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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군 May 24. 2021

머그컵을 뒤집어 잡는 사람

아이와 아빠는 정말 오랜만에 식탁에 마주 앉았다. 약속을 하고 앉은 것은 아니었다. 아이는 오랜만에 집에 온 상태였고, 아빠는 짧은 야근 후 동료와 맥주를 한 병씩 비우고 들어온 참이었다. 날은 한참 전에 저물었다. 아이는 냉장고를 열고 돈시몬 오렌지 주스를 머그잔에 가득 따라 주방 쪽 식탁 의자에 앉았다. 특별히 고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오랜만에 집에 오니 본인 방에 들어가기가 어색한 탓이었다. 집에 돌아온 아빠도 씻기 전에 기네스나 한 캔 더 마실까 하는 생각으로 식탁 벤치에 앉았다. 둘은 대각선으로 마주 앉았다. 오랜만이었지만 특별히 어색하지도, 두 손 마주 깍지를 끼며 반가워하지도 않았다.


“오셨어요.”

“어, 너는 언제 왔냐.”


아이는 주스가 담긴 아이보리색 스타벅스 머그컵을 앞에 두고 별다른 말이 없었다. 아빠는 벤치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기네스 한 캔을 꺼내 식탁 위에 놓았다. 그리고 다시 네스프레소 캡슐머신 옆으로 가 호가든 로고가 박힌 기념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아빠는 식탁으로 한 발을 빼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유리잔을 내려놓고 아이와 같은 스타벅스 머그컵을 들고 식탁으로 돌아왔다. 기네스 캔을 따고 머그컵에 천천히, 가득 부었다. 330ml 기네스 캔이 355ml 스타벅스 톨 사이즈 머그컵에 딱 들어맞았다.


아이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오른손으로 머그컵을 들고 한 모금 살짝 마셨을 뿐이었다. 아빠도 아이를 따라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 머그에 스타우트 맥주라니...... 아빠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오른손에 든 머그컵을 가만히 바라봤다. 스타벅스 로고 속 ‘세이렌’이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빠는 아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객지 생활을 하며 종종 집에 들르는 아이가 내심 반가웠지만 아빠는 표정을 숨기며 술기운을 빌려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나는, 네가 이 머그컵의 반대편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 그런데 반대쪽을 보려면 컵을 쥔 손을 바꿔야겠지.”


아이는 갸우뚱한 표정으로 쥐고 있던 잔을 놓고 왼손으로 바꿔 잡았다. 머그컵이 고개를 돌렸다. 아이 앞에 보이던 세이렌은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무지의 머그컵이 됐다. 아이의 머그컵 속 세이렌은 아빠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요?”

아이는 되물었다.


“그냥. 세상일이 그렇더라고. 아빠는 잘 안되는데 너는 편협한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는 소리야. 그냥 술 취해서 하는 소리야.”



아빠가 아이보다 몇 살 더 많았던 과거의 어느 때. 아빠가 모시고 있던 실장이 있었다. 그는 우유부단함의 표상이었다. 훌륭한 샘플이었다. 그는 회의를 좋아했다. 물론 회의의 목적이나 원하는 결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3시에 시작한 회의는 의미 없는 공전을 거듭했다. 6시가 되고 회의가 끝났다. 결론이 났거나 다음 스텝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주로 퇴근시간이 됐기 때문에 회의가 끝났다. A로 시작한 이야기는 연예인을 거치고 실장의 선배를 거치고 다른 지인을 거치며 Z로 끝났다. 실원들은 적당히 맞장구치며 무음 모드로 전환된 핸드폰으로 연신 누군가와 카톡을 주고받았다.


결재 과정은 더욱 가관이었다. 실장이 결정해야 할, 실장이 결정해도 무방한 사안들을 다음 결재선, 즉 전무에게 가져갔다. 실장은 심지어 대면보고를 선호했다. 하지만 일정이 바쁜 전무는 집무실에 없는 시간이 더 많았다. 보고가 차일피일 밀렸다. 의사결정이 지연됐다. 하루면 될 일이 일주일, 열흘씩 걸리기도 했다. 대리였던 아빠는 실무자로서 불만이 가득했다. 결재 지연의 고통을 오롯이 끌어안았다. 결재 지연으로 일이 밀리고 그 때문에 외부 관계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로 사과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아빠는 예전 실장 이야기를 들려주며 조금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그 실장이란 사람이 일을 하면서 거짓말은 안 하더라고. 그거는 내가 잘 배웠어.”


하루는 대리였던 아빠가 실수를 저질렀다. 외부 파트너에게 프로젝트 예산이 들어간 자료를 보여줬다. 끔찍한 실수였다. 왜 마지막 페이지에 그 시트가 들어있는지 당사자도 궁금해졌다. 그전까지 우호적으로 일을 진행하던 파트너는 본인에게 할당된 예산을 보고 기분이 상했다. 아빠는 되는대로 해명을 날렸다. 있지도 않은 사람을 탓하고 되지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파트너의 실망은 가라앉지 않았다. 아빠는 사무실로 복귀해 실장에게 사실을 알렸다. 실장은 아빠를 데리고 다음날 다시 파트너에게 찾아갔다. 그리고 정중하게 사과부터 했다. 그리고 사실대로 이야기를 전했다. 실무자가 실수를 했고 해명한다고 한 이야기가 변명이 됐다고. 미안하다고. 미팅 내용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실장 당신의 탓이 더 크다고 사과했다. 이후 대화가 오갔고 파트너와는 다시 프로젝트를 제대로 진행하기로 이야기를 마쳤다. 일을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하는 택시 안에서 실장은 아빠에게 조용히 한마디를 했다.


“ㅇㅇ 대리, 집에 가서는 괜찮겠지만 회사에서는 일하면서 절대 거짓말을 하면 안 돼.”



아빠는 말을 이어갔다. 기네스 한 캔 덕분에 확실히 취했다.


실장과 일하던 아빠는 팀을 옮기며 새로운 팀장을 만났다. 입사 8년 차에 팀장 보직을 받은 걸물이었다. 아빠는 기대했다. 스마트하고 합리적인 팀장을. 환상과 기대는 일주일 만에 깨졌다. 그 팀장은 혼자 일하는 사람이었다. 업무지시는 모호했고, 항상 데드라인이 임박해서 일을 시켰다. 하지만 본인은 철야를 넘나드는 야근으로 항상 데드라인을 지켜냈다. 그리고 팀원들에게도 그와 같은 애티튜드를 요구했다. 모두가 야근은 필수였다. 아름다운 여의도의 벚꽃을 매일 야경으로만 감상해야 했다.


팀장 밑에서 팀원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퇴사를 하는 사람, 타 부서로 이동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팀장은 개의치 않았다. 꾸준히 모욕적인 말을 섞어가며 팀원들을 몰아붙였다. 일을 해도 피드백조차 없었다. 아이디어 회의에서는 제안자가 develop까지 담당하게 뒤집어 씌웠고, 좋은 아이디어는 팀장 본인의 성과로 변했다.


“그런데, 그 팀장 새끼가 다른 건 죄다 뭣 같은데 보고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혔어.”


정말 그랬다. 동물적인 감각이었다. 대리였던 아빠가 ‘지금쯤은 보고를 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할 때도 팀장은 보고를 하러 가지 않았다. 대신 상무가, 전무가 언제 그 내용을 필요로 하는지 귀신같이 타이밍을 맞춰 보고를 들어갔다. 당연히 보고는 결과가 좋았고 틀어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루는 새벽 공항 출국장 앞에서 출장 가는 전무를 기다려 결재를 받았는데 나중에 전 직원 앞에서 전무는 그 에피소드를 얘기하며 팀장을 칭찬했다.

     

“보고는 내용보다 타이밍이야. 너도 회사에 가면 알게 될 거야. 아빠는 여전히 보고하는데 젬병이긴 한데, 그래도 그 팀장이랑 야근하면서 지켜보지 않았다면 배우지 못했을 거야.”



단점을 말하고, 흉을 보고, 미워하기는 쉽다. 그런데 막상 장점을 보려고는 하지 않는다. 장점을 보려고 하기 어렵다. 타인을 대하는 인간의 모드가 기본적으로 단점부터 찾도록 프로그래밍된 것만 같다. 그래도 한 번 노력해봄직 한 일은 아닐까. 이 머그컵처럼 신경 쓰지 않고 손에 쥐면 항상 스타벅스 로고만 보게 되지만, 조금 어색하더라도 손을 바꿔 쥐면 아무것도 없는 반대쪽을 보게 되는 것처럼. 새로운 면도 보게 되고, 기대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될 수도 있으니까.


“아빠는, 네가 이 머그컵의 반대편도 바라보는 사람이면 좋겠어.”


잔소리 같은 말을 잔뜩 늘어놓은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빈 컵과 빈 캔을 주방에 올려두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다시 냉장고를 열고 주스팩을 꺼내 다시 한잔을 더 따랐다. 그리고 이번에는 왼손으로 머그컵을 들어 한 모금을 크게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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