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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늦기 전에 와야 할 곳

이탈리아 전국일주 - Episode Ⅵ

by 트래볼러

이탈리아 전국일주 7개 도시 중, 폼페이, 로마에 이어 세 번째로 기대가 컸던 물의 도시, 베네치아(Venezia) 도착했다. 배에서 내려 베네치아 땅을 밟자마자 가이드님의 웰컴 멘트가 이어졌다.


“와~ 여러분! 정말 운이 좋으시네요. 저도 몰랐습니다 지금 축제 중인 줄은.”


과연 정말 몰랐을까? 이탈리아에 몇 년을 살고 계시는 분이.


“베네치아 카니발(Carnevale di Venezia)이라는 축제인데요. 사순절에 열리는... 블라블라블라... 브라질 리우 카니발, 프랑스 니스 카니발과 함께 세계 3대 축제예요.”


휘황찬란한 사람들의 패션과 가면에 시선 강탈된 나머지 가이드님의 설명을 귓등으로 들었다.^^;; 아무튼 우리나라 동대문에서 열리는 패션위크처럼 중세 유럽의 전통 패션을 뽐내는 축제인 것 같았다.(순전히 내 피셜이고, 실제로는 종교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축제였다.)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 나올 법한 복장에 가면을 쓰고서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오히려 평상복 차림의 관광객인 우리가 더 튀어 보였다.


“이거 우리도 가면이라도 하나 사서 쓰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닌가요?ㅋㅋㅋ”

“원하시면 하나 사서 써보세요! 재밌는 추억이 되실 거예요.^^”


나도 한번 써볼까 싶었지만 시선이 가려 약간 불편할 것 같아 패스. 직접 체험하는 것도 좋지만 난생처음인 이 신기한 이 광경을 눈으로 실컷 보며 머릿속에 선명하게 저장해두는 쪽을 택했다.

중세 유럽 복장을 풀세트로 차려입은 사람들은 베네치아 거리의 인싸였다. 마치 우리가 경복궁에 한복 입고 다니면 외국인들이 사진 요청을 하듯 여기저기서 사진 요청이 쇄도했다. 나도 사진 한 장 같이 찍어봐야겠다 싶었다. 주변을 스캔하다 가장 한가해 보이는 커플(?)에게 다가갔다. 다들 바쁘게 사진 촬영 중인데 유일하게 한가해 보였다. 왜 그런지 이유는 대충 알 것 같았다. 복장이 약간, 음 뭐랄까... 범접하기 꺼려지는 포스가 있기는 했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인싸들과 찍으려면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아 틈새시장을 노렸다.


“익스큐즈미... 캔 유... 테이크 어 픽처 위드 미?”

“슈얼~!”


소심한 사진 요청에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응해주었다. 쭈뼛쭈뼛 다가가자 내 옆으로 훅 들어와 양옆을 에워쌌다. 나도 모르게 살짝 긴장이 됐다. 찰칵! 촬영 후 사진을 확인했을 때, 사진 속 나는 분명 활짝 웃고 있었지만 웃는 게 마냥 웃는 건 아니었다는 사실.(ㅎㄷㄷ)

카니발이 한창인 베네치아 도착!
중세유럽에서 시간여행 오신 분들, 나... 쫄고 있니?ㅎㄷㄷ

그 옛날 죄수들이 감옥으로 이송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베네치아를 바라볼 수 있었다는 탄식의 다리(Ponte dei Sospiri)를 지나 나폴레옹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 칭한 베네치아의 랜드마크, 산 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으로 향했다. 광장에는 무대 설치가 한창이었다.


“무슨 공연이 있나 보네요?”

“카니발 기간 마지막 주말에 의상 경연 대회를 하는데, 그때 가장 아름다운 의상하고 가면을 선발해요."

"아~ 혹시 오늘인가요? 오늘도 주말인데."

"아니요, 다음 주가 카니발 마지막 주말이에요.^^“


딱 걸렸다! 축제 중인 줄 몰랐다는 가이드님이 어떻게 일정을 꿰차고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 가이드님의 웰컴 멘트는 전형적인 영업 멘트였음이 확실해졌다. 뭐 어쨌든 기분 좋게 해주는 멘트였으니 나도 그냥 기분 좋게 넘어갔다.


“자, 이제 저 잘 따라오세요. 베네치아에서의 하이라이트인 곤돌라(Gondola) 타러 갈 겁니다.”


산 마르코 광장의 빽빽한 인파를 헤집고 곤돌라 선착장에 도착했다. 곤돌라는 선택관광이었다. 소감부터 미리 말하면 옵션인데 옵션 아닌 옵션 같은 옵션.(뭐라는 거냐?!) 선택 관광이지만 사실상 거의 필수 관광이니 굳이 고민해서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그냥 쿨하게 선택하면 된다. 지금까지 있었던 몇 가지 선택 관광 중 유일하게 모두가 선택한 관광이었다. 미리 이탈리아 여행 공부를 하고 오신 몇몇 분들은 이번 패키지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 중 하나라고도 말씀하셨다. 가이드님이 베네치아의 하이라이트라고 했지만 사실상 이탈리아의 하이라이트였던 셈이다. 물론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근데 약간 비싼 감은 있기는 하다.)

곤돌라는 대운하를 쭉~ 따라가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건물들 사이로 좁은 운하가 나왔다. 육지로 치면 좁은 골목이다. 골목 곳곳에는 섬과 섬을 이어주는 다리가 나왔는데(베네치아는 실제 118개의 섬들이 400개 이상의 다리로 연결되어 만들어진 수상도시다.) 다리를 지날 때면 우린 관광객들의 여행 사진 모델이 됐다. 지나가는 곤돌라를 찍기 위해 사람들은 연신 셔터를 눌러댔고, 남녀노소 국적 불문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아마 외국 여행블로거나 여행 관련 사이트 어딘가에 곤돌라에 앉아 선홍빛 잇몸 만개한 내 모습이 떠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과 감옥을 잇는 탄식의 다리(Ponte dei Sospiri)
산 마르코 광장 입구, 산 마르코와 산 토다로의 기둥(Colonne di San Marco e San Todaro) | 좌: 산 마르코, 우: 산 토다로
국립 마르차나 도서관(Biblioteca Nazionale Marciana)과 산 마르코의 종탑(Campanile di San Marco)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인 마르코 성인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세워진 산 마르코 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
코로나 시대인 지금은 꿈도 못꿀 그리운 축제 모습
광장에선 역시 비눗방울이죠~ 좋아라 하는 아이들
산 마르코 광장에도 어김없이 나타난 시간여행자들
곤돌라 대기 중, 이제 우리 차례인가?
출발!
골목길 아니고 골목 운하 갬성
베네치아 대운하(Grand Canal)에는 4~5성급 고급 호텔들이 많다. 전 세계 셀럽들이 종종 찾기도 하고, 주로 허니문으로 많이 찾는다고. 나도 언젠가는!

곤돌라 체험을 마치고 나니 슬슬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베네치아의 야경을 볼 수 있겠다며 한껏 설렘설렘 하고 있는데 가이드님이 무자비하게 우리의 설렘을 짓밟았다.


"자, 이제 수상택시 타는 곳으로 가실게요~ 집에 갈 시간이네요 어느덧."

"아우~ 좀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방금 배 탔는데 또 배 타나요? 쉬면서 야경 좀 보고 천천히 갑시다! 저녁에 뭐 약속이었어요? 가이드님?ㅋㅋㅋ."


한 어르신께서 사람들을 대표해 총대를 메주셨지만 가이드님은 단호박이었다.


“ㅋㅋㅋ안됩니다~ 지금 택시 기사님 기다리고 있어요. 시간 못 바꿉니다. 가면서 보시죠 가면서.”


쳇, 치사하게 예약 변경 불가 스킬을 쓰다니. 하는 수없이 우리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수상택시에 올랐다. 육지로 돌아가는 수상택시의 분위기는 영~ 꽝이었다. 연속된 뱃놀이에 지치기도 했고 아직 베네치아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축 처지고 냉랭해진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가이드님이 직접 분위기 반전에 나섰다. 수상택시의 엔진 소리와 택시가 가르는 물소리로 가득했던 귀에 가이드님의 박력 있는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노래는 나폴리 민요 산타루치아(Santa Lucia) 베네치아에 산타루치아 역이 있어서 일까? 나폴리 민요지만 베네치아와 완전 찰떡이었다.


짝짝짝짝!

"앵콜! 앵콜! 앵콜!"


한동안 잊고 있었다. 가이드님이 성악 전공자라는걸. 노래가 끝나자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급 팬클럽이 결성됐다.


"원 모어!^^"


수상택시 기사님도 거들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반응이 좋자 가이드님도 신이 나 몇 번 빼는 척하다가 결국 막곡으로 한 곡을 더 뽑으셨다. 울려 퍼지는 막곡에 아쉬움을 함께 떠나보내며 베네치아와는 정말로 작별인사를 했다.

이제 다시 육지로! 수상택시 타고
베네치아에 있는 대운하를 연결하는 4개의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리알토 다리(Ponte di Rialto), 베네치아의 랜드마크 중 하나, 가운데 광고판 떼 버리고 싶다ㅡㅡ^
아카데미아 다리(Ponte dell'Accademia)와 산타루치아역(Stazione di Venezia Santa Luci) 근처 스칼치 다리(Ponte degli Scalzi)




지난 2019년 11월. 물의 도시 베네치아가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이탈리아 정부는 '국가비상상태'를 선포했고, 모든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관광명소인 산 마르코 광장도 폐쇄 명령이 떨어졌다. 도시의 80% 이상이 물에 잠겼기 때문이다. 1966년 이후, 53년 만에 일어난 최악의 재난이라고 한다. 이번 침수는 수 일째 계속되는 호우에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시속 100km나 되는 강한 바람에 바닷물 수위가 갑작스럽게 발생된 재난이라고는 하나, 사실 베네치아의 침수 문제는 일본의 지진 문제처럼 늘 수면 위에 떠 있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매년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사를 보고 있자니 새로 산 신발에 김치 국물 한 방울 묻은 것처럼 안타까웠다. 격하게 아끼는 여행지 중 한 곳인데... 흙흙ㅠㅠ 문득 베네치아 여행 당시 가이드님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여러분은 베네치아에 참 잘 오신 거예요. 어쩌면 나중에는 못 올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래도 아직은 먼 미래 이야기고, 이탈리아에서 그렇게 되도록 놔두진 않겠지만 나중에는 물에 잠겨서 없어질지도 몰라요. 요즘도 비가 많이 오면 종종 장화 신고 다녀야 되거든요."


그때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다고 하니 그때라도 가보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에서 여행지 관련 검색을 하다 보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하는 여행지'라는 기사를 종종 보게 되는데, 앞으로는 죽기 전에 가봐야 할 곳보다 ‘없어지기 전에 가봐야 할 곳'을 먼저 가봐야 할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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