온 태몽을 꾸면, 배가 앞으로 불룩하게 나오면 아들이라고 했다. 내 태몽을 떠올려보고 배 모양도 유심히 관찰했다. 앞으로 불룩하게 나온 걸 보니 아무래도 그랬다.


고등학교 때부터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 닮은 딸을 낳고 싶다고. '나 정도면 됐지 뭐' 심보였다. 특별히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무탈히(순전히 내 생각이다) 자랐으니 나를 닮은 딸이 있으면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떤 면에서 내 마음을 꼭 알아줄, 나와 동일한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은연중에 딸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한국사회에서 건강하고 괜찮은 남성으로 키우는 건 무척 어려운 과제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딸은 딸대로 걱정이 됐다. 한국사회에서 차별(피해) 받지 않고 단단한 여성으로 자랄 수 있을까. 걱정은 끝이 없기에 성별 고민은 무의미했다. 어차피 내가 결정할 수 없고 이미 정해진 것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32주 검진날, 초음파를 보면서 설명을 마친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질문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아이 성별이 뭔가요?" 선생님은 알고 있었다는 듯 아주 능숙하게 배 중간에 초음파 기계를 댔다. 하트모양의 무언가가 화면을 채웠다. "여자아이로 보입니다. 여기 난소주머니 보이죠?" 예상치 않은 소식에 요상한 소리가 나왔다. "억. 우앗, 으. 어머. 어떡해" 진심으로 기뻤다. 파트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토록 험한 세상에 여자아이라니 걱정하는 눈치였다.

성별을 알기 전과 후가 분명히 달랐다. 성별을 모를 땐 동화 속 아가 이미지를 상상했다면 성별을 알고 나니 구체적인 상이 잡혔다. 길에서 마주치는 여자 아이들을 유심히 보게 됐다. 분홍 잠바를 입고 뽁뽁 소리 나는 운동화로 아장아장 걷는 아가들이나 유치원 가방을 멘 채 엄마 손을 잡고 뭐라 뭐라 말하는 아이들도 보였다. 어흥이도 저렇게 되겠지 상상만으로 눈앞에 아른 거렸다. 여자아이라고 분홍색만 입히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이름은 뭐가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끔 어떤 여성으로 살아가길 바라는지 골똘히 생각했다. 시도 때도 없이 배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멋지고 자유로운 여성으로 자라면 좋겠어. 어흥이 너는 매력적인 사람이 될 거야" 내 말에 파트너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앞서간다며 워워 진정시켰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의지를 다졌다.


친구들은 아들일거라 추측한 걸 까먹은 모양이었다. "얘들아 어흥이가 딸 이래!" 말하자 다들 기뻐하면서 어흥이의 이름이 대화 주제가 됐다. 자기 이름을 지으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고민하지 않을 정도로 활기가 넘쳤다. "요즘은 중성적인 이름이 인기가 많은 것 같아. 누가 봐도 여자이름 말고 다른 이름 생각해 보자" 동의하며 끄덕였다. "파트너 성이 박 씨라고? 그럼 네 성을 가운데에 넣고 이름을 지으면 어때?" 열띤 토론에 웃음이 났다. 나는 어릴 적 엄마 형제들을 비롯해 엄마 사무실 이모들 등 주변에 이모가 많은 게 좋았다. 다양한 여성의 삶을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 참조가 되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 건 행운이다. 어흥이에게도 내 친구들이 그런 존재가 되지 않을까. 생각만으로 기쁘고 고마웠다.


어느 날 지하철 임산부석에 앉아있는데 자글자글한 주름에 짓궂은 표정의 할머니가 수다스러운 말투로 말을 걸었다. "아들이요, 딸이요?" 대뜸 받은 질문에 어버버 하다가 조심스레 "딸이래요" 말했다. 기다렸다는 듯 "나는 아들만 셋이라 딸 낳을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임신하고 싶네" 말하면서 웃으시기에 딱히 대답할 게 없어 눈을 굴렸다. 내가 내릴 역에서 조용히 인사하고 일어났다. 집에 가는 동안 보물단지를 안고 걷는 느낌이었다. 아들 선호는 과거의 이야기인가 보다. 내 발걸음에 맞춰 어흥이가 꾸물꾸물 흔들렸다.


결론적으로 달라진 건 없다. 아들이어도 좋고 딸이어도 좋다. 아들이든 딸이든 내 마음을 꼭 알아줄, 나와 동일한 존재가 태어나진 않을 것이다. 나와 파트너를 닮았으면서도 너무나 다른 녀석이 태어날 것이고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사이가 되겠지. 딸과 우정의 관계를 맺을 생각하니 뜨끈한 국밥을 먹은 것처럼 속이 든든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엄마인 나부터 멋지고 단단한 여성으로 거듭나겠어! 아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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