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라오스 여행 마지막 날
비어라오와 맛있는 안주,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특히 난 아내와 함께 라오스의 밤을 즐기고 있으니 역시 여행만큼 행복한 게 또 없구나 새삼 느끼며 행복에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이 행복이 곧 우리에게 불어닥칠 폭풍의 전야였다는 걸 이때는 몰랐다.
"아아악!!! 으아아아앙~~~ㅜㅠ"
어린아이의 고막을 찌를 듯한 비명과 세상 떠나갈듯한 울음소리를 시작으로 폭풍이 들이닥쳤다. 수다삼매경인 시끌벅적한 펍의 소음을 묻어버리다 못해 야시장의 상인들까지도 이목이 집중될 만큼 넓게 퍼지고 날카롭게 꽂히는 비명이었다. 곧이어 익숙한 한국말, 아니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어떡해~! 어우ㅠㅜ 미안해~~~ㅠㅜ"
아내였다. 아이에게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하고 아내와 함께 아이를 살피려고 하자,
돈 터치!!! Fxcking 어글리 코리안!!!
아이의 아빠이자 우리가 자리 잡은 펍의 주인이기도 한 중년의 서양 남자가 잽싸게 나타나 아이를 감싸 안았다. 우리가 아이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눈으로 레이저를, 입으로는 온갖 욕을 쏟아냈다. 그 표정, 그 목소리, 그 워딩에 너무 놀랐지만 나보다 아내가 더 놀랐을 것 같아 일단 아내를 다독이며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아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아직 진정이 덜 됐는지 아내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떨림과 울먹임이 있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아내도 본인 뒤에서 일어난 상황이라 직접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 의자를 고쳐 앉으려는데 의자가 평평하지 않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한쪽 다리에 물컹한 뭔가가 있는 것을 느껴 바로 일어났고, 뒤를 돌아보니 이미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울고 있었고 발등에 선명하게 찍힌 빨간 자국이 보였다는 것이다. 추측컨대 의자를 고쳐 앉는 순간 아이의 발이 한쪽 의자다리 밑으로 들어갔고 순간적으로 발등을 찍힌 게 분명했다. 아내 왈, 당장에 피가 나거나 외상이 보인 건 아니었지만 아직 애기에 가까운 어린아이인데다 순간적으로 찍힌 것이 아니라 비록 잠깐이지만 지그시 눌렸기에 혹여나 뼈나 인대 같은 곳을 다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컸다. 아빠 품에서도 아이의 울음은 쉽사리 그치지 않았고 그럴수록 우리의 걱정과 불안은 점점 더 쌓이고 미안함은 커져만 갔다.
어느 정도 아내의 멘탈이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아 보여 함께 아이의 상태를 보러 가기로 했다. 그리고 아이와 아이의 부모에게도 정식으로 진심을 다해 사죄하기로 했다. 행여나 부상정도가 심각해 필요하다면 당장 병원 응급실로 데려가서 치료비 부담까지도 할 생각이었다. 가게 안쪽에서 아이를 달래고 있는 부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끼고는 뒤돌아 우리를 보자마자 다시 불같이 역정을 내며 문전박대를 했다. 우리와의 대화 일체를 거부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가는 것도 예의가 아닐뿐더러 마음도 좋지 않아 재차 용서를 구해보려 했지만 돌아오는 건 '어글리 코리안' 뿐이었다. 이 정도로 완강하다면 더 이상 다가가는 게 오히려 불편할 수 있겠다 생각이 들어 이만 자리로 돌아왔다. 끝내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하지 못한 아내는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본 주변 테이블의 외국인들이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괜찮아요~ 그냥 사고였어요. 우리가 봤어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가게 직원이자 사장의 친구로 보이는 남자도 아내에게 다가오더니 마찬가지로 사고였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며, 그저 다친 아이나 본의 아니게 가해자가 된 아내나 둘 다 운이 없었을 뿐이라며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아이의 상태를 보고 왔는데 많이 놀라서 그렇지 크게 문제 될 것 같지 않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그나마 안심이 됐다. 솔직히 아이 아빠가 어글리 코리안이네 뭐네 큰소리치고 욕하는 거는 하나도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더랬다. 오로지 아이의 상태가 걱정이었으니까. 불행 중 정말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아이의 울음소리도 그쳐 있었다. 더 이상 아이가 울지 않자 그제야 아내는 어느 정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듯 보였다. 그러자 우리가 여행 중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는지 자기 때문에 여행의 마지막을 다 망쳤다며 이제는 우리에게 미안해했다. 이제 폭풍이 얼추 지나갔는데도 잔해가 남아 여전히 분위기는 썰렁했다.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난 핸드폰 카메라를 치켜들어 셀피를 찍었다. 즐거운 척이라도 하면 조금 분위기가 풀릴까 기대했지만 울상인 아내 옆 혼자만 신난 눈치 없는 남편이 되었을 뿐이었다.
안주가 코로 들어가는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고 그 맛 좋던 비어라도도 그냥 쓴맛 나는 탄산 보리물 같이 느껴졌다. 화기애애한 바이브 속에서 놀기에는 우리 모두의 기분이 받쳐주질 않았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라오스의 마지막 밤을 최대한 잘 마무리하기 위해 일단 자리를 떴다.
비엔티안 나이트푸드마켓에서 출발해 메콩강 야시장까지 천천히 걸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가슴이 답답할 땐 경험상 걷는 게 제법 특효약이다. 활기찬 밤거리를 세상 차분하게 걸었다. 한 시간 전 텐션만 같아도 재잘재잘 떠들고 사진도 찍어가며 걸었을 텐데 지금의 우리는 그저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걷고 있었다. 이제는 오로지 폭풍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점점 라오스와의 작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지나간 폭풍만큼이나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메콩강 야시장은 순수 관광객들을 위한 시장이라기 보단 실제 현지인들의 의식주를 담당하고 있는 찐 로컬시장이었다. 푸드트럭과 기념품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 필요한 갖가지 물건들이 있었다. 파는 사람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방인이었던 방비엥 야시장과는 달리 쇼핑을 하러 나온 현지인들도 제법 많이 보였다.
야시장 옆, 이웃나라 태국과의 접경지역인 메콩강변에는 놀이공원이 있었다. 보기만 해도 동심이 살아나는 우리나라의 놀이공원과는 모습도 분위기도 사뭇 달랐다. 뭔가 급조해서 만든 간이 놀이공원이자 강변 유원지 같았다. 놀이기구는 관람차 하나, 대형 풍선 미끄럼틀 하나, 미니 기차 하나, 풍선 암벽 타기 하나가 전부. 대형 놀이터라고 하는 게 오히려 더 잘 어울렸다. 나머지는 대부분은 노상 포차였다. 아무래도 어린아이가 있는 집이 주로 찾지 않을까, 아이는 놀고 어른들은 먹고 마시고.
딱히 더 볼 것도, 먹을 것도, 살 것도, 탈 것도 없었던 메콩강 야시장을 뒤로하고 이제 짐을 맡겨둔 숙소로 향했다. 짐을 찾고 공항 가서 비행기 타면 여행 끝! 아... 정말 끝인가?! 이대로 끝나는 게 아쉬워 결국 가는 길에 한 펍에 잠시 엉덩이를 붙였다. 비엔티안 나이트푸드마켓에서 못다 마신 비어라오를 마지막으로 수혈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