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1
1시간 걸리던 출근길이 10분으로 단축됐다. 이사 덕분이다. 마을버스로 네 정거장, 도보로 20분이면 충분히 가닿을 거리라 평소라면 교통비가 전혀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사 후 한 달이 지나도록 걷기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편의점 가는 길엔 80개가 넘는 계단이 있다. 초여름 정오를 막 지난 뜨거운 햇볕을 양산 하나로 가리고 이 길을 오르자면 등짝이 젖도록 땀이 날 것이다. 일 시작 전부터 진을 뺄 순 없다. 그런데 마을버스는 이 계단을 피해 조금 먼 길로 돌아 편의점 바로 앞에 나를 딱 내려 주니 얼마나 편한가!
버스를 타는 또 다른 이유는, 하체 힘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서다. 스트레칭으로 고관절이 부드러워졌다고는 해도 아예 안 아프던 때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교대 시간이 다가올수록 발바닥이 아프고 발등도 부어서 운동화 끈을 느슨하게 다시 묶어야 했다. 다리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고 대신 버스비를 지불하는 편이 나았다.
게다가 출근길 가방이 꽤 무겁다. 가방에는 도시락과 물, 약간의 간식, 근무할 때 입는 조끼를 기본으로 넣는다. 물론 편의점에도 마실 물이 있지만, 2리터 페트병을 실온에 두고 여럿이 함께 먹는 식이라 찜찜했다. 아마 코로나 이후 위생에 예민해진 탓일 것이다.
이것만 해도 살짝 묵직한데 짐 틈바구니에 책 한 권까지 끼워 넣는다. 아직 모르는 게 더 많은 초짜인 내가 바쁘고 정신없는 편의점에서 책을 읽는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당연하게도 대부분 가방에서 꺼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계속 비상약처럼 책을 챙기는 이유는, 어서 일에 능숙해져 틈이 날 때마다 책을 읽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다. 밥 먹으면서 몇 문장, 손님이 한참 물건 고르는 동안 또 한두 문장을 읽는다. 빠진 물건을 채우며 머릿속에서 방금 읽은 부분을 곱씹고 다음 내용을 추리해 본다. 얼마나 재밌을까? 시간이 금방 지날 것 같다. 한참 일에 능숙해져야 가능하겠지만, 어쨌든 한 달 차 알바생의 원대한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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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시원하게 비가 쏟아지는 오후. 원래도 손님이 뜸할 시간인데 굵은 비가 퍼붓는 탓에 10분 동안 손님이 한 명도 안 왔다. 손님들 미끄러지지 않게 이미 바닥에 박스도 깔았고, 과자와 라면도 다 채워두었다. 할 일이 없으니 가방 속 책이 생각났다. 드디어 책 속 활자가 빛을 볼 때가 온 것인가! 창고로 달려가 책을 가져왔다.
그날의 책은 영화감독인 뤽 다르덴의 <인간의 일에 대하여>였다. 서문부터 마음을 울렸다.
“버림받아 홀로 남겨진 소년에게 삶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 존재 자체가 파괴되는 폭력을 경험하고도 소년은 어떻게 똑같은 폭력의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는지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소년이 겪은 폭력의 상처를 달래주고, 소년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찾을 수 있게 해줄...”
소년은 누구이고, 어떤 폭력을 겪은 것인지 궁금해하며 책 속으로 점점 빠져들려는데 문에 매달린 종이 뎅그렁 울렸다. 읽던 문장을 중간에 멈추기란 흐르는 콧물을 훌쩍 들이마시지 않는 것만큼 어려운 일. 마침표까지 마저 읽고는 “어서 오세요” 인사하려 고개를 든 그때, 눈앞에 나타난 건 점장이었다.
- 어... 점장님이 어쩐 일로..?
- 비 많이 오면 창고 바닥에 물이 스며들어서 확인하려고 왔어요.
잠시 후 점장은 창고에서 돌아와 커피 한 잔을 내리더니 별말 없이 돌아갔다. 그가 지나간 곳에 구정물 발자국이 또렷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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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편의점 단톡방에 공지가 하나 올라왔다.
“매장에서 업무와 관련 없는 노트북, 태블릿, 핸드폰 보지 마세요. 책도 읽으면 안 됩니다. 일하는 곳이지 개인 시간 보내는 곳이 아니에요! 앞으로 걸리면 근무 시간에서 빼겠습니다.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나를 두고서 하는 말인가? 머리가 뜨거워지고, 불쾌한 기운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어제 그 자리에서 말했더라면 잘 알아들었을 텐데. 변명이라도 몇 마디 할 수 있었을 텐데. 몰랐다고, 오늘 처음이었다고, 할 일 다 해놓고 손님이 없어 잠깐 쉬던 중이었다고, 책은 한 장도 채 읽지 않았다고, 핸드폰은 원래 잘 보지도 않는다고. 억울함에 눈물이 나오려 했다. 점장에게 말하고 싶었다. 사람을 이렇게 몰아붙이지 말아 달라고, 알고 보면 큰 잘못도 아니지 않느냐고…
겨우 눌러둔 점장에 대한 감정이 세게 튀어 올라왔다. 내가 싫은가? 그만두길 바라나? 공지를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10분쯤 지나니 흥분이 조금 가라앉으면서 “책도”라는 글자, 그중에서도 “도”가 눈에 들어왔다. 화가 난 사람은 중요한 걸 먼저 말하기 마련. 글 순서상으로 노트북, 태블릿, 핸드폰이 먼저고 책은 나중이다. 책은 곁다리다. 어쩌면 그는 노트북, 태블릿, 핸드폰 보는 알바생들 때문에 이미 화가 많이 나 있었는지 모른다. 점장의 화가 온통 나를 향한 건 아니라는 판단, 오직 내가 타겟은 아니란 확신, 그러니 나는 죄책감이든, 당혹감이든 딱 N분의 1만큼만 느끼는 게 타당하다는 결론. 지금 과한 것은 점장의 분노가 아니라 내 감정이다. 읽지 말라면 안 읽지 뭐. 그래, 그러면 되지.
이 시대의 시급 노동자. 신체와 시간을 붙들리는 대가로 돈을 받는 처지, 내 의지와 자유와 판단을 완전히 내려놓고, 타협의 여지도 제거한 채 ‘주인님’의 명령대로 움직여야 하는 신세라는 걸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