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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태주 Jun 03. 2018

“잘 먹겠습니다!” 인사말을 하고 먹는 이유

삶과 관계의 균형에 서툰 당신에게

영화 <리틀 포레스트: 사계절> 스틸컷


<리틀 포레스트>라는 심심하고 잔잔한 일본 영화가 있다. 나는 이 영화를 영혼이 허기질 때마다 꺼내 먹는다. ‘먹는다’고 표현한 이유는 이 영화가 ‘수고로 빚은 정직한 한 끼’에 관한 영화라서 그렇다. 고모리라는 한적한 시골 마을로 귀향한 이치코는 자신을 위해 정성껏 요리하고 정갈하게 차려 소박한 한 끼를 먹는다.


내가 인상 깊게 봤던 장면은 이치코가 음식을 차려놓고 먹기 전에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이타다키마스!” 하고 감사 인사를 하는 장면이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사계절>스틸컷


당신으로 하여
“나의 생명을 얻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농사지은 제철 식재료로 음식을 만든다. 그녀가 배추 꽃봉오리 파스타를 먹을 때, 수제비 하토 국물을 마실 때, 갓 졸여낸 밤 조림이나 김이 피어오르는 단팥 찐빵을 쪼개 먹을 때, 나는 침을 삼키며 알게 되었다. “잘 먹겠습니다!”라는 인사는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진솔한 고마움과 가장 많은 관계성을 포괄하고 있는 말이라는 것을.


“잘 먹겠습니다!”는 뭉근하고 우묵하고 질박하다. 어떤 따스하고 그리운 관계를 눈앞에 떠올리게 만든다. “잘 먹겠습니다!”의 숙연한 경의 안에는 사랑합니다와 고맙습니다의 숭고함도 함께 담겨 있다. 또 당신으로 하여 “나의 생명을 얻습니다”라는 근원적인 감사의 마음도 깃들어 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


이 감사가 누군가에게
전해지기를


우리가 “잘 먹겠습니다!”라는 말을 입 밖으로 소리 내서 하는 이유는 이 감사가 누군가에게 전해지기를 바라서일 것이다. 이 감사가 전해지는 차례가 있어야 한다면, 가장 구체적인 대상으로부터 형이상학적 존재에게로 나아가는 게 마땅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릇 안에 담긴 음식의 재료들, 채소와 곡식과 과일에게 가장 먼저, 그것을 길러낸 흙과 햇볕과 빗방울에, 땀흘려 가꾸고 수확한 노동에, 이 모든 기쁨과 행복을 선물한 부엌의 신과 계절을 관장하는 신에게.



관계의 거리가 아니라
관계의 질량이 먼저다


사람들은 대개 관계의 비중을 따질 때, 관계의 질량보다는 관계의 거리에 따르는 습성이 있다. 매우 절친한 사이, 친한 사이, 가까운 사이, 잘 아는 사이, 조금 아는 사이, 먼 사이, 모르는 사이. 그래서 때로 관계의 질량이 가장 큰 나 자신은 나와 잘 모르는 사이가 되기도 하고, 부모나 가족은 친구보다 더 먼 사이가 되기도 한다.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관계들에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한다면, 그 순서는 지금 당장의 친밀의 거리가 아니라 그간의 삶에 투여된 애정과 축적된 시간의 무게여야 하지 않을까.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컷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오늘 당신과 가장 오래된 관계의 질량을 가진 어머니가 당신에게 차려준 음식을 먹기 전 “잘 먹겠습니다!”라는, 세상에서 가장 사람 냄새 나는 말을 빠트렸다면 새봄이 와도 두릅순 초무침이나 머위 꽃봉오리 튀김을 먹을 자격이 당신에게는 아예 없다고 해도 서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 크고 환한 사랑은 잘 감각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을 뿐 없는 것이 아니다.
 


관계의 물리학 바로가기 > http://bit.ly/2FDoaZ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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