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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Oct 21. 2023

[다시 가고 싶은 이유]
시나몬 롤을 굽는 시간

나흐바


[다시 가고 싶은 이유]

시나몬 롤을 굽는 시간





“오늘 처음으로 드시는 커피인가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다. 보통은 이렇게 물어보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되묻는 일이 거의 없다. 커피를 추천해달라며 답변을 요구한 건 내 쪽이니까. 맛있는 커피를 먹고 싶은 손님의 간절한 눈빛에 반응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어떤 바리스타는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오늘 당신이 이 원두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 50가지’ 따위를 쉬지 않고 읊어댄다. 말투와 발화 속도와 표정을 면밀히 살피다 보면 이 사람이 기계적으로 암기한 걸 토해내는지, 긴 시간 축적한 덕력을 바탕으로 진짜 신나서 전달하는지를 대강 알 수 있다. 또 다른 바리스타는 자기 카페의 시그니처 커피 혹은 매출 1위 메뉴를 권한다. 이미 검증이 끝났으니 믿고 마셔보라는 자신감이 느껴짐과 동시에 더 세세한 커뮤니케이션을 하기는 귀찮아 그냥 쉽게 가려고 하는 느낌도 든다. 물론 아무 정보 없이 방문한 초심자에게 가장 빠르고 임팩트 있게 매장 이미지를 주입하는 효과를 고려하면 이 역시 나쁘지 않은 추천 방식일 것이다. 



나흐바는 손님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쪽을 택했다. 한적한 누하동에 자리한 이 작은 카페의 관심사는 ‘손님이 지금 가장 기분 좋게 마실 수 있는 커피’다. 오늘의 첫 커피라면 아메리카노나 필터 커피로 하루를 깔끔하고 개운하게 시작해보고, 두 번째 세 번째 커피라면 고소한 라테나 달콤한 샌디에이고로 진한 풍미를 느껴보라 말하는 사장님. 심지어 여기서 두 잔 이상 먹고 갈 예정이라면 블랙 커피를 먼저, 우유나 꿀이 들어간 베리에이션 커피는 그 다음에 내어주겠다며 순서까지 생각해주는 이런 섬세한 서비스라니. 커피는 당연히 맛있었고 커다란 통창으로 내다 보이는 고즈넉한 거리의 정경은 휴대폰에서 시선을 거두게 했다. 안쪽까지 가득 쏟아지는 햇살은 협소한 공간을 더없이 아늑하게 만든다. 사소해 보이는 지점까지 신경 쓰는 사장 N의 센스와 친절은 언제 가도 한결같으니, 이 작디 작은 매장을 어떻게 안 좋아하고 배기나. 2022년 10월 이후로 나흐바는 서촌에 놀러 갈 때마다 유력한 후보로 떠오르는  카페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어느 여름날, 나흐바가 잠시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모종의 문제가 생겼다는데 구청 차원에서 내려온 영업정지 조치 비슷한 것이겠거니 추측해볼 뿐이다. 부러 자세히 묻지도 않았다. 카페는 6월 내내 닫혀 있었다. 많은 단골들이 아쉬움을 표했다. 무더위가 찾아오기 전의 초여름 서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고 있으니까. 이런 날씨에 나흐바에 가야 하는데! 진한 플랫 화이트를 마시며 계절과 날씨의 변화를 눈으로 만끽하지 못 하다니. 나 역시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으나 그보다 복잡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을 N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사실 나흐바는 임시휴업에 들어가기 직전에 이미 한 달을 쉰 상태였다. 런던으로 커피 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오픈한 지 7개월 차에 접어드는 개인 카페가 해외 여행을 이유로 한 달 가량 쉰다는 건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다. 하루하루의 매출을 올리는 데 집중해도 쉽지 않은 시기에 큰 맘먹고 내린 결정이었겠지. 당연히 불안하고 두렵겠지만 그럼에도 멀리 보고 넓게 보는 선택을 밀어붙인 그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조만간 해외로 커피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에요. 물론 여행 비용도 비용이지만, 그동안 나흐바를 닫아야 하니 여러모로 큰 리스크가 될 수 있겠죠. 그런데 매일 되뇌이지만 나흐바는 지금 돈을 최대한 움켜쥐고 한푼이라도 더 남겨야 하는 시기는 아닙니다. 2호점을 내거나 더 큰 곳으로 확장이전을 하거나 등의 사업적인 유혹들이 있지만, 나흐바는 돈의 규모보다는 나흐바만의 색깔을 더 짙고 선명하게 칠하는데 집중해야할 시기라고 생각해요. 그저 규모에 급급해 비슷비슷 몸집만 키우는거 재미없잖아요? 빛을 내는 속도보다는 조금 느리더라도 오랫동안 저만의 빛을 내는 곳이 되도록, 이것을 일이자 삶으로 만들 수 있도록 하나씩 도전해보겠습니다.

ㅡ 나흐바 공식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게시물 중



돌아온 이후에 또 한 번 문을 닫게 될 거라고는 그도 예상하지 못 했을 것이다. 이국에서 받은 에너지와 영감을 등에 업고 힘차게 달리고 있던 와중에 맞닥뜨린 강제 휴업. 어떤 변수가 생길지 한치 앞날을 모르는 자영업자에게 도합 2개월이 넘도록 영업을 하지 않는 건 치명타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당장 현실로 들이닥치는 금전적 타격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정신적 타격을 더 크게 입을 확률이 높다. ‘왜 그런 바보 같은 잘못을 했지?’ 자칫하면 휴업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거기서 그치면 다행이지만 원래 자책이 자학으로 변하는 건 시간 문제다. ‘이럴 줄 모르고 제 발로 가게 문 닫고 속 편하게 유럽여행 갔다 왔다’며 과거의 자신을 몰아세우는 거다. 지난 선택을 후회하고, 후회하며 위축되고, 위축되는 만큼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약해지는 악순환의 고리에 갇힌다. 내가 지난 겨울의 뉴욕 여행과 모 회사 2차 면접을 떠올릴 때처럼.



나를 위해 내렸던 결정이 가장 무서운 목소리로 돌아와 야단을 칠 때면 정말로 울고 싶어진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얼떨결에 그러나 힘차게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한 나는 속으로 자주 울었던 것 같다. 초반의 쿨하고 당당한 모습과는 다르게 점점 회초리 앞에서 벌벌 떠는 꼬맹이가 되어 갔다. 일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판에 회사를 다닐 때보다 훨씬 더 게을러졌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이야, 프리랜서 간지난다~” 말하며 부러워 하거나 대단하게 여겼다. 한 달만 그렇게 살았으면 괜찮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근 몇년 동안 체감한 것중 가장 빠른 속도로 흘렀다. 겨울이 봄이 되고 봄이 여름이 됐는데 나는 변한 게 없었다. 사람은 불안이 가시화되는 순간 원망할 대상부터 찾는다. 그래야 상황이 이해가 되고, 인과관계가 바로서야 안정감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렇게 믿는것뿐이다.) 내 원망의 대상은 명확했다. 퇴사를 하고 뉴욕 여행을 다녀온 겨울의 선택과 동경하던 회사의 2차 면접을 포기한 봄의 선택. 다른 누구도 탓할 수 없는, 내가 나를 위해 내린 선택이었다. 



그때 왜 그랬을까. 



물론 지금에 와서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지난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해야만 하는 결정이었고, 그 쉽지 않았던 결정으로 인해 지금의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이따금 좌절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탔던 밤들을 기억한다. 머리로는 후회하지 않으면서 마음에는 미련이 남았나 보다. 



7월 18일. 오랜만에 나흐바를 찾았다. 휴업을 마치고 돌아온 뒤로도 3주 정도가 더 흐른 시점이었다. 그간 이런저런 일로 연락을 주고 받아서인지 어색하지는 않았으나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의 N을 보고 나는 다소 놀랐다. 분명 그는 물리적 정신적으로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큰 압박감을 느꼈을 텐데 이전과 똑같이 커피를 내리고, 웃음으로 손님을 맞이하고, 크고 작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아닌가. 오히려 더 성장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쉬는 동안 메뉴 개발에 힘쓰더니 끝내주게 맛있는 시나몬 롤을 개시했고, 작은 공간을 더 만족스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좌석 배치에 변화를 줬다. (특히 창가 쪽에 놓을 두 종류의 스툴 중 더 편한 걸 내어주기 위해 직접 앉아보며 확인하는 모습에서는 그의 진화된 섬세력이 느껴졌다.) 



물론 얼굴만 평온해보이는 걸 수도 있다. 속은 매 시간 타들어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처럼 심정이 표정으로 드러나는 사람은 이렇게 티 안 나게 의연한 모습을 유지하는 이들을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그건 그가 스스로를 다잡는 의식일 수도, 대면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의 직업 윤리일 수도, 혹은 일찍이 체화한 사회 속에서의 생존 방식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N은 다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간다. 자신의 선택과 결정이 미숙했을지언정 미련한 것은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중이다. 그 충실함이 나를 위로했다. 나도 나만의 시나몬 롤을 구우면 되는 거구나. 새로운 테이블을 만들고 원두를 몇 종류 더 추가해 보면서, 그렇게 한 발 한 발 힘 주고 걸어가자. 평소와 다름없이.



아쉽지만 나흐바의 시나몬 롤은 얼마 안 가 메뉴판에서 사라졌다. 베이킹에 투입되는 에너지를 커피에 집중함으로써 커피하우스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란다. 한 번씩 떠오르는 맛이었고 그 역시 나흐바라는 카페의 색깔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고 생각하지만 불만은 없다. 뭘 하든 자기 신념대로 움직이는 N의 선택을 나는 믿는다. 며칠 전에 만났을 때는 그가 이렇게 말했다. “올해 한 번 더 커피여행 갔다 올까 생각중이에요.” 오호?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이 커지는 나를 보며 덧붙인다. 매년 가야죠. 이 자리에 이대로 고여 있고 싶지는 않아요. 새로운 걸 계속 보고 자극을 받아야 할 것 같아요. 



그 자극이 기다려지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한치 앞날을 모르는 주제에’ 더 넓은 사고와 풍부한 경험을 위해 떠날 N의 앞에 펼쳐질 세상이 기대된다. 불안과 걱정 속에서도 배움과 영감을 찾아 낯선 도시를 가로지르는 이야기를 얼른 들어볼 수 있기를. 그때까지 나도 나를 깨울 무언가를 궁리해 봐야겠다. 짧았지만 강렬했던 시나몬 롤처럼, 고만고만한 일상에 임팩트 한 번 진하게 남겨줄 수 있는 것이면 좋으련만. 





나흐바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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